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 공수부대 투입과 초기 진압 (5.18~20)
비상계엄 전국 확대 다음 날인 1980년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에서 등교를 막던 7공수여단과 학생들이 충돌했다. 공수부대는 시위 학생만이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까지 가리지 않고 진압봉과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거나 옷을 벗기는 등 과도한 폭력을 행사했다. 19일에는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합류해 참가 인원이 최소 3천 명을 넘었고, 보안사 통제를 받던 언론이 시위대를 "폭도"로 보도한 데 격분해 광주MBC가 방화됐다. 20일 밤에는 100여 대의 택시·버스가 가두시위에 동참했고, 자정께 광주역 앞에서 계엄군의 첫 집단발포가 있었다. 2군사령부가 발포·실탄배분 금지를 명령했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했다 — 다음 날 더 큰 비극으로 이어지는 전조였다.
왜 일어났나
10·26 뒤 서울의 봄이 왔으나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쥔 전두환 신군부는 5월 17일 계엄을 전국으로 넓히고 김대중을 잡아들였다. 5월 18일 전남대 앞에서 학생들이 시위하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시민을 무차별로 때리고 찔렀다. 진압의 잔혹함이 오히려 시민을 거리로 불러냈고, 광주는 열흘 동안 고립된 채 스스로 질서를 지켰다.
무엇이 달라졌나
5월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와 27일 새벽 진압 작전으로 항쟁은 끝났다. 정부 집계로 사망 165명, 행방불명 수십 명이며 실제 숫자는 논쟁이 있다. 신군부는 폭도와 북한군 개입을 말했으나 1995년 특별법으로 전두환·노태우가 내란죄로 처벌되었고, 1997년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헬기 사격은 2017년 국방부 조사로 확인되었다. 5·18은 1987년 6월항쟁의 뿌리였다.
참고 자료
- 위키백과 5·18광주민주화운동
- 우리역사넷 광주민주화운동
이 사건과 이어지는 것
이 사건은 근현대 지도(1945~1993)의 사건입니다 — 근현대 사건 연표 · 지도 · 이야기 · 기록 ·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