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 독립운동가에서 하와이의 망명객으로

1875~1965

외교독립론자에서 임시정부 대통령, 임정 탄핵 1호, 초대 대통령, 그리고 3·15 부정선거로 쫓겨난 90년

타임라인 (28개 지점)

  1. 출생 — 몰락 양반가의 아들 (1875 · 황해도 평산)양복 차림의 노년 이승만 흑백 공식 초상이승만 공식 초상, 1948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1875년 황해도 평산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전주 이씨 왕족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집안의 실질적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과거 급제를 목표로 한학을 공부했으나, 갑오개혁으로 과거제 자체가 폐지되면서 전통적 출세길이 막혔다.

  2. 배재학당과 독립협회 — 개화와 정치 연설의 시작 (1897 · 한성 정동)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서양식 건물의 정면배재학당 동관(배재학당역사박물관)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김지호 (공공누리 제1유형)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영어와 서양 학문을 배우며 개화사상에 눈떴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열정적인 연설로 이름을 알렸고,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과 《협성회회보》 등에서 논설을 쓰며 급진 개혁파 청년 논객으로 떠올랐다. 이 시기의 웅변술은 훗날 그의 정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무기가 된다.

  3. 한성감옥 — 사형수에서 옥중 개종까지 (1899 1월 · 한성감옥)흰 옷을 입은 수감자들이 두 줄로 앉고 선 채 찍은 흑백 단체 사진한성감옥 시절 이승만(맨 왼쪽)과 동료 수감자들, 1899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5년 넘게 한성감옥에 갇혔다.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했고, 《독립정신》을 집필하며 훗날 그의 정치 철학의 뼈대가 되는 반러·친미 노선을 다졌다. 감옥은 그에게 처벌의 공간이자 동시에 사상을 벼리는 공간이었다.

  4. 도미 유학 — 프린스턴 박사 (1905 · 워싱턴 → 프린스턴)잔디밭과 나무 너머로 보이는 둥근 탑을 얹은 돌 건물프린스턴 대학교 나소홀, 2012년 · 사진 Smallbones · 퍼블릭 도메인(CC0) · 위키미디어 공용

    특사로 미국에 파견됐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조지워싱턴대·하버드대를 거쳐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 학위 취득자였다. 이때부터 그는 "외교를 통한 독립"이라는 노선을 평생의 신념으로 굳혔다 — 무장투쟁보다 국제 여론과 열강의 힘을 빌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5.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1919 9월 6일 · 워싱턴 → 상하이)태극기 아래 여러 줄로 앉고 선 사람들의 흑백 단체 사진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식 기념사진, 1920년 1월 1일 · 사진 독립기념관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상하이 임시정부를 비롯해 국내외 여러 임시정부가 통합되면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 취임 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상하이가 아닌 워싱턴에 머무르며 외교 활동에 집중했다. 정부의 수반이 정작 정부가 있는 곳에 거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후 임시정부 내부에서 그를 둘러싼 불신의 씨앗이 된다.

  6. 임시정부 탄핵 — 대한민국 역사상 첫 대통령 탄핵 (1925 3월 23일 · 상하이)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2층 양옥과 앞뜰의 나무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터(루이진2로) · 사진 Fayhoo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

    임시정부를 자주 비운 채 워싱턴에 머물던 것에 더해, 국제연맹에 조선을 국제 위임통치하에 두자는 청원을 냈던 사실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진영 내 반발이 커졌다. 결국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탄핵했다 —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었다. 그는 이후로도 계속 미국에서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이어갔지만, 임시정부 지도부와의 관계는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틀어졌다.

  7. 광복 후 귀국 — 미군정의 지원 속에 (1945 10월 16일 · 서울)높은 곳에서 군인이 내려다보는 서울 큰길과 멀리 보이는 산이승만 귀국 환영 행진을 내려다본 서울 거리, 1945년 10월 · 사진 Don O'Brien from Piketon, Ohio, United S… · CC BY 2.0 · 위키미디어 공용

    광복 두 달 뒤, 미군 수송기를 타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해 11월에야 역시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 것과 달리, 이승만은 미군정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라디오 방송으로 전국에 귀국 소식이 알려지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오랜 미국 인맥과 반공주의자로서의 입지가 그를 유력한 지도자 후보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8. 정읍 발언 — 단독정부론의 등장 (1946 6월 3일 · 전북 정읍)정읍 발언을 1면에 실은 옛 신문 지면정읍 발언을 보도한 서울신문 1면, 1946년 6월 5일 · 사진 ko:서울신문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좌우합작이 난항을 겪던 중,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통일 정부 수립이 사실상 어려워진 상황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첫 발언이었다. 김구를 비롯한 통일정부 지지 세력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발언은 2년 뒤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으로 현실화된다.

  9. 대한민국 정부 수립 — 제헌헌법 공포와 초대 대통령 취임 (1948 7월 17일 · 서울(중앙청))태극기가 걸린 중앙청 앞 연단과 그 앞을 가득 메운 군중의 흑백 사진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서울 중앙청, 1948년 8월 15일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헌법이 공포되고, 이승만이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8월 15일 정부 수립이 공식 선포되며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독립운동가에서 국가 원수로 — 광복 3년 만에 그의 오랜 정치 인생이 국가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10.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발족 (1948 10월 · 서울(국회))단상 위 재판부 앞에 사람들이 빽빽이 앉은 흑백 사진반민특위 재판 광경, 1949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친일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특위가 국회 주도로 출범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처음부터 이 기구에 부정적이었다 — 신생 정부의 행정·치안 실무를 담당할 인력 상당수가 일제강점기 관료·경찰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대거 처벌하면 국가 운영 자체가 흔들린다는 논리였다. 친일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반공을 위한 실무 인력 확보라는 현실 사이에서 그는 후자를 택했다.

  11. 여순사건 가담자 색출 담화 (1948 11월 4일 · 서울)

    여수·순천에서 일어난 군 반란과 그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 명이 희생된 뒤,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 "가담자를 철저히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이 담화는 이후 국민보도연맹 결성과 예비검속의 명분으로 이어지며, 한국전쟁기 대규모 민간인 학살로 이어지는 국가폭력의 정책적 기반을 놓은 순간으로 평가된다.

  12. 제주 4·3 — 강경 진압을 승인하다 (1948 · 제주)오름을 배경으로 넓은 잔디밭 가운데 둥근 추모 조형물이 놓인 모습제주4·3평화공원, 2018년 · 사진 GtDX8NNO3Efn2oF6q0s3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제주 4·3사건 진압 책임자로 조병옥 경무부장을 비롯한 강경파가 주도권을 쥐었고, 이승만 정부는 이를 사실상 승인·묵인했다. "제주도 전체를 초토화해서라도 진압하라"는 취지의 지시가 있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2003년 정부의 공식 조사에서 이 진압 과정에서 최소 1만 4천 명(추정치는 그 두 배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

  13. 반민특위 습격 사건 — 친일 청산의 좌절 (1949 6월 6일 · 서울(국회))

    친일 경찰 출신 간부들이 이승만의 묵인 혹은 지시 아래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 소속 경찰과 직원들을 무장 해제하고 강제 연행했다.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사실상 활동이 마비됐고, 이듬해 조직 자체가 해체됐다. 친일 청산이라는 해방 정국 최대 과제 중 하나가,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민국 정부 스스로에 의해 좌절된 사건이다.

  14. 전쟁 발발과 서울 도피, 그리고 보도연맹 처리 지시 (1950 6월 27일 · 대전(피난 임시수도))

    북한군의 남침 직후 이미 대전까지 피신한 상태에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라디오 방송으로 시민들을 안심시켰다. 정작 자신은 국민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라는 지시를 하달했고, 이는 두 달 사이 전국에서 최소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시작점이 됐다. 국가 원수가 국민을 속이고 도망친 동시에, 다른 국민의 목숨을 거두라 지시한 순간이었다.

  15. 부산 정치파동 — 계엄으로 밀어붙인 개헌 (1952 5월 25일 · 부산(임시수도))나무 사이로 보이는 붉은 벽돌 2층 양옥부산 임시수도기념관(피난 시절 대통령 관저)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부산관광공사 (공공누리 제1유형)

    국회 간접선거로는 재선이 불확실해지자, 임시수도 부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헌병대로 연행하는 등 강압적 방법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였다. 전쟁 중인 나라에서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겁박한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처음으로 뚜렷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16. 발췌개헌 — 대통령 직선제 도입 (1952 7월 4일 · 부산)둥근 화단 뒤에 선 붉은 벽돌 3층 건물과 그 뒤의 현대식 고층 건물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옛 임시수도 정부청사)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신민선 (공공누리 제1유형)

    계엄 상태에서 국회의원들이 기립 표결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국회 다수 의석으로는 재선이 어려웠던 이승만이 국민 직접 투표라는, 자신에게 더 유리한 방식으로 룰을 바꾼 것이다. "발췌"라는 이름은 여러 개헌안 중 유리한 조항만 골라 짜깁기했다는 뜻에서 붙었다.

  17. 이승만 제2대 대통령 재선 (1952 8월 5일 · 부산)

    새로 도입된 직선제 아래 치러진 첫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 득표율로 재선됐다. 전쟁 중 최고 지도자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관제 여론 동원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이 재선으로 그의 장기 집권 구도가 사실상 완성됐다.

  18. 반공포로 일방 석방 — 정전협상을 뒤흔들다 (1953 6월 18일 · 전국 포로수용소(부산·논산·마산 등))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석방된 반공포로의 흑백 사진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태극기를 흔드는 반공포로, 1953년 무렵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정전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 이승만은 유엔군과 사전 협의 없이 반공 성향 북한군 포로 2만 7천여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했다. 정전에 반대하며 통일 없는 휴전을 막으려는 승부수였다. 미국은 격노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강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확실한 안보 보장을 얻어내는 지렛대가 됐다 — 동맹을 뒤흔드는 위험한 도박이 동시에 실리를 챙긴 사건이었다.

  19.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953 10월 1일 · 워싱턴)양복 차림의 두 사람이 탁자 앞에서 악수하는 흑백 사진한미상호방위조약 서명식, 워싱턴, 1953년 10월 1일 · 사진 The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을 압박한 끝에, 한국에 대한 무력 공격 시 미국의 자동 개입을 명시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이후 70년 넘게 이어지는 한미동맹의 법적 기초가 이때 놓였다. 그의 재임 기간 중 가장 뚜렷한 외교적 성과로 꼽히는 사건이다.

  20. 사사오입 개헌 —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 철폐 (1954 11월 29일 · 서울(국회))국회 연단 앞에서 한 의원이 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는 흑백 사진사사오입 개헌에 항의해 국회부의장 최순주의 멱살을 잡은 이철승 의원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이승만의 3선을 가능케 하려는 개헌안이 국회 표결에서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5.33명에 1표(135명) 못 미쳐 부결됐다. 그러나 자유당은 이틀 뒤 "사사오입(반올림)" 계산법을 내세워 135.33을 135로 반올림해야 한다며 부결을 번복하고 개헌안 통과를 선포했다. 수학적 반올림 규칙을 정치적으로 악용해 헌법을 고친, 헌정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21. 이승만 80회 탄신 경축 행사 — 개인숭배의 절정 (1955 · 서울(서울운동장))

    이승만의 80번째 생일을 맞아 관제 대규모 경축 행사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동상이 세워지고 초상화가 걸렸으며, 그의 생일은 사실상 국가 기념일처럼 다뤄졌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 집권의 길을 연 직후, 개인에 대한 국가 차원의 숭배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22. 3대 정부통령 선거 — 신익희 급사와 조봉암의 약진 (1956 5월 15일 · 전국)안경을 쓴 중년 남성의 흑백 인물 사진신익희, 1952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유력한 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선거 유세 열흘 전 지방 유세 도중 열차에서 급사했다. 동정표가 진보 성향 후보 조봉암에게 몰리며 이승만은 재선에는 성공했지만 득표율이 크게 흔들렸고, 부통령에는 야당의 장면이 당선됐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이 처음으로 선거 결과에 뚜렷하게 나타난 순간이었다.

  23. 진보당 사건 — 조봉암 체포 (1958 1월 13일 · 서울)나비넥타이를 맨 남성의 흑백 인물 사진조봉암, 1948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로 떠올랐던 조봉암이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진보당은 강제 해산됐다. 정치적 위협이 될 만한 야당 지도자를 사법 절차를 동원해 제거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24. 조봉암 사형 집행 — 사법살인 (1959 7월 31일 · 서울(서대문형무소))양쪽에 감방 문이 늘어선 오래된 옥사 복도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옥사 내부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김지호 (공공누리 제1유형)

    재심 청구가 기각된 다음 날, 조봉암의 사형이 서둘러 집행됐다. 그는 죽기 직전 "이 박사는 소수를 위한 정치 지도자였고, 나는 다수를 위한 정치를 하려 했소"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며, 이 사건은 정치적 목적의 사법살인으로 공식 확인됐다.

  25. 재일교포 북송 시작 (1959 12월 14일 · 일본 니가타)배 난간에 늘어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의 흑백 사진재일교포 북송선, 1960년 무렵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재일 한인 9만 3천여 명이 북한으로 이주하는 이른바 "북송사업"이 니가타항에서 시작됐다. 이승만 정부의 재일교포 문제 방치와 냉랭한 한일관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던 북한의 유치 공작에 재일 한인 상당수가 응한 결과였다. 많은 이들이 훗날 북한 체제 아래서 감시와 차별에 시달렸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26. 3·15 부정선거 (1960 3월 15일 · 전국)

    85세 고령의 이승만을 위해 자유당은 사전투표함 바꿔치기, 3인조·9인조 공개투표, 개표 조작 등 노골적인 부정 수법을 총동원해 대통령 선거와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강행했다.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시민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서 발견되면서, 그동안 쌓여온 분노가 전국적 항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27. 4·19혁명 — 경무대 앞의 총성, 그리고 하야 (1960 4월 19일 · 서울(경무대 앞))학생들의 모습을 새긴 부조와 그 앞에 놓인 화환고려대학교 교정의 4·19 기념 부조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박성근 (공공누리 제1유형)

    전국의 학생과 시민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섰고, 경찰의 발포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대학교수단까지 시국선언에 나서며 퇴진 요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이승만은 4월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며 하야를 발표했다. 12년에 걸친 집권이 국민의 봉기 앞에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28. 하와이 망명과 사망 (1965 7월 19일 · 하와이 호놀룰루)영정 양옆으로 제복 차림 의장대가 줄지어 선 영결식장의 흑백 사진이승만 영결식, 1965년 7월 27일 · 사진 서울시 공보실 · 공공누리 제1유형 · 위키미디어 공용

    하야 직후 하와이로 출국해 그대로 망명 생활에 들어갔다. 귀국을 희망했지만 국내 정치 상황상 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1965년 7월 19일 호놀룰루의 한 요양원에서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국내로 옮겨져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 독립운동가로 시작해 국가를 세운 초대 대통령이자, 동시에 국민의 봉기로 쫓겨난 독재자로 기억되는 90년의 생애가 여기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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