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전국 대학생들이 경무대로 행진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해 하루 만에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했지만 4월 25일 대학교수단까지 시국선언과 거리 시위에 나서며 사태는 더 커졌다. 계엄사령관 송요찬이 시위대를 향한 발포를 금지하라 지시하며 군은 더 이상 정권을 지키지 않았다. 4월 26일, 12년간 집권했던 이승만이 결국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학생과 시민이 부정선거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민주화 혁명이었지만, 마무리되지 못한 혁명은 1년 뒤 군사 정변에 길을 내주는 결과로 이어진다.
왜 일어났나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세 번째 집권했고 1960년 3월 15일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려고 조직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마산에서 시위 중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르자 분노가 전국으로 번졌다. 4월 19일 서울의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경무대로 향했고 경찰이 발포해 그날 서울에서만 100명 넘게 죽었다.
무엇이 달라졌나
4월 25일 교수단이 시위에 나섰고 26일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해 하와이로 떠났다. 이기붕 일가는 자결했다. 헌법이 내각책임제로 바뀌어 제2공화국이 섰으나 1년 만에 5·16으로 무너졌다. 4·19는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바꾼 첫 경험이었고, 헌법 전문은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적었다. 그날 죽은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의 뜰에 있다.
관련 인물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19혁명
- 국립4·19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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