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의 처형 — 재판 없이 목이 잘린 남접의 장수
김개남(1853~1895)은 태인 대접주로, 백산 봉기에서 손화중과 함께 총관령을 맡은 남접의 실질적 2인자였다. 전봉준이 전주화약으로 관군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을 때 그는 반대편에 섰다. 화약을 믿지 않았고, 폐정개혁이 아니라 낡은 질서 자체를 갈아엎어야 한다고 보았다. 전주화약 이후 남원을 근거지로 삼아 전라좌도를 통할하며 한때 전봉준을 능가하는 세력을 떨쳤고, 양반과 관리들을 서슴없이 처형해 \\"강경파\\"로 불렸다. 그 과격함은 양날의 칼이었다 — 금산 등 거쳐 간 고을마다 보복이 지나쳐 인심을 잃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차 봉기 때는 전봉준과 따로 움직여 청주성을 쳤으나 기습을 당해 무너졌고, 우금치 패배 뒤 태인으로 돌아갔다가 옛 친구의 밀고로 체포됐다. 전주로 압송된 그는 한성으로 보내지지도, 재판을 받지도 못했다. 1895년 1월 8일 전주 장대에서 참수됐다 — 전라감사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면 민심이 동요할까 두려워 현장에서 처형했다고 전한다. 잘린 머리는 서울로 보내져 효수됐다. 전봉준이 심문 기록과 사진을 남긴 것과 달리 김개남에게는 재판 기록조차 없다. 같은 봉기의 지도자였으나 한 사람은 재판을 받고 한 사람은 받지 못한 이 차이가, 이후 두 사람이 기억되는 방식의 차이로도 이어졌다.
관련 인물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개남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김개남
- 우리역사넷 동학농민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