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티잔 · 빨치산 · 빨갱이

1812~오늘

유럽에서는 훈장이 된 이름이 한국에서는 왜 욕이 되었나 — 한 단어의 200년

타임라인 (24개 지점)

  1. 모스크바 서쪽 숲 — партизан이라는 말 (1812 9월 · 스몰렌스크 가도(모스크바 서쪽))

    프랑스어 partisan은 본래 "편드는 사람", 곧 정규군이 아니면서 한쪽 편에 서서 싸우는 사람을 뜻했다. 이 말이 러시아어 партизан으로 넘어가 굳은 것이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때다. 러시아 정규군이 후퇴하는 동안 소규모 기병대와 농민들이 프랑스군의 보급선을 끊었다. 정면으로 붙지 않고 뒤를 치는 방식, 적의 땅이 아니라 자기 땅에서 싸우는 방식 — 파르티잔이라는 말에 붙은 이 두 가지 성격은 이후 200년 동안 바뀌지 않는다. 한국어 "빨치산"은 이 러시아어를 옮긴 말이다. 프랑스어에서 곧장 온 것이 아니라 러시아를 한 번 거쳤다는 사실이, 이 단어가 한국에서 겪을 운명의 첫 번째 단서다.

  2. 연해주 — 적색 파르티잔 (1919 ·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내전기,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백군과 간섭군에 맞선 무장 집단을 소비에트는 파르티잔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이 말에는 좌익이라는 색이 입혀진다 — 원래는 정치색과 무관한 전술 용어였다. 연해주에는 이미 수만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고,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조선인 무장부대도 이 전선에 섞여 들어갔다. 일본과 싸운다는 목적이 소비에트와 겹쳤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이 러시아어권 문서에서 파르티잔으로 기록되기 시작하는 것이 이 무렵이다.

  3. 봉오동 — 러시아어 문서 속의 조선인 부대 (1920 6월 · 봉오동(중국 지린성 도문 일대))

    홍범도가 이끈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다. 넉 달 뒤의 청산리와 함께 무장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크게 기록되는 전투다. 주목할 것은 이 부대가 무엇으로 불렸는가다. 한국어 자료는 대개 "독립군"이라 쓰지만, 소련 측 기록과 이후 고려인 사회의 문서는 이들을 "빨치산"으로 적었다. 같은 사람들이 두 언어에서 다른 이름을 가진 셈이다. [확인필요 — 1920년대 당대 러시아어 문서의 구체적 표기와 출처]

  4. 모스크바 — 홍범도는 자신을 "의병"이라 적었다 (1922 1월 · 극동민족대회(모스크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극동민족대회가 열렸다. 홍범도는 고려혁명군 대표로 참석해 레닌을 만나고 권총과 친필 서명이 든 기념품을 받았다. 이때 그가 작성한 조사표가 남아 있다. 직업란에 그는 "의병 28년(차)", 위임장란에 "의병대"라고 적었다. 소속 정당란과 노동조합란에는 "없소"라고 썼다. 본인이 자신을 부른 이름은 빨치산이 아니라 의병이었다. 빨치산은 남이 그를 부른 이름이었다 — 그리고 그 이름은 그가 죽은 뒤 묘비에 새겨진다(wp_14).

  5. 만주 — "항일빨치산"이라는 서사가 만들어지다 (1936 · 동북항일연군 활동권(중국 지린성 동부))

    1930년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지휘 아래 편성된 동북항일연군에 조선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들은 중국어·러시아어 문헌에서 유격대 또는 파르티잔으로 기록됐다. 훗날 북한은 이 경험을 국가의 창건 신화로 삼는다. "항일빨치산"은 북한에서 최고의 정치적 자산이 되고, 김일성의 정통성을 떠받치는 서사가 된다. 여기서 갈림길이 생긴다. 북한이 이 단어를 국가의 상징으로 가져가는 순간, 남한에서 같은 단어는 적의 언어가 된다. 단어의 운명은 그 단어를 누가 먼저 소유했는가로 갈렸다.

  6. 야이체 — 파르티잔이 국가를 세우다 (1943 11월 · 야이체(오늘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같은 시기 유럽에서 이 단어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티토가 이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웠고, 1943년 야이체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전후 국가의 틀을 세웠다. 파르티잔이 그대로 건국 세력이 된 것이다. 프랑스의 마키(maquis), 이탈리아의 파르티지아니, 소련의 파르티잔 — 유럽에서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대체로 명예다. 기념관이 서고 훈장이 수여된다. 한국은 이 단어를 유럽과 같은 시기에, 같은 뜻으로 받아들였다. 갈라진 것은 그 다음 5년이다.

  7. 정판사 사건 — 아직 판정이 끝나지 않은 갈림길 (1946 5월 · 조선정판사(서울 중구))

    조선공산당이 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혐의로 관련자들이 기소됐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이관술을 구속하고 박헌영에게 체포령을 내렸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좌익은 합법 정치 공간에서 밀려난다. 이 사건의 성격은 지금도 갈린다. 미군정 방첩대(CIC)가 개입한 조작이라는 견해와, 실제 위조가 있었다는 견해가 맞선다. 재심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확정된 사실은 하나다 — 이 사건 이후 좌익 활동이 불법의 영역으로 넘어갔고, 합법적으로 말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이후 산으로 가게 된다는 것. 이 루트는 어느 쪽 견해도 채택하지 않는다. 다만 갈림길이 여기 있었다는 사실은 기록한다.

  8. 제주 — 남한의 산에 처음 사람이 들어가다 (1948 4월 3일 · 한라산 중산간 일대)

    단독선거 반대와 경찰·서북청년단의 폭력에 맞서 무장대가 한라산으로 들어갔다. 남한에서 산으로 올라간 최초의 무장 집단이다. 토벌은 무장대가 아니라 마을을 향했다.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됐고,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의 대다수는 무장을 하지 않은 주민이었다. 무장대 역시 우익 인사와 그 가족을 살해했다.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정부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으며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다. 이 루트에서 가장 확정된 마디다. 그리고 이 진압을 위한 파병 명령이 여수로 내려간다.

  9. 여수 — 명령을 거부한 밤 (1948 10월 19일 · 국군 제14연대 주둔지(여수))

    제주 파병 명령을 받은 제14연대에서 지창수를 비롯한 하사관들이 봉기했다. "동족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이 내건 명분이었다. 봉기군은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다가 진압군에 밀렸다. 진압 과정에서 협력자 색출이 벌어졌고, 재판 없이 처형된 민간인이 다수 발생했다. 봉기군 역시 경찰과 우익 인사를 살해했다. 밀려난 병력은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들어갔다. 이현상이 이들을 수습하며, 남한 빨치산의 실질적 출발점이 만들어진다. 이후 1950년 전쟁 전까지 산에 있던 이들을 뒷날 구빨치라 부른다.

  10. 여수·순천 진압 — 운동장에서 가려진 사람들 (1948 10월 27일 · 여수 종산국민학교·순천 일대)

    진압군은 10월 23일 순천, 27일 여수를 되찾았다. 그 다음이 이 루트가 적어야 할 부분이다. 주민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였고, 손바닥의 굳은살과 머리카락 모양과 "손가락총" — 누군가가 가리키면 끌려나갔다 — 으로 협력자가 가려졌다. 재판 없이 처형된 사람이 다수였다. 여수 시가지 상당 부분이 진압 과정의 포격과 방화로 불탔다. 봉기군 쪽도 경찰과 우익 인사, 그 가족을 살해했다. 양쪽의 죽음을 모두 적는 것이 이 루트의 원칙이다. 산과의 관계는 여기서 갈린다. 이 색출을 피한 사람, 가족이 운동장에서 끌려나간 것을 본 사람, 봉기에 가담했다가 살아남은 병사 — 이들에게 지리산과 백운산은 선택이 아니라 남은 길이었다. 구빨치의 상당수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2021년 여순사건특별법이 제정돼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시작됐다. 민간인 희생의 세부는 「학살의 기록」 루트가 다룬다.

  11. "빨갱이"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다 (1948 11월 · 서울(정부 담화·신문 지면))

    여순 직후 정부 담화와 신문 지면에서 빨갱이라는 말의 쓰임이 달라진다. 그전까지 이 말은 대체로 좌익이라는 정치적 입장을 가리켰다. 여순 이후 그것은 인간의 범주가 된다 — 설득할 수도 재판할 수도 없고, 제거해야 하는 존재.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2009)이 이 전환을 논증한 대표적 연구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면서 이 범주는 법의 언어가 된다. 그런데 "빨갱이"가 "빨치산"에서 나왔다는 널리 퍼진 설명은 그대로 받기 어렵다. 어원은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파르티잔→빨치산→빨갱이라는 계보이고, 다른 하나는 색 이름 "빨강"에 접미사가 붙은 파생이다. 뒤쪽이 한국어의 규칙에 더 잘 맞는다 — 노랑에서 노랭이가, 파랑에서 파랭이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이어서 러시아어를 경유할 필요가 없다. 연대도 걸린다. 빨갱이는 해방 직후부터 쓰였지만 빨치산이 널리 쓰이는 것은 여순 이후다. 나중에 퍼진 말에서 먼저 있던 말이 나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두 단어는 어원이 다르되 소리가 닮아 서로를 끌어당겼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그 끌어당김이 오해를 낳았다 — 빨치산이라는 말 자체에는 이념도 지역도 담겨 있지 않은데(반공 빨치산도 있었고 산이 아닌 곳의 빨치산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산에서 싸우는 빨갱이"라는 합성어처럼 읽히게 됐다. 어원의 오해가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된 셈이다.

  12. 겨울 산 — 구빨치의 소멸 (1949 12월 · 지리산 일대)

    1949년 겨울 대대적인 토벌로 산에 있던 병력 대부분이 소멸했다. 이 시기 빨치산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1950년 봄에는 사실상 잔여 세력만 남았다. 구빨치와 신빨치를 가르는 선이 여기 있다. 이 선은 실재하지만, 사람이 그 선대로 갈리지는 않는다 — 1948년에 올라가 1951년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있고, 두 시기의 성격이 한 사람 안에 겹친다. 전쟁 전에 산에 있던 사람들은 국가 수립 과정의 내부 충돌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같은 산이 전선의 후방이 된다. 같은 장소에 있던 사람들의 법적·역사적 위치가 그렇게 달라진다.

  13. 문경 석달마을 — 토벌이 마을을 겨눌 때 (1949 12월 24일 · 경북 문경 산북면 석달마을)

    1949년 겨울 토벌이 한창일 때, 국군 토벌 부대가 문경 석달마을 주민 86명을 사살했다.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의심이 이유였고, 희생자 다수가 노인과 아이였다. 전쟁이 나기 반년 전의 일이다. 이 사건이 이 루트에 들어오는 이유는 순서 때문이다. 구빨치를 없애기 위한 토벌이 먼저 마을을 겨눴고, 그렇게 마을이 죽은 뒤에 전쟁이 왔다. 토벌 부대가 빨치산과 주민을 구분하지 않는 방식은 1949년 겨울에 이미 정해져 있었고, 1951년 함평·거창·산청함양은 그 방식의 반복이었다. 산의 사람 수보다 산 아래에서 죽은 사람 수가 많았던 구조가 여기서 시작된다. 민간인 희생의 세부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는 「학살의 기록」 루트가 다룬다.

  14. 골령골 — 산으로 가게 만든 학살 (1950 7월 · 대전 골령골)

    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를 예비검속해 집단 처형했다. 대전 골령골에서만 수천 명이 희생됐고, 전국적으로 수만 명 규모로 추정된다. 보도연맹 가입자 상당수는 좌익 활동과 무관했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마을 단위로 이름을 올린 경우가 흔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로 국가 폭력임이 공식 확인됐고, 배상 판결과 대통령 사과가 있었다. 확정된 사실이다. 그리고 이 학살이 그 다음을 만든다 — 가족이 끌려가 죽는 것을 본 사람들에게 산은 이념이 아니라 도피처였다.

  15. 퇴로가 끊기다 — 신빨치의 입산 (1950 9월 28일 · 백아산(전남 화순))

    인천상륙으로 북으로 가는 길이 끊기자 인민군 낙오병과 지방 좌익이 대거 산으로 들어갔다. 이튿날인 9월 29일 경남도당은 함양 문정리에서 경상남도 인민유격대를 편성했다. 규모로 보면 빨치산이 역사적 사건이 되는 것은 이때부터다. 지리산·백아산·백운산이 거점이 됐다. 산에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산이 스스로 남긴 기록이 말한다. 경남 인민유격대가 1951년 7월 작성한 사업보고서의 「성분별 통계표」(1951년 3월 현재)에 따르면 총원 1,258명 가운데 출신성분이 빈농인 사람이 1,054명, 83.8%였다. 노동자 124, 중농 60, 사무원 13, 학생 6, 부농 1. 여성은 38명이었다. 좌익 지식인의 산이 아니라 가난한 농민의 산이었다. 다만 이 표는 경남 한 도, 한 시점의 기록이고, 누가 있었는지를 말할 뿐 왜 올라왔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왜 올라왔는가에 대해서는 진실화해위원회에 남은 마을 단위 증언이 서로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 인민군 점령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다 수복과 함께 떠난 사람, 잘 알지도 못한 채 조직에 이름을 올렸다가 두려워서 올라간 사람, 무장대에 끌려 올라간 사람, 올라갔다가 얼마 못 가 자수하러 내려온 사람. 그 자수자들이 치안대의 자의적 판단으로 총살된 사례도 기록돼 있다. "대다수가 여순·보도연맹 피해자 가족"이라는 널리 퍼진 진술은 개별 구술로는 확인되지만 비중을 보여주는 통계는 아직 없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전시에 국가에 총을 든 무장세력이었다는 사실과, 학살을 피해 올라간 사람이 그 안에 있었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이다. 두 문장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는 이 카드가 정하지 않는다.

  16. 고양 금정굴 — 수복 뒤, 산으로 가는 두 번째 이유 (1950 10월 · 경기 고양 덕양구 대자동)

    9·28 수복 직후, 경찰과 치안대가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주민 150명 이상을 금정굴에서 처형했다. 재판은 없었다. 부역의 범위는 넓었다 — 인민위원회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 배급을 받은 사람, 가족 중 누군가가 좌익이었던 사람. 같은 일이 전국에서 벌어졌고, 이것이 신빨치의 두 번째 공급원이었다. 첫째가 퇴로를 잃은 인민군 낙오병이라면, 둘째는 수복이 곧 처형을 뜻했던 사람들이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남은 전북 마을 증언은 이 경로를 그대로 보여준다 — 잘 알지도 못한 채 조직에 이름을 올렸다가 두려워서 올라간 젊은이들, 그리고 얼마 뒤 자수하러 내려왔다가 치안대의 자의적 판단으로 총살된 사람들. 산은 이념의 장소이기 전에 도피처였고, 그 도피처를 만든 것은 산 아래의 처형이었다. 민간인 희생의 세부는 「학살의 기록」 루트가 다룬다.

  17. 함평 — "살고 싶으면 마을 앞으로" (1950 12월 6일 · 전남 함평 월야·해보·나산면)

    1950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불갑산 일대 빨치산 토벌을 맡은 국군 제11사단 20연대 병력이 함평 월야·해보·나산면에서 주민 500여 명을 사살했다. 배경에는 빨치산의 국군 공격이 있었고, 부대는 마을을 통째로 협력자로 간주했다. 주민들을 마을 앞으로 모아 세운 뒤 총을 쏘는 방식이었다. 전남인민유격대의 근거지 백아산·불갑산·백운산은 모두 이런 마을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산의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쌀과 소와 사람을 가져갔고(경찰 일일보고서는 그것을 매일 적었다), 토벌 부대는 그 마을을 산의 일부로 취급했다. 마을은 양쪽에서 죽었다. 이 루트가 김선우의 이름 옆에 함평을 놓는 이유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국가 책임을 확인했다. 세부는 「학살의 기록」 루트가 다룬다.

  18. 거창·산청·함양 — 같은 부대, 같은 방식 (1951 2월 9일 · 경남 거창 신원면 / 산청·함양)

    1951년 2월 7일 산청·함양에서, 9일부터 11일까지 거창 신원면에서,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주민을 집단 사살했다. 산청·함양 705명, 거창 719명. 지리산 남쪽 자락, 경남 인민유격대의 활동권 한가운데였다. 부대는 "견벽청야" — 성을 굳게 지키고 들판을 비운다 — 를 작전 방침으로 삼았고, 그 들판에 마을이 있었다. 같은 달 경남 인민유격대의 세력 통계표는 전사 48, 부상 114, 이탈 31을 적었다. 같은 산, 같은 2월이다. 산에서 죽은 193명과 산 아래에서 죽은 1,400여 명 — 이 두 숫자를 나란히 놓는 것이 빨치산의 역사를 적는 방법이다. 어느 쪽 죽음을 지우면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거창 사건은 국회 조사와 재판으로 이어져 당시로서는 드물게 책임이 물어졌고, 1996년 특별법으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산청·함양은 1996년 같은 법에 뒤늦게 포함됐다. 세부는 「학살의 기록」 루트가 다룬다.

  19. 크즐오르다 — 같은 해, 같은 단어, 두 개의 얼굴 (1951 10월 25일 · 크즐오르다 중앙공동묘지(카자흐스탄))

    홍범도가 죽은 지 8년, 봉분이 내려앉자 크즐오르다의 고려인들과 옛 전우들이 분묘수리위원회를 만들어 성금 2000여 루블로 철비를 세웠다. 1951년 10월 25일이다. 앞면에는 한글로 이렇게 새겨졌다 — "저명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 묘". 뒷면에는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의 일홈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 같은 해 겨울, 지리산에서는 같은 단어가 사람을 죽여도 되는 이유였다. 1951년의 한국어에서 "빨찌산"은 최고의 존칭이자 최악의 낙인이었다. 어느 쪽이 진짜 뜻인지를 정한 것은 사전이 아니라 국경이었다. 이 철비는 오래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24년 앞부분이 실물로 확인됐다. 뒷부분은 아직 찾지 못했다.

  20. 일월산 — 도착하지 못한 편지 (1951 10월 25일 · 일월산(경북 영양·봉화))

    홍범도의 묘비에 "빨찌산 대장"이 새겨진 바로 그날, 경북 일월산에서 한 사람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동해남부전구 빨치산부대 정치위원 안병렬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이승엽 앞으로 보낸 7장짜리 보고서다. 우연이지만, 이 루트가 묻는 것을 하루 안에 겹쳐 보여준다 — 같은 단어가 한쪽에서는 비석에 새겨지고 다른 쪽에서는 산속에서 쫓기고 있었다. 편지를 쓴 사람은 총을 들 이유가 가장 적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충남 당진의 가난한 농촌에서 나 경성제2고보와 홋카이도제국대학 농학부를 나온 농업경제학자였고, 해방 후 토지개혁안을 입안하며 서른 살에 조선 농업문제 일급 전문가로 꼽혔다. 1948년 월북해 빨치산 간부 양성기관에서 강의하다, 1950년 6월 24일 전쟁 발발 하루 전 속초항에서 배로 38선을 넘어 남으로 왔다. 편지가 전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고립이다. 부대의 전투구역인 경남 동부는 전쟁 내내 인민군에게 점령된 적이 없는 적진 한가운데였고, 남파 이후 한 번도 중앙당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보고도 지령도 보급도 없었다. 지도부가 병력 3분의 1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따라 일월산까지 올라간 것은 그 봉쇄를 뚫기 위해서였다. 편지는 도착하지 못했다. 이것을 지니고 북상하던 참모장 김정수는 38선 연선에서 사살된 것으로 전하고, 문서는 1952년 1월 13일 국군에게 노획돼 미군 문서로 워싱턴에 넘어갔다가 40여 년 만에 영인본으로 돌아왔다. 산에서 쓴 글이 산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경로가 노획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시대의 기록이 어떻게 남았는지를 말해준다.

  21. 백야전전투사령부 — 겨울 대토벌 (1951 12월 · 지리산 남원 일대)

    1951년 12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백야전전투사령부가 지리산 일대에서 대규모 토벌을 벌였다. 이 작전으로 빨치산의 조직적 활동은 사실상 끝난다. 작전 구역의 주민은 소개(疏開)됐고, 산간 마을이 불태워졌다. 빨치산과 주민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학살의 기록」 루트가 다루는 여러 사건이 이 논리 위에서 벌어졌다. 산에 남은 사람들은 굶고 얼어 죽었다. 전투로 죽은 수보다 아사·동사한 수가 많았다는 것이 생존자 증언의 공통점이다.

  22. 빗점골 — 이현상의 죽음 (1953 9월 18일 · 지리산 빗점골(경남 하동))

    남부군을 이끌던 이현상이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됐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두 달 뒤다. 그의 시신은 서울로 옮겨져 공개 전시됐다. 사살 경위를 두고는 토벌대의 총격이라는 기록과 내부 소행이라는 설이 함께 전한다. 휴전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산에서는 끝나지 않았다. 국제법상 교전이 종료된 뒤에도 산에 남은 사람들은 어떤 신분도 갖지 못했다 — 포로도 아니고 병사도 아닌 채로 쫓겼다.

  23. 산청 — 마지막 빨치산 (1963 11월 12일 · 산청군 삼장면 일대)

    정순덕이 체포됐다. 휴전 10년, 여순 15년 뒤다. 함께 있던 이홍희는 사살됐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3년을 복역한 뒤 1985년 출소했다. 전향을 거부해 사회안전법에 따라 추가로 감호되기도 했다. 2004년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의 생애가 이 단어의 무게를 그대로 보여준다. 산에 4년, 감옥에 23년, 그리고 남은 평생 동안 "빨갱이"였다.

  24. 오늘 — 법은 이름을 돌려주었는가 (2021 6월 29일 · 여수)

    2000년 4·3특별법,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 출범, 2021년 여순사건특별법. 국가는 민간인 희생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배상 판결이 이어졌다. 다만 법이 인정한 것은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이다. 산에 있었던 사람은 그 범주에 들지 않는다. 무장을 들었던 사람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고, 그것이 채워져야 하는지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단어는 남았다. 유럽에서 파르티잔은 기념관에 있고, 한국에서 빨갱이는 아직 정치적 욕설이다. 러시아어 партизан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갈래가 200년 뒤 이렇게 다른 곳에 도착했다. 이 루트가 묻는 것은 하나다 — 그 단어로 불린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는가.

관련 자료실

지도에서 루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