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 의열단을 만든 사람, 두 번 지워진 이름
밀양의 소년이 의열단을 만들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게 하고, 광복군 부사령관을 거쳐 북으로 갔다가 역사에서 지워졌다
타임라인 (30개 지점)
- 출생 — 밀양의 소년 (1898 · 경상남도 밀양)
김원봉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1898년 경상남도 밀양의 비교적 넉넉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홍범도의 가난, 김구의 신분 차별과는 결이 다른 출발이었다. 소년 시절부터 총명하고 결단력이 강해 동네에서도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이웃 마을에는 훗날 그와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하게 될 윤세주가 살았고, 최수봉과도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 밀양은 훗날 의열단 초기 단원의 절반을 배출한 고장이 된다.
- 중국 유학길 — 톈진을 거쳐 (1916 · 톈진 / 난징)
난징대학 안의 옛 금릉대학 건물 · 사진 Vmenkov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더 넓은 세계에서 배우겠다는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가 톈진의 독일어전문학교, 이어 난징의 금릉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무장 투쟁을 결심하기 전, 그는 먼저 세계를 보는 눈을 넓히려 한 유학생이었다.
- 신흥무관학교 — 폭탄 제조법을 배우다 (1919 · 서간도 류허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독립군 간부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정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 제조법에 특히 몰두했다 — 개별 폭탄 하나가 정규군 못지않은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때 확신하게 됐다. 3·1운동이 비폭력으로 좌절되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다른 방식의 투쟁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 의열단 결성 — 지린에서 폭탄과 결의 (1919 11월 9일 · 지린(길림))
의열단 단원들 · 사진 Hyungsuk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1919년 11월 9일, 지린에서 김원봉을 포함한 13명의 청년이 의열단을 결성했다. 절반이 밀양 출신이었다.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공약 10조 아래,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식민통치 핵심기관 파괴와 총독·고위관료 암살을 목표로 삼았다. 3·1운동의 비폭력 만세시위가 유혈 진압으로 끝난 지 불과 8개월 만이었다.
- 의열단, 상하이로 — 폭탄과 자금의 통로를 열다 (1920 · 상하이)
상하이 와이탄, 1930년대 무렵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거사에 필요한 폭탄과 무기, 자금을 구하기 위해 상하이에 지휘 거점을 마련했다. 임시정부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조직으로, 스물두 살의 김원봉이 단장으로서 모든 거사를 직접 기획하고 승인했다. 이후 몇 년간 그의 이름은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이름이 된다.
- 박재혁 —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1920 9월 14일 · 부산)
김원봉의 지시를 받은 박재혁이 중국 고서상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장에게 접근,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의 첫 성공한 거사였다. 그해 3월과 5월, 국내에 폭탄을 대량 반입하려던 1차 계획이 발각돼 실패한 직후였기에, 이 한 번의 성공이 조직 전체의 사기를 되살렸다.
- 최수봉 — 고향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1920 12월 27일 · 밀양)
의사 최수봉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박재혁의 거사 소식에 고무된 최수봉이 김원봉의 어릴 적 동무였다는 인연으로 뒤이어 나섰다. 밀양경찰서 사무실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과 미약한 폭발로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다. 최수봉은 현장에서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체포됐고, 이듬해 사형이 집행됐다. 의열단장이 자신의 고향, 자신의 어린 시절 동무를 거사로 잃은 순간이었다.
- 김익상 — 조선총독부 한복판에 폭탄을 (1921 9월 12일 · 경성 (조선총독부))
의사 김익상 · 사진 조선일보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전기 수리공으로 위장한 김익상이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청사에 잠입해 폭탄을 던졌다. 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은 이루지 못했지만, 백주 대낮에 총독부 내부까지 침투했다는 사실만으로 일제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의열단이 국내 최고 권력기관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 의열단 본부, 베이징으로 (1922 · 베이징)
단재 신채호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연이은 거사로 상하이에서의 노출이 위험해지자 의열단 본부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신채호·유자명 등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의열단의 이념적 기반을 다졌다. 폭탄을 만드는 실무 조직에서, 사상을 갖춘 혁명 조직으로 성장하는 시기였다.
- 황포탄 의거 — 다나카 저격 시도 (1922 3월 28일 · 상하이 황포탄)
다나카 기이치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상하이에 도착하자 김익상·오성륜·이종암 세 단원이 황포탄 부두에서 저격을 시도했다. 총알이 빗나가 다나카는 살아남았고, 현장의 서양인 여성이 총에 맞아 숨졌다. 김익상과 오성륜은 체포됐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실패한 거사였지만, 의열단의 활동 범위가 국제 사회의 이목을 끌 만큼 대담해졌음을 보여줬다.
- 조선혁명선언 — 의열단의 이념을 세우다 (1923 1월 · 상하이 / 베이징)
조선혁명선언, 1923년 · 사진 Shin Chae-ho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김원봉의 요청으로 신채호가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됐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라는 구절로 대표되는 이 선언문은 폭력 투쟁을 단순한 테러가 아닌 민중 혁명의 일환으로 정당화하며, 의열단 활동의 사상적 뼈대가 됐다. 폭탄을 던지는 손에 비로소 논리가 쥐어진 순간이었다.
- 김상옥 —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그리고 총격전 (1923 1월 12일 · 경성 종로경찰서)
의사 김상옥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은신하다 포위망이 좁혀오자 일본 경찰 수백 명을 상대로 총격전을 벌였다. 여러 명을 사살하며 저항하다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의열단 거사 중 가장 극적인 총격전으로 꼽히며, 국내외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 노선 전환의 고민 — 폭탄만으로는 (1924 · 베이징)
김원봉, 1930년대 초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거듭된 개별 의거에도 식민통치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 현실 앞에서 김원봉은 고민에 빠졌다. 단원 한 명 한 명의 목숨을 건 거사로는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없다는 자각이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개별 테러를 넘어선 조직적 무장 투쟁, 나아가 사회주의적 이념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사고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 김지섭 — 도쿄 왕궁 이중교에 폭탄을 (1924 1월 5일 · 도쿄 궁성 이중교)
의사 김지섭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김지섭이 일본 왕궁 정문인 이중교에 폭탄 세 개를 던졌다. 모두 불발됐지만 일왕의 거처 코앞까지 폭탄이 날아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일본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의열단의 활동 무대가 식민지 조선을 넘어 제국의 심장부, 도쿄 한복판까지 넓어졌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 나석주 — 동양척식회사, 마지막 개별 거사 (1926 12월 28일 · 경성 동양척식주식회사·식산은행)
의사 나석주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조선 경제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나석주가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금난과 조직 재정비 필요성으로 개별 의거 노선이 사실상 한계에 다다른 시점의 거사였다. 이후 의열단은 방향을 크게 틀게 된다.
- 노선 전환 — 개별투쟁에서 조직투쟁으로 (1927 · 우한 /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정문, 1920년대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해 정규 군사·정치 교육을 받으며 개별 폭탄 투쟁의 한계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제 의열단은 한 명의 결사대원이 아니라, 훈련된 군대와 정치 조직을 통해 싸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7년간 이어진 폭탄 투쟁의 시대가 저물고, 군사 조직 건설의 시대가 열렸다.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 나만의 사관학교 (1932 · 난징)
석정 윤세주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난징 인근에 독자적인 사관학교를 세우고 청년 혁명 간부를 양성했다.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 계열과는 별도로, 김원봉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갖춘 군사 조직을 키우려는 시도였다. 의열단은 이제 폭탄을 만드는 비밀결사가 아니라 하나의 군사·정치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 이육사, 간부학교에 입교하다 (1932 10월 · 난징)
시인 이육사 · 사진 http://www.264.or.kr · CC BY 3.0 · 위키미디어 공용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가 김원봉이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대구 출신으로 이미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그는,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직접 군사 훈련을 받기로 결심했다. "이육사"라는 필명 자체가 대구형무소 수감 시절 수인번호 264(二六四)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 감옥이 곧 그의 이름이 된 셈이다. 이후 그는 국내로 잠입해 정보 수집과 자금 조달 등 의열단·민족혁명당 계열의 지하활동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청포도", "광야" 같은 시를 남겼다.
-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 좌우 통합을 모색하다 (1934 1월 · 상하이 / 난징)
김규식, 1930년 무렵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통일전선 논의에 적극 나섰다. 김원봉은 이념보다 항일이라는 대의 아래 좌우가 함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고수를 우선하는 김구 계열과는 처음부터 온도차가 있었다.
- 민족혁명당 결성 — 통합의 정점, 그러나 (1935 7월 5일 · 난징)
김원봉, 1930년대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의열단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총서기를 맡았다. 좌우를 아우른 최대 규모의 통합 정당이었지만, 김구는 임시정부 해체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참여하지 않았다. 김원봉의 통합 구상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 가장 큰 정당을 만들었지만, 가장 상징적인 인물을 잃었다.
-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1937 12월 · 한커우(우한))
조선의용대 휘장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중일전쟁이 전면화되자 좌파 계열 독립운동 단체를 다시 규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김구가 이끄는 우파 연합과 나란히, 독립운동은 사실상 두 개의 큰 축으로 재편됐다. 통합을 꿈꿨던 그가 결국 분열의 한 축을 이끌게 된 역설이었다.
- 조선의용대 창설 — 마침내 자신의 군대를 (1938 10월 10일 · 한커우(우한))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1938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폭탄 하나로 시작한 그의 투쟁이 마침내 정규 군사 조직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을 떠나기 시작한다 — 많은 젊은 대원들이 더 적극적인 항일 전선을 찾아 화북의 공산당 근거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 떠나가는 대원들 (1941 7월 7일 · 타이항산(산시성))
타이항산 · 사진 Vitsuha · 퍼블릭 도메인(CC0) · 위키미디어 공용조선의용대 대원 상당수가 김원봉의 지휘를 벗어나 공산당 팔로군 근거지인 타이항산으로 옮겨가 독자적인 화북지대를 결성했다. 자신이 만든 부대의 주력을 잃은 셈이었다. 그가 평생 만들어 온 조직들이 매번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갈라지는 패턴이 이번에도 반복됐다.
- 광복군 편입 — 20년 만에 임시정부로 (1942 7월 · 충칭)
주력을 잃은 조선의용대 잔여 세력을 이끌고 마침내 한국광복군에 편입돼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을 맡았다. 1919년 의열단을 만든 이래 20여 년간 독자 노선을 걸었던 그가, 한때 거리를 두었던 김구의 정부 아래 들어간 순간이었다. 좌우가 마침내 한 지붕 아래 모였지만, 그 통합은 광복을 불과 3년 앞둔 뒤늦은 결합이었다.
- 이육사,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다 (1944 1월 16일 ·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
안동 이육사문학관 전시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김지호 (공공누리 제1유형)국내에서 무기 반입 등 지하활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된 이육사가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마흔. 그가 평생 체포된 횟수는 열일곱 차례에 이르렀다. 광복을 불과 1년 반 앞둔 죽음이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청포도」,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로 끝나는 「광야」 등은 그가 세상을 뜬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 광복 후 귀국 — 짧았던 환대 (1945 12월 · 서울)
임시정부 환국 환영 인파, 서울 1945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광복 후 귀국해 좌우합작 노선의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남한의 정치 지형이 우익 중심으로 굳어가며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1947년에는 친일 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돼 뺨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의열단장이었던 그가 광복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에게 모욕당한 사건은,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유산의 상징으로 남았다.
- 남북협상 — 38선을 넘어, 그리고 돌아오지 않다 (1948 4월 19일 · 평양)
남북연석회의에서 축사하는 김원봉, 1948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김구·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다. 다른 참석자들이 대부분 남으로 돌아온 것과 달리, 김원봉은 그대로 북에 남는 길을 택했다. 남한에서 겪은 친일 경찰의 모욕과 정치적 고립이 이 선택의 배경으로 꼽힌다. 의열단을 만든 사람이 결국 분단된 두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 북한 정권의 요직 — 그러나 감시받는 존재 (1948 · 평양)
평양, 1951년 · 사진 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북한 정권 수립 후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훈장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 김일성이 권력을 공고히 해가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비(非)공산계 인사들은 이용 가치가 다하면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처지였다.
- 숙청 — 역사에서 지워지다 (1958 · 평양)
1958년을 전후해 김일성이 연안파·남로당계 등 비주류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과정에서 김원봉도 모든 공직에서 밀려났다. 이후의 행적은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다는 설, 자결했다는 설, 처형됐다는 설이 엇갈릴 뿐 정확한 사망 일자와 경위는 오늘날까지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의열단을 만들어 조선총독부를 뒤흔들었던 사람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조용하고 불확실한 소멸이었다.
- 잊혀진 이름 — 두 번 지워지다 (2019 · 대한민국)
밀양독립운동기념관 기념탑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장정수 (공공누리 제1유형)김원봉은 대한민국에서 서훈을 받지 못했다 — 의열단을 만들고 광복군 부사령관까지 지낸 항일 무장투쟁의 핵심 인물이지만, 월북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다. 남에서는 월북자로, 북에서는 숙청된 이름 없는 존재로 — 그는 분단된 역사 양쪽에서 모두 지워졌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대중적 관심이 되살아날 때마다 그에 대한 서훈 논쟁도 함께 반복되지만,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