일제강점기·개항기 연표
개항기는 강화도조약으로 문을 연 1876년부터 나라를 빼앗긴 1910년까지,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입니다.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을사늑약,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광복 같은 사건을 연도순으로 봅니다.
1876~1945 · 이 쪽 사건 250건 · 1/2 쪽 · 1876~1926
1870년대
- 1876흥선대원군의 하야와 민씨 척족의 부상정치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해 섭정에 오른 흥선대원군은 10년 동안 강력한 쇄국 정책과 경복궁 중건을 밀어붙였다.
- 1876강화도조약 — 닫힌 문이 열리다정치1875년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조약을 강요했고, 1876년 2월 조선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맺었다.
- 1877독도, 기록의 섬 — 태정관지령에서 강치의 절멸까지외교1877년 3월 29일, 메이지 정부의 최고 행정기관 태정관은 내무성의 조회에 답해 "죽도(울릉도) 외 일도(독도로 해석)의 건은 일본과 관계없다"고 지령했다
1880년대
- 1880매관매직의 만연 — 돈으로 사는 관직정치민씨 척족이 권력을 장악한 뒤, 한성에서는 관직이 공개적으로 거래되었다.
- 1880통리기무아문 설치강화도조약으로 문을 연 조선은 1880년 근대적 행정 개혁의 첫걸음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 1880조선책략과 영남만인소 — 갈라진 길정책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청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들여왔다.
- 1881조사시찰단 파견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세워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조선은 1881년 일본의 발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조사시찰단을 보냈다.
- 1881별기군 창설 — 신식 군대의 등장단체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통리기무아문을 두고 개화정책을 본격화했다.
- 1882조미수호통상조약 — 서양과의 첫 수교정치1882년 4월(음력), 조선은 청의 주선으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 1882선혜청의 부패와 민겸호 — 군란의 불씨정치구식 군인의 급료를 관리하던 선혜청의 책임자는 민씨 척족의 핵심 인물 민겸호였다.
- 1882임오군란 — 구식 군인의 봉기정치1882년 6월, 13개월이나 급료가 밀린 구식 군인들에게 지급된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다.
- 1882청군의 개입과 민씨 정권의 재집권정치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잠시 권력을 되찾았지만,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들어온 청군이 그를 톈진으로 압송하면서 권력은 다시 민씨 척족에게 돌아갔다.
- 1882제물포조약 —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앉다외교임오군란 때 성난 군인과 도시 빈민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 일본인 교관과 공사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 1883보빙사 — 서양에 보낸 첫 사절단정치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듬해, 조선은 미국 공사 푸트의 부임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는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했다.
- 1883박문국과 한성순보 — 첫 근대 신문정책1883년 10월,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가 박문국에서 창간됐다.
- 1884민씨 척족의 요직 독점 — 갑신정변의 동기정치임오군란 이후 청의 후원을 등에 업은 민씨 척족은 군권과 재정, 외교를 가리지 않고 요직을 독점했다.
- 1884갑신정변 — 사흘 천하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심해지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급진 개화파는 청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주적 근대 국가를 세우려 했다.
- 1885거문도 사건1885년 영국 해군이 조선의 허락도 없이 남해의 작은 섬 거문도를 점령했다.
- 1885톈진조약 — 두 제국의 약속정치갑신정변에서 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 땅에서 충돌하자, 두 나라는 1885년 톈진에서 조약을 맺었다.
- 1886노비세습제 폐지 — 신분의 벽에 낸 첫 틈정책1886년 2월 고종은 사가노비절목(私家奴婢節目)을 공포해 노비의 신분이 자손에게 세습되는 것을 금지했다.
- 1886배재학당과 이화학당 — 사립 근대교육정책관립학교가 세워지던 무렵, 개신교 선교사들도 잇따라 근대 사립학교를 열었다.
- 1886육영공원 — 첫 관립 근대학교정책1886년 9월, 조선 정부는 정동에 육영공원을 세웠다.
- 1887전신망의 확장 — 이어지는 선들정책1885년 서울과 인천·의주를 잇는 서로전선이 개통된 데 이어, 조선은 한글 전신부호와 독자적 전보장정을 마련하며 통신망을 넓혀갔다.
- 1887경복궁의 전등 — 들어온 근대의 빛정책1887년 3월,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이 켜졌다.
- 1888한로육로통상장정 — 러시아와의 첫 약속정치1888년 8월 조선 대표 조병식과 러시아 대표 베베르가 한로육로통상장정을 맺어, 두만강을 사이에 둔 러시아 연해주와의 국경 육로 통상을 정식화했다.
- 1889방곡령 — 곡물을 둘러싼 마찰정치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이 조선의 쌀과 콩을 대량으로 사들여 가면서 곡물값이 치솟고 흉년의 고통이 깊어졌다.
1890년대
- 1892교조신원운동 — 동학의 첫 집회운동1892년 가을, 동학교단은 공주와 삼례에서 집회를 열어 처형된 교조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고(신원) 동학 탄압을 멈출 것을 요구했다.
- 1893보은집회 — 척왜양창의운동1893년 2월 동학교도 40여 명이 광화문 앞에 엎드려 교조 신원을 호소했으나(복합상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1894고부 민란 — 조병갑의 수탈과 사발통문운동고부 군수 조병갑은 이미 있는 보 옆에 만석보를 새로 쌓게 하고 농민들에게 과중한 수세를 거두는 등 갖은 명목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 1894동학농민운동 — 제1차 봉기운동고부 민란이 안핵사의 탄압으로 더 커지자, 전봉준은 인근 동학 조직과 농민들을 모아 본격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 1894황토현·황룡촌 전투 — 농민군의 첫 승리전쟁1894년 4월 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의 관군을 야간 기습으로 크게 무찔렀다.
- 1894전주화약과 집강소 — 농민의 자치운동황토현·황룡촌의 승리를 딴 농민군은 1894년 4월 말 전라도의 중심 전주성을 점령했다.
- 1894갑오개혁 — 위로부터의 근대화정책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의 영향 아래, 김홍집 내각은 군국기무처를 두고 대대적인 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 1894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정치농민군 진압을 위해 조선 정부가 청에 출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보냈다.
- 1894동학농민운동 — 제2차 봉기, 척왜의 깃발운동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을 장악하자, 전주화약으로 무장을 풀었던 동학농민군은 다시 일어섰다.
- 1894우금치 전투 — 동학농민군의 최후전쟁논산에서 합류한 남접·북접 연합군은 공주로 북상해 12월 우금치 고개에서 일본군·관군 연합과 맞섰다.
- 1895김개남의 처형 — 재판 없이 목이 잘린 남접의 장수인물김개남(1853~1895)은 태인 대접주로, 백산 봉기에서 손화중과 함께 총관령을 맡은 남접의 실질적 2인자였다.
- 1895시모노세키조약과 삼국간섭정치1895년 4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끝내고, 랴오둥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았다.
- 1895전봉준의 체포와 처형인물우금치에서 패한 농민군은 곳곳에서 흩어져 추격당했다.
- 1895을미개혁과 단발령정책을미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의 마지막 단계로 태양력 도입, 종두법 시행, 소학교·우체사 설치, 연호 건양 채택, 친위대·진위대 편성 등을 단행했다.
- 1895을미사변 — 명성황후 시해러시아에 기대어 일본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의 중심에 왕비가 있다고 본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습격했다.
- 1895을미의병 — 첫 항일 의병운동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분노한 유생들이 "국모의 원수를 갚고 머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전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 1896열강의 이권 침탈정치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열강은 신변 보장을 약속하며 앞다투어 이권을 가져갔다.
- 1896아관파천 — 러시아 공사관으로정치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비밀리에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 1896독립신문 창간정치1896년 4월 서재필과 개화파가 한글 전용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 1896독립협회 창립단체독립신문 창간에 이어 1896년 7월 서재필과 개화파가 독립협회를 세웠다.
- 1897대한제국 선포 — 황제의 나라정치1년간 머물던 러시아공사관을 나와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로 즉위했다.
- 1897독립문 완공단체독립협회가 추진한 독립문이 1897년 완공됐다.
- 1898흥선대원군 별세인물1898년, 한 시대를 호령하던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났다.
- 1898만민공동회 — 광장의 정치운동1898년 독립협회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관리와 백성이 한자리에서 국정을 논하는 전례 없는 광장을 만들었다.
- 1898헌의6조정치만민공동회의 열기가 높아지자 고종은 정부 대신과 독립협회 대표가 함께하는 관민공동회를 열게 했고, 그 자리에서 헌의6조가 채택됐다.
- 1898독립협회 해산정치만민공동회가 의회 설립과 국정 개혁을 요구하며 영향력을 키우자, 황제권을 위협으로 본 정부는 보부상 단체 황국협회를 동원해 충돌을 일으키고 독립협회를 강제로…
- 1899대한국 국제 반포 — 황제 중심 체제정책1899년 대한제국은 대한국 국제를 반포해, 황제가 군사·입법·행정·외교의 모든 권한을 갖는 전제군주제를 헌법적으로 명문화했다.
- 1899경인선 개통 — 첫 철도정책1899년 9월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개통됐다.
- 1899한청통상조약 — 대등하게 마주 선 두 제국정치1899년 9월 11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청 전권대신 서수붕이 한청통상조약을 맺었다.
1900년대
- 1900대한제국 — 자주의 마지막 빛정책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작한다(舊本新參)"는 원칙 아래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했다.
- 1900양전사업과 지계 발급정책대한제국은 1898년부터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세워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계아문(地契衙門)이 근대적 토지문서인 지계(地契)를 발급했다.
- 1900폭풍 전야 — 두 제국 사이의 대한제국정치만주를 장악한 러시아와 한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본 사이에서, 대한제국은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균형 외교로 운신의 폭을 지키려 했다.
- 1900전차가 달리기 시작한 수도정책1899년 5월 한성에 전차가 개통되었다.
- 1900원수부와 대한제국군정책1899년 설치된 원수부(元帥府)는 황제가 군사 통수권을 직접 행사하는 기구로, 기존 군부의 권한을 사실상 흡수해 군 지휘체계를 황제 직속으로 재편했다.
- 1901전차와 전등의 시대정책1899년 개통된 전차는 1901년에도 한성 거리를 가로질러 달리며 도시의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 1901지계 사업 확대정책대한제국은 1898년 시작된 토지 측량을 1901년 들어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하며, 지계 발급을 통해 근대적 조세와 행정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 1901흔들리는 균형 외교정치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자율적 외교 공간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 1901제주의 격랑 — 이재수의 난운동1901년 제주에서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다.
- 1902간도관리사 이범윤 파견정치대한제국은 간도가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며, 1902년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이듬해 간도관리사로 파견했다.
- 1902이용익 — 황실 재정을 틀어쥔 고종의 금고지기인물함경도 보부상 출신으로 단천 금광 정보를 고종에게 제공해 출세한 이용익은, 전환국장·내장원경·탁지부대신을 두루 거치며 대한제국 황실 재정을 한 손에 틀어쥐었다.
- 1902한성~인천 전화 개통 — 목소리가 선을 타고정책1902년 3월 통신원이 한성과 인천 사이에 공중전화를 개설하면서,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는 장거리 전화 시대가 열렸다.
- 1903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창립단체1903년 10월 서울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가 창립됐다.
- 1904러일전쟁 발발 — 한반도를 건 제국의 충돌전쟁1904년 2월 8일, 일본이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제물포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을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터졌다.
- 1904한일의정서 — 중립선언을 짓밟다정책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을 압박해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다.
- 1904일진회 발족 — 병합을 청원한 정치단체정치1904년 8월 18일 송병준·윤시병 등이 유신회를 조직하고 이틀 뒤인 20일 일진회로 개칭해 발족했다.
- 1904제1차 한일협약 — 고문정치의 시작정책1904년 8월 22일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외교 고문을 두도록 강제했다.
- 1905경부선 철도 개통정책1905년 1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됐다.
- 1905을사늑약 — 외교권을 빼앗기다정책1905년 11월 17일,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군대로 경운궁을 포위한 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을 강제했다.
- 1905민영환 자결 — 죽어도 죽지 않는다인물을사늑약 체결에 통분한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1905년 11월 30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했다.
- 1906신돌석 — 태백산 호랑이, 최초의 평민 의병장인물을사늑약에 항거해 일어난 의병 가운데 신돌석은 양반이 아닌 평민 출신으로 부대를 이끈 최초의 의병장이었다
- 1906통감부 설치 — 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정책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 2월 한성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 1906최익현 의병 봉기와 순국위정척사의 거유(巨儒) 최익현은 을사늑약에 분개해, 1906년 6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 1907윤희순 — 안사람 의병가,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인물을미의병 때부터 윤희순은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로 시작하는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부르며 여성들을 의병 지원에 조직했고, 군자금을 모으고 화약을…
- 1907국채보상운동 — 나라 빚을 백성이 갚자운동일본은 대한제국에 차관(빚)을 강요해 1,300만 원에 이르는 국채를 안겼다
- 1907신민회 결성 — 비밀결사의 시작단체1907년 안창호·양기탁·이동휘·이승훈 등이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했다.
- 1907헤이그 특사 — 만국평화회의의 호소정치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 세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했다.
- 1907고종 강제퇴위정치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본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앞세워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 1907정미7조약 — 차관정치와 통치권 장악정책고종을 퇴위시킨 일본은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제3차 한일협약)을 강제했다.
- 1907대한제국 군대해산과 정미의병운동1907년 8월 1일, 일본은 정미7조약의 밀약에 따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 1908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운동정미의병이 전국으로 번지자, 1907년 말 각지의 의병부대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해 13도창의군이라는 전국연합부대를 결성했다.
- 1908전명운·장인환 스티븐스 저격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는 1908년 미국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는 망언을 공공연히 늘어놓았다.
- 1909동의단지회 — 안중근의 단지동맹단체1909년 2월 26일,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의병 동지가 연해주 연추(크라스키노) 인근 카리(下里) 마을에 모여 비밀결사 동의단지회를 결성했다.
- 1909기유각서 — 사법권마저 빼앗기다정책1909년 7월 일본은 기유각서를 강제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통감부로 넘겼다.
- 1909남한 대토벌 작전 — 호남 의병을 에워싸 쓸어 내다전쟁1907년 군대 해산 뒤 의병전쟁은 전국으로 번졌고, 1908년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로는 호남이 의병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 1909안중근 하얼빈 의거 — 이토 히로부미 처단1909년 10월, 러시아 교민신문 대동공보는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담하러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1910년대
- 1910주시경 — 한글이라는 이름을 짓다인물주시경은 훈민정음을 근대 언어학의 눈으로 연구해 국어문법을 세우고, "크고 바른 글"이라는 뜻의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어 그 위상을 바로 세운 국어학의 아버지다.
- 1910중국 조선족 — 간도에 뿌리내린 공동체이주19세기 중반, 함경도·평안도의 가난한 농민들이 굶주림을 피해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 1910하와이 한인 이주 — 사탕수수밭의 첫 디아스포라이주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허가 아래 이뤄진 한국 최초의 집단 해외이민이다.
- 1910토지조사사업 시작정책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지휘 아래 "토지조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토지 소유권을 조사했다.
- 1910안중근 순국 — 뤼순 감옥의 마지막인물하얼빈 의거(1909.10.26) 직후 체포된 안중근은 일본 관헌에 인계돼 뤼순 감옥에 갇혔다.
- 1910멕시코 애니깽 — 속아서 건너간 노예 이민이주1905년 4월 4일, 토지·임금·기회를 약속받은 1,033명의 한인이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도착했다.
- 1910이완용 — 병합을 체결한 매국의 얼굴인물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한 을사오적의 한 명이었고, 1910년 8월 22일에는 통감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조인한 장…
- 1910경술국치 — 한일병합조약 공포정책1910년 8월 22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한일병합조약에 조인하고, 8월 29일 이를 공포했다.
- 1910순종 —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물대한제국의 제2대이자 마지막 황제 순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한 부친 고종의 뒤를 이었으나, 실권 없는 허울뿐인 황제였다.
- 1910헌병경찰제 시행 — 무단통치의 일상적 통제정책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제를 시행했다.
- 1910데라우치 마사타케 — 초대 조선총독인물한일병합을 마무리한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10년 10월 초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해 1916년까지 식민통치의 기틀을 세웠다.
- 1910회사령 공포 — 민족자본 억압정책1910년 12월 29일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을 공포해(1911년 1월 1일 시행), 회사를 세우려면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 1911신흥강습소 설립 — 서간도 독립군 기지단체105인 사건으로 국내 활동이 막히자, 이회영·이상룡 등 신민회 인사들은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다.
- 1911제1차 조선교육령 공포 — 차별 학제의 시작정책1911년 8월 23일 칙령 제229호로 공포된 제1차 조선교육령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기초해 충량한 국민을 육성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웠다.
- 1911105인 사건 — 신민회 와해1910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다는 구실로, 일제는 1911년 평안도 일대 기독교 계열 민족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 1912조선태형령 시행 — 일상 속의 신체형정책1912년 3월 18일 공포되고 4월 1일부터 시행된 조선태형령은 조선인에게만 적용된 신체형 제도였다.
- 1912토지조사령 공포정책1912년 8월 일제는 토지조사령을 공포해 1910년부터 진행해온 토지조사사업에 법적 틀을 부여했다.
- 1912대한독립의군부 조직단체고종의 밀명을 받은 의병장 임병찬은 1912년 전국의 의병과 유생을 규합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 1913송죽회 결성 — 여성 비밀결사단체1913년 평양 숭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송죽회(松竹會)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 1913안창호 —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인물신민회를 이끌다
- 1913흥사단 창립 — 안창호의 인격수양운동단체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무너진 뒤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는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세웠다.
- 1914이동휘 — 무장투쟁과 사회주의의 길인물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이동휘는, 망명 후 연해주를 무대로 무장투쟁 노선을 이끌었다.
- 1914최재형 — 연해주 한인사회의 페치카인물함경북도 경원의 노비 집안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한 최재형은, 군납 사업으로 자수성가해 연추 한인사회의 지도자가 됐다.
- 1914대조선국민군단 — 하와이의 군사 양성단체무장투쟁론을 주창한 박용만은 1914년 하와이 오아후섬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했다.
- 1914대한광복군정부 수립단체연해주의 한인 결사체 권업회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1914)을 독립의 기회로 보고, "제2의 러일전쟁"을 기대하며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 1914박용만 — 하와이 무장투쟁의 기수인물안창호·이승만과 함께 미주 한인사회 3대 지도자로 꼽힌 박용만은, 외교론·실력양성론과 뚜렷이 구별되는 무장투쟁론을 일관되게 주창했다.
- 1914이상설 — 연해주 독립운동의 구심인물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됐던 이상설은 귀국하지 못하고 연해주에 머물며 망명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 1915대한광복회 결성 — 1910년대 최대 비밀결사단체1915년 7월 대구에서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대한광복회가 결성됐다.
- 1915박상진 — 대한광복회 총사령인물판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일제의 관리가 되기를 거부한 박상진은,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상을 차려 독립운동의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 1916서일 — 북간도 대종교 무장운동의 총재인물대종교(단군 신앙) 지도자 서일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의병 출신들을 규합, 북간도 왕청현에 중광단을 세웠다.
- 1916원불교 개교 — 민중 속의 자력 신앙단체1916년 전라도 영광에서 박중빈(소태산)이 큰 깨달음을 얻고 원불교를 열었다.
- 1916대정친목회 결성 — 친목의 탈을 쓴 통치 협력정치무단통치로 집회·결사가 봉쇄된 시기, "친목"을 명분으로 경성의 관료·귀족·금융인·기업인 상층부가 결성한 단체.
- 1917대동단결선언 — 국민주권의 첫 선언정치1917년 신규식·조소앙 등 상하이의 독립운동가 14명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 1917신규식 — 상하이 독립운동의 개척자인물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망국에 비분강개해 음독을 시도했다
- 1918한인사회당 결성 —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단체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연해주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에서 독립의 새로운 길을 보았다.
- 1918김알렉산드라 —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인물1885년 연해주에서 한인 이주민의 딸로 태어난 김알렉산드라(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러시아 한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운 한인 최초의…
- 1918무오독립선언 — 해외 39인의 독립선언정치1918년 말(또는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해외 독립운동가 39인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 1918토지조사사업 완료 — 수탈의 마무리정책1910년 시작된 토지조사사업이 1918년 마무리됐다.
- 1919김마리아 — 2·8의 불씨를 품고 현해탄을 건너다인물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는 선언서를 기모노 띠 속에 숨겨 현해탄을 건너와 국내에 전파하며 3·1운동의 불씨를 날랐다.
- 19192·8 독립선언 — 도쿄 유학생들의 외침운동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약 600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다.
- 19193·1운동 —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운동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시민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 1919손병희 — 3·1운동 민족대표의 영수인물동학을 천도교로 재건한 손병희는 민족대표 33인의 영수로서 3·1운동을 이끌었다.
- 1919원산 만세운동운동서울과 평양에서 만세 함성이 터진 1919년 3월 1일, 함경남도 원산에서도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 1919평양 만세운동운동서울과 같은 날인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터졌다.
- 1919하세가와 요시미치 — 3·1운동을 진압한 총독인물데라우치의 뒤를 이은 제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1916년부터 무단통치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 1919대구 만세운동운동1919년 3월 8일, 대구 큰장(서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 1919김구 — 임시정부에 투신하다인물황해도에서 교육운동과 신민회 활동을 하다
- 1919이승만 — 외교독립론과 초대 임시대통령인물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외교를 통한 독립을 주장해온 이승만은,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에 이어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됐다.
- 1919오동진 — 서간도 망명과 무장투쟁의 시작인물평안북도 의주에서 민족학교 일신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펴던 오동진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 1919조천 만세운동 — 제주의 독립선언운동서울 휘문고보에 재학 중이던 조천 출신 학생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귀향하자, 숙부 김시범은 유학자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 1919발안 장날 만세시위 — 제암리 학살의 전조운동1919년 3월 30일 발안 장날, 천도교 지도자들의 주도로 수원군 향남면 발안 장터에서 8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 1919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운동경성에서 3·1운동을 직접 목격한 17세 학생 유관순은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 천안으로 돌아와, 아버지 유중권·숙부 유중무, 이웃 조인원 등과 함께 1919년…
- 1919수촌리 학살 사건발안 장날 만세시위(3월 30일)에 대한 보복으로, 1919년 4월 5일 일본 육군이 수촌리에 들이닥쳐 만세시위 주동자를 색출한다며 주민들을 학살하고 가옥 4…
- 1919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정치3·1운동으로 분출된 독립 열망은 곧 통일된 정부 수립 운동으로 모였다.
- 1919제암리 학살 사건3·1운동을 진압하던 일본군은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제암리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문을 잠근 뒤 총격을 가하고 불을…
- 1919스코필드 — 3·1운동의 서른네 번째 민족대표인물캐나다
1920년대
- 1920구월산대 — 황해도 무장조직전쟁황해도 구월산을 근거지로 활동한 무장 항일단체.
- 1920김구 — 임시정부 경무국장인물1920년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으로 정보·감찰·경찰 업무를 맡고 있었다.
- 1920김원봉 — 의열단 결성·지휘인물1919년 11월 만주에서 조직된 의열단을 1920년 김원봉이 단장으로서 본격 지휘하기 시작했다.
- 1920민원식 — 친일단체 국민협회 조직정치1920년 1월 민원식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지원을 받아 친일단체 국민협회를 조직했다.
- 1920블라디보스토크 무기 조달 루트전쟁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숨겨진 배경.
- 1920신채호 — 보합단 조직인물임시정부와 결별한 신채호는 1920년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와 제2회 보합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 1920신흥무관학교전쟁1911~1920년 약 3,500명의 독립군 간부를 길러낸 무장투쟁의 산실.
- 1920안창호 — 임정 내무총장·흥사단인물1920년 안창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활동하며,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조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 1920양세봉 — 남만주 무장투쟁 시작인물1920년대 양세봉은 남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 1920윤봉길 — 농촌계몽운동인물1920년대 초 윤봉길은 고향 충남 예산에서 농촌계몽운동에 힘쓰고 있었다.
- 1920이봉창 — 오사카에서 노동인물1920년대 이봉창은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었다.
- 1920이회영 — 베이징 망명 활동인물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은 임시정부 노선과 거리를 두고 1920년 베이징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 1920일본·국제 정세정책1차 대전 종전 후 일본은 경제 불황과 사회 갈등에 시달렸다.
- 1920니콜라옙스크 사건 (니항사건)1920년 2~5월 시베리아 니콜라옙스크에서 일본군과 러시아 적군 사이에 충돌과 학살이 거듭됐다.
- 1920천마산대 — 국내 무장유격전전쟁1920년 최시흥이 평북 천마산을 근거지로 조직한 무장 항일단체.
- 1920회사령 폐지정책1910년 12월 공포돼 조선인의 회사 설립을 총독 허가제로 묶어두던 회사령이 1920년 3월 31일 폐지됐다.
- 1920동아·조선일보 창간정치문화통치로 허용된 민간지.
- 1920연해주 4월참변 (신한촌 사건)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한인 마을 신한촌을 습격해 학교를 불태우고 지도자들을 대량 학살했다.
- 1920조선노동공제회 창립운동1920년 4월 11일 서울에서 회원 678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 노동운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됐다.
- 1920영친왕-이방자 결혼과 폭탄 미수정치1920년 4월 28일 도쿄에서 영친왕 이은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의 정략결혼이 거행됐다.
- 1920보합단 — 평북 무장조직전쟁1920년 5월 김중량 등이 평북 의주 동암산을 근거지로 결성한 무장단체.
- 1920봉오동 전투전쟁홍범도·최진동·안무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남양수비대와 합류, 약 270명)를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격파했다.
- 1920삼둔자 전투전쟁봉오동 전투의 전초전.
- 1920박헌영 —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와 만나다인물경성고보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꿈꾸던 박헌영은 1920년 9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 1920조선물산장려운동 발족운동회사령 폐지로 일본 자본이 밀려들자, 이에 맞서 "내 살림 내 것으로"를 내세운 경제자립운동이 평양에서 조만식 등의 주도로 발족했다.
- 1920독립군 밀산 집결전쟁간도참변을 피해 독립군 주력 약 4,000명이 소·만 국경의 밀산부로 집결했다.
- 1920부산경찰서 투탄 (박재혁)의열단원 박재혁이 고서적상으로 변장해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을 투척, 서장 등이 사망했다.
- 1920유관순 순국1919년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 1920간도 참변 (경신참변)청산리 패전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간도의 한인 마을을 초토화했다.
- 1920청산리 대첩전쟁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가 청산리 일대(백운평·천수평·어랑촌 등)에서 6일간 10여 차례 교전 끝에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 1920훈춘 사건1920년 10월 마적단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방화한 사건.
- 1920밀양경찰서 투탄 (최수봉)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 2개를 투척했다.
- 1920산미증식계획 시작정책일본의 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을 식량 공급지로 삼은 정책(1차 1920~1925).
- 1920강우규 순국1919년 9월 남대문역에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가 1920년 11월 29일 오전 10시 30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 1921김구 — 임정 수습인물이동휘 사임과 이승만의 미국행으로 혼란에 빠진 임시정부에서 김구는 내무부 활동을 계속하며 조직을 유지했다.
- 1921대한독립군단 자유시 이동이주간도참변을 피해 밀산에 집결한 독립군 약 3,500명이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해 1921년 1월부터 연해주 이만을 거쳐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1921문화통치 본격화 — 회유와 분열정책1921년 사이토 총독은 조선 유력자를 회유하는 "내선융화" 정책을 본격화했다.
- 1921신채호 — 군사통일주비회 주도인물1921년 신채호는 베이징에서 임시정부 외교독립론에 맞서 군사통일주비회를 주도했다.
- 1921임정 개조·창조 논쟁의 시작정치이동휘 사임과 워싱턴 회의 실패로 임시정부의 권위가 흔들리자, 임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 1921홍범도 — 이르쿠츠크 고려혁명군관학교인물봉오동·청산리의 영웅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으로 부하 대부분을 잃었다.
- 1921임정 내분 — 이동휘 사임정치1921년 1월 24일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가 대통령 이승만과의 노선 대립(무장투쟁론 vs 외교독립론)으로 사임했다.
- 1921나혜석 — 한국 최초 여성 개인전인물1921년 3월 나혜석은 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 후원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 1921민원식 암살 — 양근환 의거1921년 2월 17일 독립운동가 양근환이 도쿄 제국호텔에서 친일단체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을 비수로 찔러 암살했다.
- 1921군사통일주비회 — 임정 해산 요구정치1921년 4월 박용만·신채호·신숙 등 비타협 무장투쟁파가 베이징에서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하고, 임시의정원 해산 및 새로운 독립운동 기구 구성을 요구했다.
- 1921고려공산당 분립 —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정치1921년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동휘 계열)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갈라졌다.
- 1921자유시 참변 (흑하사변)1921년 6월 28일 소련 적군이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를 포위 공격했다.
- 1921대한독립군단 해체이주자유시 참변 이후 대한독립군단은 사실상 해체됐다.
- 1921부산부두 노동자 총파업운동1921년 8월 부산 부두의 운수노동자 5,000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 1921박상진 순국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 1921서일 순국 (자유시 참변 충격)인물북로군정서 총재이자 청산리 대첩의 정신적 지주였던 서일이 자유시 참변의 충격으로 1921년 8월 27일 자결(또는 병사)했다.
- 1921김익상 — 조선총독부 투탄의열단원 김익상이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해 조선총독부 청사에 잠입, 비서과와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 1921시베리아 출병 철수 시작정책워싱턴 회의 압력으로 일본이 시베리아 출병 철수를 시작했다(완전 철수 1922).
- 1921여운형 — 고려공산당과 모스크바인물소련의 지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펼치려던 여운형은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해 『공산당선언』 등을 번역하며 사회주의를 연구했다.
- 1921워싱턴 회의 — 외교독립의 좌절정치1921년 11월~1922년 2월 미국·영국·일본·프랑스 등 열강이 워싱턴에서 군비축소회의를 열었다.
- 1922김경천 — 백마 탄 김장군, 연해주의 전설인물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엘리트 기병 장교 김경천은 3·1운동 소식에 보장된 앞길을 버리고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가르치고 연해주에서 마적과 일본군…
- 1922국민대표회의 소집 운동정치이동휘 사임과 워싱턴 회의 실패로 권위가 무너진 임시정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1922년 독립운동 세력 전체가 모이는 국민대표회의를 열자는 운동이 본격…
- 1922극동민족대회 — 모스크바정치워싱턴 회의가 한국 문제를 외면하자, 코민테른은 이에 대항해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극동민족대회를 열었다.
- 1922김원봉 — 의열단 본부 베이징인물1922년 김원봉은 베이징을 거점으로 의열단을 이끌고 있었다.
- 1922안창호 — 국민대표회의 준비인물1922년 안창호는 분열된 임시정부를 되살리기 위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 1922홍범도 — 연해주 이만에서인물자유시 참변과 이르쿠츠크 시기를 거친 홍범도는 1922년 연해주 이만으로 돌아왔다.
- 1922독립군 만주 귀환전쟁자유시 참변에서 살아남은 독립군 일부가 1922년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 1922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정책1922년 2월 일제는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 1922박헌영 — 국내 잠입과 체포인물1922년 1월 박헌영은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뒤,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실천하기 위해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 1922형평사 전사(前史) — 백정 차별 철폐 움직임운동1922년 무렵 경남 진주를 중심으로, 도살업에 종사하던 백정에 대한 신분 차별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 1922황포탄 의거 (김익상·오성륜·이종암)1921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던 의열단원 김익상이, 1922년 3월 28일 상하이 황포탄 부두에서 오성륜·이종암과 함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
- 1922대한통의부 결성전쟁자유시 참변으로 만주·연해주의 독립군이 궤멸된 뒤, 흩어진 무장세력을 다시 묶으려는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 1922조선노동연맹회 결성운동1922년 10월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분화해 나와 조선노동연맹회를 결성했다.
- 1923신채호 — 베이징에서 역사연구로인물1923년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투쟁의 사상을 벼리는 한편,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 1923안창호 — 분열을 끌어안다인물1923년 안창호는 국민대표회의 개조파의 중심에서 분열된 독립운동을 어떻게든 하나로 묶으려 애썼다.
- 1923육군주만참의부 결성전쟁대한통의부의 노선 갈등 속에서, 임시정부 직할 군사조직을 표방한 참의부가 1923년 남만주에서 결성됐다.
- 1923조선혁명선언 발표정치의열단장 김원봉의 의뢰로 신채호가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 1923국민대표회의 개막정치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 71개, 대표 125명이 모인 국민대표회의가 개막했다.
- 1923김상옥 — 종로경찰서 의거1922년 10월 권총과 폭탄을 들고 서울에 잠입한 의열단원 김상옥이 1923년 1월 12일 밤, 독립운동가 탄압의 본산이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 1923조선인 도일(渡日) 증가와 차별정책여행증명서 제도가 완화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는 조선인이 급증했다.
- 1923강상호 — 양반이 백정과 함께 서다인물경남 진주의 양반가 출신인 강상호는 백정 자녀의 입학 거부 사건을 접하고 형평운동에 뛰어들었다.
- 1923조선형평사 창립운동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백정 출신과 양심적 지식인들이 모여 조선형평사를 창립했다.
- 1923방정환과 어린이날 제정운동천도교 소년회를 이끌던 방정환은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처음 기념행사를 열었고, 이듬해에는 색동회를 조직해 전국적인 어린이날 행사와 잡지 《어…
- 1923국민대표회의 결렬정치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안창호 중심의 개조파와, 임정을 해체하고 새 정부를 세우자는 신채호·문창범 중심의 창조파가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 1923암태도 소작쟁의운동1923년 전남 암태도의 소작농들이 지주 문재철의 70~80%에 이르는 고율 소작료에 맞서 일어났다.
- 1923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1923년 9월 1일 진도 7.9의 대지진이 도쿄와 관동 일대를 강타했다.
- 1924김원봉 — 노선 전환의 고민인물1924년 김원봉은 잇따른 의열 거사에도 일제가 무너지지 않는 현실 앞에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 1924박은식 — 임정을 떠받치다인물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은식은 1924년 흔들리는 임시정부를 지키는 중심에 섰다.
- 1924임시정부 침체와 이승만 탄핵 움직임정치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임시정부는 깊은 침체에 빠졌다.
- 1924김지섭 — 도쿄 이중교 의거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분노 속에서, 의열단원 김지섭이 김원봉의 지시를 받아 1923년 말 일본에 잠입했다.
- 1924민립대학 설립운동운동1923년부터 조선인들은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세우자며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였다.
- 1924각파유지연맹 결성 — 친일 네트워크의 단면도정치1924년 3월 25일 남산정 경성호텔에서 국민협회·대정친목회·동민회·노동상애회 등 11개 친일단체가 연합해 결성했다.
- 1924조선노농총동맹 창립운동1924년 4월 18일 서울 광무대에서 167개 단체 대표 204명이 모여 조선노농총동맹을 창립했다.
- 1924경성제국대학 설립정책1924년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 1924암태도 소작쟁의 승리운동1923년부터 1년 넘게 이어진 암태도 소작농들의 투쟁이 1924년 마침내 승리로 끝났다.
- 1924정의부 결성전쟁자유시 참변 이후 흩어진 만주 독립운동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 1925김소월 — 진달래꽃, 조선의 슬픔에 리듬을 주다인물스물세 살의 김소월이 펴낸 시집 진달래꽃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의 반어 속에 이별의 통곡을 눌러 담아, 민요의 가락으…
- 1925권기옥 —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물평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기옥이 1925년 중국 윈난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됐다.
- 1925김좌진 — 북만주에서 다시 서다인물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은 자유시 참변과 만주 귀환을 거쳐, 1925년 신민부를 결성하며 북만주 무장투쟁의 중심에 다시 섰다.
- 1925신민부 결성전쟁1925년 3월 북만주 닝안현에서 신민부가 결성됐다.
- 1925이승만 탄핵과 박은식 대통령 취임정치1925년 3월 임시정부 의정원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해 면직하고, 박은식을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 1925조선공산당 창당정치1925년 4월 17일 서울 황금정의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김재봉·박헌영·조봉암 등 19명이 비밀리에 모여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 1925치안유지법 시행정책1925년 5월 일제는 조선에 치안유지법을 시행했다.
- 1925조선사편수회 설치 — 식민사관의 제도화정책조선총독부가 한국사 편찬을 전담할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 1925미쓰야 협정정책192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만주 군벌 장쭤린이 협정을 맺었다.
- 1925을축년 대홍수운동1925년 여름 네 차례의 큰 홍수가 한반도를 덮쳤다.
- 1925신의주사건 —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정치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작은 폭력 사건이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 1926나운규 — 아리랑, 조선 영화가 태어난 날인물독립운동으로 옥살이를 했던 스물네 살의 나운규가 각본·감독·주연을 도맡은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하자, 미치광이 주인공이 일제의 앞잡이를 낫으로 베는 마…
- 1926김창숙 — 의열투쟁의 자금줄인물유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1926년 국내에서 모금한 자금을 바탕으로 의열투쟁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