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 하나회에서 5·18까지
사조직 하나회를 발판으로 두 번의 쿠데타를 감행하고, 광주에서 자국민을 향해 총을 쏘라 명령한 사람 — 그리고 끝내 진정한 사죄 없이 세상을 떠난 90년
타임라인 (39개 지점)
- 출생 — 경남 합천의 가난한 농가 (1931 1월 18일 · 경남 합천)
전두환 대통령 공식 초상 · 사진 Korea.net / Korean Culture and Informati… · CC BY-SA 2.0 · 위키미디어 공용경남 합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대구로 이주해 성장했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육군사관학교 입교 — 정규 육사 11기 (1951 10월 · 경남 진해)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의 전두환과 동기들, 1951년 무렵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전쟁 중 4년제 정규 과정으로 개편된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했다. 이 기수는 이후 군 내 사조직 하나회의 핵심 인맥이 되며, 훗날 두 차례의 쿠데타를 함께 실행하는 동지 집단이 된다.
- 하나회 결성 — 군 내 사조직 (1963 · 서울)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영남 출신 장교들이 주축이 된 비밀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했다. 진급과 요직 인사에서 서로를 밀어주는 이 조직은 표면적으로는 친목 모임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을 사병화하는 권력 기반이었다. 16년 뒤 이 조직이 국가 권력 자체를 장악하는 도구가 될 줄은, 이때는 아무도 몰랐다.
- 국군보안사령관 취임 (1979 3월 5일 · 서울)
군 내 정보·수사 기관인 국군보안사령부의 사령관에 취임했다. 군내 동향을 감시하고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이 자리는, 반년 뒤 벌어질 사건에서 결정적인 발판이 된다.
- 10·26 다음 날 —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수사를 독점하다 (1979 10월 27일 · 서울)
보안사령관 시절의 김재규, 1968년 · 사진 中央通訊社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박정희 피살 다음 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사건 수사를 총지휘하게 됐다. 보안사령관과 합수부장을 겸하며 군과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그는, 이 권한을 이용해 빠르게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 12·12 군사반란 (1979 12월 12일 · 서울)
최규하 대통령 공식 초상 · 사진 코리아넷 / 해외문화홍보원 · CC BY-SA 2.0 · 위키미디어 공용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도 없이 체포하며 군권을 장악했다. 명목상은 10·26사건 수사 협조 문제였지만, 실질은 하나회 세력의 군권 찬탈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사후에야 체포를 재가할 수밖에 없었다.
- 정승화, 총장 공관에서 강제 연행되다 (1979 12월 12일 ·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1979년 · 사진 Chief of Staff of the Republic of Korea…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군의 최고 지휘관인 육군참모총장이 부하 장성들이 보낸 무장 병력에 의해 자택에서 총격전 끝에 강제 연행됐다. 상명하복이 생명인 군 조직의 위계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뒤집힌 사건이었다.
- 장태완, 반란 진압을 시도하다 좌절되다 (1979 12월 12일 · 서울(수도경비사령부))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은 반란 소식을 듣고 병력을 동원해 진압을 시도했으나, 이미 주요 부대들이 신군부에 포섭된 상태였다. 그는 끝내 진압에 실패하고 체포됐다. 그날 밤 정통 지휘 체계를 지키려던 마지막 저항이 무너졌다.
- 서울의 봄 — 짧았던 민주화의 기대 (1980 5월 14일 · 서울)
옛 서울역사(지금 문화역서울284)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안영관 (공공누리 제1유형)유신 붕괴 이후 학생과 시민들 사이에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며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 시기를 권력 장악을 위한 마지막 정지 작업 기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봄"이라 불렸던 이 계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 두 번째 쿠데타 (1980 5월 17일 · 서울)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사실상 무력화했다.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대거 예비검속했다. 12·12가 군권 장악이었다면, 5·17은 국가 권력 전체를 장악하는 두 번째 쿠데타였다.
- 5·18 — 공수부대 투입과 초기 진압 (1980 5월 18일 · 광주)
광주 5·18기념공원 조각 · 사진 이강철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전남대 앞 시위 진압을 시작으로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에 투입됐다. 계엄군은 시위와 무관한 학생과 시민에게까지 곤봉과 대검을 사용하는 과잉 진압을 자행했다. 이 잔혹한 초기 진압이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키워 항쟁을 도시 전체로 확산시켰다.
- 5·21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와 헬기사격 (1980 5월 21일 · 광주 전남도청 앞)
광주 금남로, 2015년 · 사진 Minseong Kim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전남도청 앞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이 집단 발포했다. 이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헬기에서까지 사격이 이뤄졌다는 증언과 탄흔 흔적이 훗날 조사에서 확인됐다. 자국 군대가 자국민을 향해 조직적으로 총을 쏜, 현대 한국사에서 가장 참혹한 순간 중 하나였다.
- 광주 봉쇄와 외곽 지역 학살 (1980 5월 22일 · 광주 외곽)
광주 5·18자유공원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이범수 (공공누리 제1유형)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일시 철수한 뒤 외곽을 완전히 봉쇄했다. 이 봉쇄선을 넘으려던 민간인 차량에 대한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가 희생됐다. 도시 전체가 고립된 채, 광주 시민들은 스스로 치안을 유지하며 항쟁을 이어갔다.
- 5·27 도청 진압작전 — 항쟁의 마지막 새벽 (1980 5월 27일 · 광주 전남도청)
광주 옛 전남도청, 2009년 ·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기여자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계엄군이 새벽에 전남도청을 재진입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시민군을 진압했다. 열흘간의 항쟁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정부는 오랫동안 이를 "폭도의 난동"으로 규정했지만, 훗날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공식 집계로도 2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고, 실제 희생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 (1980 5월 31일 · 서울)
광주 진압 나흘 뒤, 국정 전반을 장악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되고 상임위원장을 맡았다. 명목상 대통령 자문 기구였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국정을 총괄하는 기구였다. 총으로 도시를 진압한 지 나흘 만에 국가 권력 전체를 손에 쥔 것이다.
- 삼청교육대 — "사회 정화"라는 이름의 인권유린 (1980 8월 4일 · 전국 각지 훈련소)
국보위가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4만여 명을 영장 없이 검거해 군부대 내 삼청교육대에 수용했다. 폭력 조직원뿐 아니 정치적으로 밉보인 사람, 단순 시비에 연루된 일반 시민까지 무차별 연행됐다. 가혹한 군사 훈련과 구타로 사망자가 속출했고, 이후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 제11대 대통령 취임 —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 (1980 8월 27일 · 서울(장충체육관))
서울 장충체육관(장충아레나), 2019년 · 사진 처음하루 · CC BY 4.0 · 위키미디어 공용유신 체제의 유물인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장으로 예편한 지 며칠 만의 일이었다. 총으로 권력을 잡고, 형식적 선거 절차로 그 권력에 합법성의 외피를 씌운 순서는 박정희의 5·16과 정확히 같은 패턴이었다.
- 민주정의당 창당 — 제5공화국 출범 (1981 1월 15일 · 서울)
자신을 총재로 한 여당 민주정의당을 창당하고, 새 헌법 아래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제한했지만, 여전히 간접선거 방식을 유지해 정권 재창출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구조는 그대로 남겨뒀다.
- 제12대 대통령 정식 취임 (1981 3월 3일 · 서울)
새 헌법에 따른 선거인단 간접선거로 다시 대통령에 선출돼 정식 취임했다. 이로써 그의 통치는 "혁명 세력의 임시 집권"에서 "헌법상 정식 임기를 가진 대통령"으로 형식을 바꿨다.
- 국풍81 — 관제 문화축제 (1981 5월 28일 · 서울 여의도)
여의도공원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전형준 (공공누리 제1유형)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 관제 문화축제 "국풍81"을 개최했다. 정부가 전통문화 계승을 내세워 기획했지만, 실제로는 5·18의 기억과 정치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우민화 정책이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3S 정책"(스포츠·스크린·섹스를 통한 우민화)이라 불린 통치 기법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 언론통폐합 (1980 11월 14일 · 서울)
중앙방송(JBS, 뒤의 동양방송) TV 스튜디오, 1965~1966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신문·방송사를 강제로 통폐합하고 언론인 수백 명을 해직시켰다. 살아남은 언론사들에는 매일 보도 지침이 하달돼 무엇을 어떻게 보도할지까지 통제받았다.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언론 자체를 원천봉쇄한 조치였다.
- 서울올림픽 유치 — 바덴바덴의 반전 (1981 9월 30일 · 서독 바덴바덴)
바덴바덴 쿠르하우스 · 사진 Franzfoto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나고야를 제치고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됐다. 예상을 뒤엎은 결과로 평가받았다. 정권의 정통성 결여를 국제적 국가 행사로 상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분석과 별개로, 이 유치는 훗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됐다.
- 야간통행금지 해제 (1982 1월 5일 · 전국)
해방 이후 37년간 유지돼 온 야간통행금지를 전면 해제했다. 정치적 자유는 여전히 억압됐지만, 심야 시간 이동의 자유는 되찾은 조치로, 유화 정책의 상징적 사례로 꼽힌다.
-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사건 — 권력형 비리 (1982 5월 7일 · 서울)
대통령 처삼촌의 부인인 장영자와 그 남편 이철희가 사채 시장을 이용해 7천억 원대 어음사기를 벌인 사실이 드러났다. 권력 핵심부와의 유착 의혹이 짙게 제기됐다. 5공화국 초기부터 권력형 비리가 정권의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1983 10월 9일 · 미얀마 양곤)
양곤 아웅산 묘소(순국자 묘역) · 사진 Kantabon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미얀마 순방 중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 공작원이 설치한 폭탄이 터져 부총리를 비롯한 수행 각료 17명이 사망했다. 정작 그 자신은 도착이 지연돼 화를 면했다. 국가원수 암살을 노린 이 테러는 냉전기 남북 대치의 가장 극단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 학원자율화조치 (1983 12월 21일 · 전국)
제적 학생의 복학을 허용하고 대학 상주 경찰을 철수시키는 등 유화 조치를 발표했다. 정권 초기의 강경 일변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지만, 이는 오히려 이후 대학가 학생운동이 다시 조직화되고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다.
- 86아시안게임 — 올림픽 예행연습 (1986 9월 20일 · 서울)
서울아시안게임을 개최해 2년 뒤 열릴 서울올림픽의 예행연습으로 삼았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중국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하며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국내외에 각인시켰다. 정권은 이런 국제 행사들을 통치 정당성 확보의 무대로 적극 활용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 1월 14일 · 서울(남영동 대공분실))
옛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지금 민주화운동기념관), 2016년 · 사진 Jjw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허위 발표로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부검의와 언론의 끈질긴 추적 끝에 고문치사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이후 벌어질 6월항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
- 4·13 호헌조치 — 개헌 논의를 봉쇄하다 (1987 4월 13일 · 서울)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커지던 상황에서, 현행 헌법(간선제)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호헌 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국민들의 개헌 열망을 정면으로 거스른 이 선언은, 잠재해 있던 불만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낳았다.
- 이한열 최루탄 피격 (1987 6월 9일 · 서울 신촌(연세대 앞))
연세대 신촌캠퍼스 이한열 추모비 · 사진 Thinkinglex · CC BY 4.0 · 위키미디어 공용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동료 학생에게 부축된 채 피 흘리는 그의 사진이 전국에 퍼지며 시민들의 분노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는 한 달 뒤 숨을 거뒀다.
- 6월 민주항쟁 (1987 6월 10일 · 전국)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김지호 (공공누리 제1유형)박종철·이한열 사건에 대한 분노가 전국적인 반정부 항쟁으로 폭발했다. 학생만이 아니라 넥타이를 맨 회사원까지 거리로 나선 "넥타이 부대"가 이 항쟁의 상징이 됐다. 20일 가까이 이어진 전국적 시위는 정권으로 하여금 결국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 6·29 선언 —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다 (1987 6월 29일 · 서울)
후계자로 지명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을 발표하게 했다.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고 후계자의 입을 빌린 이 선언은, 정권 재창출을 위한 정교한 정치적 기획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그럼에도 국민의 힘으로 헌정 질서를 되돌린 성과로도 함께 기억된다.
- 퇴임 — 노태우 취임 (1988 2월 25일 · 서울)
7년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직선제 개헌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후계자 노태우가 당선돼 정권을 이어받았다. 군사쿠데타로 잡은 권력이었지만, 이임만큼은 헌법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
- 서울올림픽 개최 (1988 9월 17일 · 서울)
서울올림픽 개막식 성화 점화, 1988년 9월 17일 · 사진 Ken Hackman, U.S. Air Force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7년 전 그가 유치했던 서울올림픽이 마침내 열렸다. 냉전 시대 동서 진영이 함께 참가한 대회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끌어올린 성공적인 행사로 평가받는다. 다만 대회 준비 과정에서 노점상 강제철거와 부랑인 시설(형제복지원 등) 수용 등 도시 미화를 명분으로 한 약자 탄압도 함께 있었다.
- 5공비리 청문회 — 헌정사 최초의 청문회 (1988 11월 2일 · 서울(국회))
여의도 국회의사당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이범수 (공공누리 제1유형)퇴임 직후 국회에서 5공화국 시기 비리와 5·18 진상을 캐묻는 청문회가 열렸다. 헌정사 최초의 국회 청문회였다. 이 청문회를 통해 초선 의원 노무현이 명패를 집어던지며 강하게 추궁하는 장면으로 전국적 인지도를 얻어,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 백담사 유배 (1988 11월 23일 · 강원 인제 백담사)
인제 백담사 경내, 2018년 · 사진 Mereytan · 퍼블릭 도메인(CC0) · 위키미디어 공용비리 의혹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대국민 사과와 함께 재산 헌납을 발표하고, 부인과 함께 강원도 산골의 백담사로 은둔했다. 2년 가까운 이 "유배" 생활은 훗날 스스로 택한 정치적 제스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 5·18 특별법 — 반란수괴죄로 사형 선고 (1996 8월 26일 · 서울)
김영삼 정부가 제정한 5·18특별법에 따라 12·12 군사반란과 5·18 학살 책임으로 기소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같은 해 말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 화합"을 명분으로 특별사면했다. 법정에서는 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했고, 끝까지 5·18에 대한 직접적 사과나 발포 명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 하나회 해체 — 그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다 (1993 4월 13일 · 서울)
김영삼 대통령 공식 초상, 1993년 · 사진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 공공누리 제1유형 · 위키미디어 공용김영삼 정부가 전격적인 인사 조치로 하나회 핵심 인사들을 군에서 축출하며, 그가 30년 전 만들었던 사조직이 완전히 해체됐다. 두 번의 쿠데타를 가능케 했던 권력 기반이, 문민정부의 손에 의해 최종적으로 청산된 순간이었다.
- 사망 — 사죄 없이 (2021 11월 23일 · 서울 연희동 자택)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추모탑 · 사진 Jjw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혈액암 투병 끝에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90세. 끝내 5·18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나 발포 명령을 인정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국립묘지 안장은 5·18 관련 범죄 전력으로 인해 거부됐다. 하나회 결성부터 두 차례의 쿠데타, 광주에서의 유혈 진압, 그리고 끝내 이뤄지지 않은 사죄까지 — 90년의 생애가 그렇게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