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개항기 연표
개항기는 강화도조약으로 문을 연 1876년부터 나라를 빼앗긴 1910년까지,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입니다.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을사늑약,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광복 같은 사건을 연도순으로 봅니다.
1876~1945 · 이 쪽 사건 149건 · 2/2 쪽 · 1926~1945
1920년대
- 1926한용운 — 『님의 침묵』 출간인물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옥고를 치른 승려 한용운은 1925년 8월 설악산 내설악 백담사에서 시집 『님의 침묵』의 원고를 탈고하고,…
- 1926순종 승하 — 대한제국 황실의 종말정치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창덕궁에서 53세로 승하했다.
- 1926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인물1926년 6월 대구 출신 시인 이상화는 잡지 『개벽』 70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다.
- 1926임시정부 — 국무령제 전환정치국민대표회의 결렬과 이승만 탄핵을 거친 임시정부는 1925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개헌했다.
- 19266·10 만세운동운동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을 기해 전국적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 1926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정치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대가는 컸다.
- 1926가네코 후미코 — 옥사한 아나키스트, 대한민국 서훈을 받은 유일한 일본인 여성인물무적자(호적 없는 존재)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경험한 가네코 후미코는, 도쿄에서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을 만나 사상적 동지이자 연인이 됐다.
- 1926조선총독부 신청사 준공정책1926년 10월 일제는 경복궁 정문 바로 안쪽에 거대한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완공했다.
- 1926김구 — 임시정부 국무령에 오르다인물1926년 12월 김구가 임시정부 국무령에 올랐다.
- 1926정우회 선언 — 민족협동전선의 길정치1926년 11월 15일 사회주의 사상단체 정우회가 선언을 발표했다.
- 1926나석주 — 동양척식회사 의거동양척식회사에 땅을 빼앗겨 소작농으로 전락한 집안에서 자란 나석주는, 일제 경제 침탈의 본산을 겨눴다.
- 1927김활란 — 근우회와 여성운동인물1927년 김활란은 근우회 창립의 중심에 서서 여성계 민족유일당 운동을 이끌었다.
- 1927신채호 —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인물1927년 신채호는 신간회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는 한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해 아나키즘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 1927의열단의 노선 전환 — 개별투쟁에서 조직투쟁으로정치김익상·김상옥·김지섭·나석주로 이어진 영웅적 의열투쟁이 거듭 희생으로 끝나자, 김원봉과 의열단은 개별 암살·파괴의 한계를 절감했다.
- 1927중국 국공분열과 독립운동의 동요정치1927년 중국에서 장제스의 4·12 정변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이 깨지고 대대적인 공산당 탄압이 벌어졌다.
- 1927신간회 창립 — 민족유일당정치1927년 2월 15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손을 잡고 신간회를 창립했다.
- 1927이상재 별세 — 신간회 초대 회장정치신간회 창립 한 달여 만인 1927년 3월 29일, 초대 회장 이상재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 1927정칠성 — 계급과 여성해방을 함께 외치다인물기녀 출신으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가 된 정칠성은 1927년 근우회 창립의 핵심 인물로 나섰다.
- 1927근우회 창립 — 여성계 민족유일당운동신간회 창립에 호응해, 1927년 5월 27일 여성운동가들이 좌우를 초월한 여성계 민족유일당 근우회를 창립했다.
- 1927김창숙 체포 — 나석주 의거의 여파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의거를 기획·지원했던 유림 독립운동가 김창숙이 1927년 상하이에서 일제에 체포됐다.
- 1928신간회 전국 확장과 노선 갈등운동1928년 신간회는 전국 140여 개 지회, 회원 2만 명을 넘는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 1928신채호 — 동방연맹 활동과 체포 직전인물1928년 신채호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의 일원으로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 외국환 채권 사업에 관여했다.
- 1928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 마지막 당대회정치1928년 2월 조선공산당이 당대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이 책임비서 김세연·김준연 등 핵심 간부 32명을 체포했다.
- 1928조명하 — 타이중 의거황해도 출신의 23세 청년 조명하는 일본에서 노동하며 "항일을 위해선 일제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어를 익히고 정세를 살폈다.
- 1928박용만 — 베이징에서 피살인물안창호·이승만과 함께 미주 한인사회를 이끈 3대 지도자 중 한 명인 박용만은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소년병학교(1909)와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191…
- 1928코민테른 12월테제정치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조선 문제에 관한 결의」, 이른바 12월테제를 채택했다.
- 1929당재건운동의 분파적 출발정치코민테른 12월테제의 지시에 따라, 무너진 조선공산당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1929년부터 각 분파별로 따로 시작됐다.
- 1929홍명희 — 신간회의 사상가인물신간회 발기인이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의 대표 논객이던 홍명희는 1929년 민중대회 사건으로 체포됐다.
- 1929신간회 복대표대회 — 사회주의자의 약진정치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가 열려 허헌이 집행위원장에 올랐다.
- 1929세계 대공황 발발정책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이 붕괴하며 세계 대공황이 시작됐다.
- 1929나주역 사건 — 광주학생운동의 불씨운동1929년 10월 30일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고보 학생 박기옥·이금자·이광춘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 1929광주학생항일운동운동나주역 사건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채,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 학생들이 일왕 생일 기념식 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가두로 나섰다.
- 1929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운동광주학생운동을 전 민족적 항쟁으로 키우려, 신간회 본부는 1929년 12월 13일 경성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열어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할 계획을 세웠다.
1930년대
- 1930허정숙 — 옌안으로의 길인물근우회 창립의 주역이자 광주학생운동 후속 시위를 배후에서 이끈 혐의로 허정숙은 1930년 거듭 투옥되는 탄압을 받았다.
- 1930광주학생운동의 여진 — 백지동맹과 3차 시위운동1929년 11월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의 불길은 새해에도 꺼지지 않았다.
- 1930원산총파업운동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원산에서 노동자 2,200여 명이 참여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쟁의가 벌어졌다.
- 1930김좌진 암살인물청산리 대첩의 영웅이자 신민부·한족총연합회를 이끌며 만주 독립운동을 지탱하던 김좌진이 1930년 1월 24일 자신이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피살됐다.
- 1930신간회 해소론의 부상정치민중대회 사건으로 민족주의 계열 지도부가 검거되자, 남은 지도부는 자치운동과 가까운 온건·합법 노선으로 기울었다.
- 1930강주룡 — 평원고무공장 파업과 을밀대 고공농성인물1930년 8월 평양고무공업조합이 노동자 임금을 17% 일방 삭감하겠다고 통고하자, 평원고무공장을 비롯한 11개 공장 1,800여 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에 들…
- 1931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창립정치1931년 3월 1일 상하이에서 안창호·조소앙 등이 한국독립당을 창립했다.
- 1931신간회 해체정치1931년 5월 15일 신간회 전국대회가 해체를 결의했다.
- 1931만보산 사건1931년 7월 1일 만주 완바오산에서 수로 개간을 둘러싸고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했다.
- 1931평양 화교 학살만보산 오보가 퍼진 1931년 7월 4일, 평양에서 조선인 군중이 화교 거주지와 상점을 습격해 100명 넘는 중국인을 살해했다.
- 1931브나로드 운동 — 동아일보의 문맹퇴치운동운동"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어에서 딴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가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계몽대로 조직해 농촌 곳곳에 보내 한글을 가르치고 근검절약·미신타파…
- 1931만주사변 — 일본의 만주 침략정책관동군 작전참모 이시와라 간지가 입안하고 주도한 류탸오후 사건을 구실로, 일본 관동군이 만주 전역을 군사 점령했다.
- 1931지청천 — 한중연합의 길인물신흥무관학교 교성대를 이끌고 청산리 대첩에 참전했던 지청천은, 1930년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의 총사령이 됐다.
- 1931류탸오후 사건 — 만주사변의 발화점1931년 9월 18일 밤, 일본 관동군이 펑톈 교외 류탸오후에서 남만주철도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몰았다.
- 1931한인애국단 결성정치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줄곧 침체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으로 독립운동의 활로가 더욱 좁아지자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다.
- 1932김구 — 거사 이후의 임시정부인물이봉창·윤봉길의 의거가 성공하자 일제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김구를 추적했다.
- 1932제주 해녀 항일운동운동1920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만들어졌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제주도사가 조합장을 겸임하는 어용조합으로 변질시켰고, 우뭇가사리·전복 등 해산물 가격을…
- 1932이봉창 — 도쿄 의거오사카에서 막노동하며 무명의 세월을 보낸 이봉창은 1931년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 됐다.
- 1932서란현 전투전쟁1932년 1월 29일 밤 한국독립군이 중국 의용군 길림자위군 제9사 부대와 처음으로 연합해 서란현성을 공격해 승리했다.
- 1932영릉가 전투전쟁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군이 만주 전역을 장악하자,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은 중국의용군(이춘윤·왕동헌 등)과 한중연합군을 편성했다.
- 1932만주국 수립정책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1932년 3월 1일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집정으로 앉혀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 1932윤봉길 — 훙커우공원 의거예산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다
- 1932쌍성보 전투전쟁1932년 9월 19~20일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 약 500명과 중국 길림자위군 2만~3만 명이 연합해 일본군·만주국군이 지키던 요충지 쌍성보를 공격했다.
- 1933남자현 —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 독립군의 어머니인물의병으로 순국한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간직하던 남자현은 마흔일곱에 3·1운동을 보고 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서 싸우는 독립군을 돌보며 "독립군의 어머니"로…
- 1933흥경성 전투전쟁영릉가 전투(1932) 승리 이후에도 양세봉의 조선혁명군과 중국의용군 연합은 항전을 이어갔다.
- 1933대전자령 전투전쟁1933년 6월 30일 한국독립군 약 2,500명과 중국 길림구국군 2,000여 명이 대전자령 계곡에 사흘간 매복했다.
- 1933동녕현성 전투 — 한중연합의 마지막 불꽃전쟁1933년 9월 6일 밤 한국독립군과 중국 의용군 연합부대가 동녕현성을 포위해 거의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 1933지청천 — 만주를 떠나 관내로인물대전자령에서 3대 대첩의 영광을 안았던 지청천은, 같은 해 가을 동녕현성의 패배와 한중연합의 균열을 뒤로하고 만주를 떠났다.
- 1933한국독립군 해체와 임시정부 합류정치동녕현성 전투의 전리품 분배를 둘러싸고 한국독립군과 중국 의용군 사이의 불화가 깊어지자, 김구는 만주 독립군을 임시정부 산하로 끌어들여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다.
- 1934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개설정치윤봉길 의거로 장제스의 신뢰를 얻은 김구는 1933년 5월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 설치를 합의했다.
- 1934농촌진흥운동과 식민 동화의 심화정책대공황으로 농촌이 피폐해지자 일제는 1932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펼쳤다.
- 1934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모색정치1932년 11월 의열단·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중국 관내 독립운동단체와 미주 동포단체들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다.
- 1934지청천 — 낙양군관학교 총교도관인물만주를 떠나 관내로 이동한 지청천은 1934년 3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총교도관으로 부임했다.
- 1934진단학회 창립 — 실증사학의 결집문화이병도·손진태·이윤재 등 국내외에서 근대 역사학을 공부한 학자들은 일본 관학자들의 식민사관에 맞서면서도,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의 논리적 서술 방식과는 다른…
- 1934양세봉 — 남만주 최후의 사령관, 밀정의 총탄에 지다인물만주사변 이후 독립군이 좌우로 갈라져 만주를 떠날 때, 남만주에 남아 일제와 싸운 무장 세력은 양세봉의 조선혁명군뿐이었다.
- 1935신사참배 강요의 시작정책1935년부터 조선총독부는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제하기 시작했다.
- 1935주기철 — 신앙으로 맞선 저항인물평양 산정현교회 목사 주기철은 1935년 신사참배 강요가 시작되자 이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단호히 거부했다.
- 1935김원봉 — 민족혁명당 총서기인물1935년 김원봉은 민족혁명당 총서기에 올랐다.
- 1935민족혁명당 결성정치1935년 6월 29일부터 7월 4일까지 난징에서 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5개 단체가 통합대회를 열어 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 1935한국독립당 재건과 한국국민당 창립 — 갈라진 두 길정치민족혁명당 통합 시도가 임시정부 해산론으로 흐르자, 조소앙은 항저우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해 탈당했고, 신한독립당 계열도 뒤따라 떠났다.
- 1936김일성 — 만주 항일연군의 청년 지휘관인물1936년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산하 부대를 이끄는 20대 청년 지휘관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 1936동북항일연군 결성전쟁1935년 코민테른 7차대회가 반제국주의 인민통일전선 노선을 채택하자, 중국공산당은 만주의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했다.
- 1936조국광복회 결성정치1936년 5월 동북항일연군 한인 간부들이 만주 무송현에서 조국광복회를 결성했다.
- 1936관동군 방역부 발족 — 731부대의 출발점단체군의관 이시이 시로는 1931년 도쿄 육군군의학교에 방역연구실을 세워 세균전 연구를 시작했고, 1932년 하얼빈 인근 베이인허에 첫 실험시설을 운영했다.
- 1936손기정 —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운동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한 손기정이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다.
- 1936일장기 말소 사건운동손기정의 우승 보름 뒤인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 체육기자 이길용이 이상범 화백과 함께 시상대 사진에서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내보냈다.
- 1936조선혁명군의 해체와 동북항일연군 합류전쟁1932년 양세봉이 이끌고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싸우던 조선혁명군은, 1934년 양세봉이 일제의 밀정에게 살해된 뒤 급격히 쇠퇴했다.
- 1937백백교 사건 — 수백 명을 암매장한 사교 집단의 실체 발각정치백백교(白白敎)는 동학 계통 백도교에서 갈라져 나온 신흥 종교로, 교주 전용해가 1920~30년대 경기 가평 일대에서 교세를 넓혔다.
- 1937알뜨르 비행장 — 제주 군사화의 시작정책대대로 농사를 짓던 알뜨르 들판은 1920년대 말 일본 해군이 모슬포 주민들을 동원해 비행장으로 바꿔놓으면서 사라졌다.
- 1937황국신민화 정책의 본격화정책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본격화했다.
- 1937보천보 전투전쟁1937년 6월 4일 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산하 김일성·최현 부대 약 100~150명이 압록강을 넘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의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
- 1937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정치중일전쟁이 터지자 중국 관내 우익 독립운동 진영도 단결을 모색했다.
- 1937노구교 사건 — 중일전쟁 발발1937년 7월 7일 밤, 베이핑 교외 노구교 부근에서 야간훈련 중인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잠시 행방불명되는 사소한 사건이 벌어졌다.
- 1937일본군 위안부 동원 본격화정책일본군은 1932년 만주사변 이후 상하이 등 점령지에 초기적인 형태의 위안소를 두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위안부 동원 체계는 중일전쟁 발발(1937) 이후 갖춰…
- 1937애국금차회 조직 — 금비녀를 뽑아 전쟁에 바치다정치중일전쟁 발발 한 달여 뒤, 총독부 중앙정보위원회의 사주로 조직된 여성 친일단체.
- 1937연해주 한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이주1937년 8월 21일 소련 인민위원회·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일본 스파이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연해주 일대 한인 전원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결정했다.
- 1937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정치1937년 4월 지청천·조소앙이 탈당하며 김원봉 중심 체제로 재편된 민족혁명당은, 그해 12월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과 함께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 1938박차정 — 근우회에서 조선의용대까지, 총을 든 페미니스트인물동래의 소녀 박차정은 근우회 중앙에서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이 하나의 싸움임을 배웠고, 광주학생운동 연대 시위를 조직하다
- 1938최승희 — 세계가 환호한 조선의 춤인물최승희는 일본 현대무용의 문을 두드려 기예를 익힌 뒤, 거꾸로 조선의 전통춤을 현대무용의 언어로 재창조해 보살춤·초립동 같은 작품으로 파리와 뉴욕 무대를 사로…
- 1938국가총동원법 시행정책1938년 4월 일본에서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이 5월 조선에도 그대로 시행됐다.
- 1938남목청 사건 — 김구 피격1938년 5월 7일 창사 남목청에서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통합을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 1938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결성 — 동원이 일상으로 들어오다정책1938년 6월 22일 경성 부민관에서 발기인 총회가 열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결성됐다.
- 1938간도특설대 창설단체1938년 9월 만주국 간도성장 이범익의 건의로 간도특설대 창설이 결정돼, 이듬해 3월 정식 발족했다.
- 1938조선의용대 창설전쟁1938년 10월 10일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조직으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됐다.
- 1938대동일진회 창설 — 한 세대를 건너 세습된 친일정치한말 일진회장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가 "비상시국에 종교단체는 불필요하다"며, 이용구가 세운 시천교를 통째로 정치단체로 개편해 창설했다.
- 1939731부대 핑팡 시설 완공과 생체실험1939년 핑팡에 대규모 시설이 완공되며 731부대(정식명칭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가 본격적으로 가동에 들어갔다.
- 1939김구 — 남목청의 총탄에서 살아나다인물남목청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은 김구는 생사를 넘나든 끝에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 1939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시작정책에도시대부터 금을 캐던 니가타 앞바다
- 1939간도특설대의 항일연군·민간인 살해간도특설대는 1939년부터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토벌 작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 1939사할린 조선인 강제동원 시작정책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승리로 북위 50도 이남 사할린을 할양받은 뒤 탄광업을 키워왔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중일전쟁으로 석탄 수요가 급증하자 노동력…
- 19397당 통일회의 — 또 한 번의 좌절정치중국 국민당 정부가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강하게 요구하자, 1939년 8월 치장에서 우익 광복진선과 좌익 민족전선연맹 7개 정당이 모여 통일회의를 열었다.
- 1939국민징용령 시행정책1938년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일제는 1939년 7월 7일 국민징용령을 제정하고 10월 1일부터 조선에도 시행했다.
- 1939창씨개명령 공포정책1939년 11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체제의 조선총독부가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조선인에게 일본식 "씨(氏)"를 새로 만들도록 의무화하는 창씨개명령을 공포했다.
- 1939한국청년전지공작대 결성정치1939년 11월 나월환을 중심으로 충칭에서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곧 시안으로 이동해 중국군과 연합하여 한국청년훈련반을 설치했다.
- 1939조선문인협회 결성 — 붓의 동원정치1939년 10월 29일 경성 부민관에 문인 250여 명이 모여 결성한 총독부 어용 문인단체.
1940년대
- 1940한국독립당 통합 — 마침내 하나로정치1939년 7당 통일회의가 좌절된 지 9개월 만인 1940년 5월 9일,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3당이 마침내 통합…
- 1940창씨개명 시행과 동아·조선일보 폐간정책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이 본격 시행됐다.
- 1940한국광복군 창설전쟁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열렸다.
- 1940국민총력조선연맹 발족 — 총독이 총재가 된 동원 기구정치일본 본토의 대정익찬회 체제 수립에 대응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관제 동원 기구.
- 1941조선의용대 화북지대 결성전쟁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주력 대원의 80%가 1941년 봄 비밀리에 황하를 건너 중국공산당 팔로군의 근거지 타이항산으로 이동했다.
- 1941조선임전보국단 출범 — 민간 전쟁협력의 총결집정치태평양전쟁 개전 직전인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민간 전쟁협력 단체들을 통합해 출범한 전시 최대의 민간 친일단체.
- 1941대한민국 건국강령 — 광복 뒤 세울 나라의 설계도정책1941년 11월,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 뒤에 세울 나라의 설계도를 발표했다.
- 1941진주만 공격 — 태평양전쟁 발발정책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미국 태평양 함대 기지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 1941임시정부 대일선전포고정치진주만 공격 사흘 뒤인 1941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 1941호가장 전투전쟁1941년 12월 12일 하북성 호가장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벌이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 1942남양군도 조선인 강제동원정책일본이 위임통치하던 태평양의 섬들을 남양군도라 불렀다.
- 1942조선의용군 — 화북지대의 재편전쟁충칭의 의용대 본부가 광복군에 편입되자, 화북에 남아 있던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의용대 화북지대는 1942년 7월 각각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됐다.
- 1942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과 김원봉의 임정 합류정치화북으로 떠난 의용대 주력과 갈라져 충칭에 남았던 조선의용대 본부 병력이 1942년 7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다.
- 1942조선어학회 사건정책1942년 함흥 여학생이 기차에서 조선어로 대화했다는 이유로 취조받은 사소한 일이, 조선어사전 편찬원 정태진의 체포로 번졌다.
- 1943전형필 — 전 재산으로 훈민정음을 지킨 사람인물조선 최고 부잣집의 상속자 전형필은 스승 오세창의 가르침에 따라 물려받은 재산을 문화재 수호에 바치기로 하고,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서화와 도자를 기와집 수십…
- 1943군함도(하시마) 탄광 강제징용정책나가사키 앞바다의 작은 섬 하시마는 미쓰비시가 해저 석탄을 캐기 위해 콘크리트로 둘러싼 탓에 군함을 닮았다
- 1943유바리 탄광 강제징용정책홋카이도 중심부의 유바리는 일제강점기 일본 최대의 석탄 도시였다.
- 1943백선엽 — 간도특설대 배속인물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은 1941년 12월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 9기 군관후보생으로 입교해 1942년 소위로 임관했다.
- 1943인면전구공작대 파견전쟁1943년 5월 김원봉과 영국군 대표가 협정을 맺어, 8월 한지성을 대장으로 한 광복군 9명이 인도로 파견됐다.
- 1943김창룡 — 관동군 헌병대 분견 근무인물함경남도 영흥 출신 김창룡은 만주국 철도회사 말단 직원으로 일하다가 1940년 관동군 헌병보조원이 됐다.
- 1943학병제 시행 — 학생들의 강제 징집정책1943년 10월 일제는 전문대학 이상 재학 중인 조선인 청년을 대상으로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했다.
- 1943카이로 선언 — 한국 독립의 첫 국제 약속정치1943년 11월 27일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중화민국 장제스가 카이로에서 회담을 마치고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 1944이육사 —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인물1920년대 후반 의열단에 가입해 베이징을 왕래하며 군자금 전달과 국내 정세 보고 활동을 하던 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1943년 가을 모친의 소상에 참…
- 1944장준하·김준엽 — 학병 탈출과 6천 리 장정인물1944년 1월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 쉬저우에 배치된 김준엽은 3월, 장준하는 7월에 각각 부대를 탈출했다.
- 1944임시정부 헌법 개정 — 주석·부주석제정치1944년 4월 임시의정원이 헌법을 다시 고쳐,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 체제로 개편했다.
- 1944조선건국동맹 결성정치1944년 8월 여운형이 경성 운니동에서 비밀리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 1944여자정신근로령 공포 — 여자근로정신대 동원정책전쟁으로 남성 노동력이 바닥나자 일본은 여성을 군수공장 노동력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 1945윤동주 —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인물도쿄 릿쿄대학을 거쳐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윤동주는 1943년 7월 귀향을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 1945결7호작전 — 제주의 본토결전 준비정책1945년 2월 이오지마가 함락되자 일본 대본영은 미군이 다음에는 제주도나 홋카이도에 상륙할 것으로 판단해, 3월 12일 결호작전 중 제주도를 대상으로 한 "…
- 1945731부대 해체와 미국의 면책 거래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해오자 731부대는 핑팡 시설을 스스로 폭파하고 남아 있던 생존자를 살해해 증거를 없앤 뒤 철수했다.
- 1945사할린 한인 — 돌아오지 못한 4만 명이주1939년부터 사할린 탄광·토목현장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해방 당시 약 4만 3,000명이 잔류해 있었다.
- 1945패전 직전 조선은행권 남발 — 마지막 약탈정책패전이 임박하자 조선총독부와 일본은 마지막으로 조선은행권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 1945해외 한인의 귀환과 잔류이주1945년 8월 해방 당시 해외에 거주하던 한인은 약 400만 명에 달했다
- 1945건국준비위원회 결성정치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여운형은 그날 밤, 1944년부터 비밀리에 운영해온 조선건국동맹을 곧바로 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했다.
- 1945일본 무조건 항복 — 8·15 광복정책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이 만주로 진격하자 일본은 더 버틸 수 없었다.
- 1945해방 직전 제주 — 끝내 터지지 못한 전장정치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이 전해질 때 제주는 결7호작전을 위해 들어온 일본군 7~8만 명으로 뒤덮인 군사요새 상태였다.
- 1945광복군 여의도 진입전쟁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새벽, 이범석·장준하·김준엽·노능서 등 광복군 4명이 미군 OSS 18명과 함께 C-47 수송기로 여의…
- 1945독수리작전 — 광복군 국내정진군 편성전쟁1945년 4월 김구와 미국 OSS가 합작해, 광복군이 국내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고 연합군 진주를 지원하는 "독수리작전"에 합의했다.
- 1945우키시마호 침몰 — 귀국길의 비극이주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22일,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홋카이도·아오모리 일대로 강제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 약 7,000명(공식 집계…
- 194538선 분할 — 또 다른 경계의 시작정책일본 항복 직후인 1945년 9월 2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반명령 제1호를 발표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그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군에, 이남은 미군에 항복…
- 1945김구 — 개인 자격으로 돌아온 주석인물1945년 11월 23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군정의 결정에 따라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환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