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 초토화 작전

1948년 9월 · 제주도 (한라산 중산간 일대)

1947년 3월 1일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진 사건을 기점으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내건 남로당 제주도당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정부 수립 후인 그해 10월 11일부터 군경은 해안선 5km 밖 중산간 지역 주민을 모두 "폭도"로 간주해 사살하겠다는 포고를 내리고 마을을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에 들어갔다. 1949년 3월까지 전체 희생자의 67%가 이 시기에 발생했다 — 토벌대에 의한 사망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살해도 있었다. 1954년 9월 한라산 통행이 전면 개방되며 7년 7개월 만에 사건이 마무리됐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왜 일어났나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6명이 죽었고, 이후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이 이어졌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단독선거 반대와 탄압 중지를 내걸고 무장봉기했다. 정부 수립 뒤 이승만 정부는 제주를 좌익의 섬으로 보았고, 11월 계엄령과 함께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폈다.

무엇이 달라졌나

1954년까지 희생자가 최소 1만 4천, 많게는 3만 명으로 추정되며 대부분 민간인이었다. 마을 130여 곳이 사라졌다. 오랫동안 말할 수 없던 사건은 1999년 특별법으로 조사가 시작되었고, 2003년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 사과했다. 4·3을 무엇으로 부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아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희생자 명패는 기억의 뜰에 있다.

참고 자료

이 사건과 이어지는 것

이 사건은 근현대 지도(1945~1993)의 사건입니다 — 근현대 사건 연표 · 지도 · 이야기 · 기록 ·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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