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 베이징에서 피살

1928년 10월 17일 · 베이징 (대륙농간공사)

안창호·이승만과 함께 미주 한인사회를 이끈 3대 지도자 중 한 명인 박용만은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소년병학교(1909)와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1914)을 세운 무장투쟁론의 선구자였다. 3·1운동 이후 베이징으로 옮겨 독립군 기지 개척을 모색했고, 1926년 귀국 모금으로 베이징 근교에 대륙농간공사를 세워 농장을 경영했다. 1928년 10월 17일, 농장을 찾아온 두 청년이 군자금 1천 원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를 총으로 쏘아 절명시켰다. 가해자 이해명(이구연)은 의열단 또는 독립단 계열로 알려졌으나, 박용만이 정말 일제 밀정이었는지 — 혹은 단순한 자금 갈취 다툼이었는지는 학계에서도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은 논쟁이다. 중국 법정은 "의분살인"으로 가볍게 처벌했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오늘날까지 해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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