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부터 오늘까지, 이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을 기억하는 공간입니다.
스스로 일어나 싸우다, 복무 중 나라와 이웃을 지키다,
국가의 폭력에, 지켜지지 못한 일상 속에 —
서른여덟 개의 명패가 지도 위에 놓여 있습니다.
아래의 시간을 끌면, 죽음의 기록이 지도 위에 쌓입니다.
지워지지 않고, 쌓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가르침 아래 농민들이 낡은 신분 질서와 탐학, 그리고 밀려드는 외세에 맞서 일어났다. 황토현에서 관군을 이겼고, 전주화약으로 집강소 자치를 이뤘으며,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다시 일어나 우금치에서 기관총 앞에 스러졌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맞서 일어난 을미의병부터, 군대 해산 뒤 전면전이 된 정미의병까지 — 유생과 농민과 해산 군인이 한 대열이 되어 기울어 가는 나라를 붙들었다. 남한대토벌 이후에도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다.
의병에서 의열투쟁으로, 만주의 무장투쟁에서 임시정부의 외교와 광복군까지 — 50년에 걸쳐 나라를 되찾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장과 만주의 설원과 상하이의 뒷골목이 그들의 자리였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두 달 만에 한반도 전역과 해외로 번졌다. 무기를 들지 않은 시위대에 일제는 총검으로 답했고, 제암리에서는 교회에 주민을 가두고 불을 질렀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실종된 열일곱 김주열이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자, 분노는 전국으로 번졌다. 4월 19일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했고, 일주일 뒤 이승만은 물러났다.
군사독재 30여 년 — 감옥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강의실에서 민주주의의 값을 목숨으로 치른 사람들이 있었다. 마석 모란공원의 민족민주열사 묘역은 그 이름들이 모여 있는 자리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법은 있으되 지켜지지 않던 시대 —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노동열사가 그 길을 이었다.
1979년 10월, 부산대에서 시작된 유신 반대 시위가 부산과 마산 시내를 뒤덮었다. 계엄령과 위수령, 무차별 연행과 고문으로 진압되었으나, 열흘 뒤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계엄 확대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에게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열흘 동안 고립된 도시에서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누고 헌혈 줄을 서며 서로를 지켰고, 5월 27일 새벽 옛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시민군이 스러졌다. 국가가 국민에게 총을 겨눈 그 봄의 발포 명령자는 아직 특정되지 않았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대학생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졌다. "탁 치니 억 하고"라는 발표는 거짓으로 드러났고, 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자 분노는 전국의 거리를 채웠다. 6·29선언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 오늘의 민주주의가 그 거리에서 왔다.
창경 이래 경찰관들은 전쟁의 전선에서, 범죄의 현장에서, 재난의 한복판에서 국민보다 먼저 위험 앞에 서 왔다. 한국전쟁기에는 경찰 부대가 전투에 투입되어 수많은 전몰 경찰관이 나왔다.
모두가 뛰쳐나오는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직무였다. 화재 현장에서, 구조 현장에서, 수해의 급류 속에서 — 소방관들은 남을 살리는 일의 값을 자신의 목숨으로 치러 왔다.
훈련 중의 병사, 재해 현장의 공무원, 격오지의 집배원 — 이름이 뉴스에 오르지 않은 자리에서 직무를 다하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 죽음들은 기관별 장부에 흩어져 있어 하나의 숫자로 모인 적이 없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시작된 전쟁은 3년 1개월간 한반도를 휩쓸었다.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다시 휴전선까지 — 스무 살 안팎의 청년들이 전선에서 조국을 지키다 스러졌고, 그 다수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2만여 명의 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이국의 정글에서 5천여 명이 전사했고, 살아 돌아온 이들 중 많은 수가 고엽제 후유증이라는 보이지 않는 전상을 안고 살아간다.
북방한계선의 바다에서 세 번의 희생이 있었다.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여섯 장병이 전사했고,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으로 마흔여섯 장병이 산화했으며 구조에 나섰던 한주호 준위가 순직했다. 같은 해 11월 연평도 포격으로 장병 두 명과 주민 두 명이 희생되었다.
일본 제국은 전쟁 수행을 위해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성노예로 삼았다. 피해자들은 해방 후에도 반세기 가까이 침묵을 강요당했고, 1991년 김학순 님이 처음으로 실명 공개 증언에 나서면서 이 범죄는 세계의 기록이 되었다.
국가총동원법 이후 수백만의 조선인이 일본 본토의 탄광과 군수공장으로, 사할린으로, 남양군도의 전선으로 끌려갔다. 부산항은 그 대부분이 고향을 마지막으로 본 자리였고, 많은 이들이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해방 이듬해 가을, 식량난과 미군정의 강압적 미곡 수집에 항의하던 대구 시민들에게 경찰이 발포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시위와 진압, 보복이 뒤엉킨 혼란 속에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1947년 3·1절 발포 사건에서 시작해 1954년 한라산 금족령 해제까지 7년 — 무장봉기 진압의 이름 아래 중산간 마을들이 불태워지고 주민들이 집단 학살되었다. 당시 제주 인구의 십분의 일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반세기 동안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1948년 10월, 제주 진압 출동을 거부한 군 부대의 봉기에서 시작된 사건은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의 대량 희생으로 번졌다. 이후 여수와 순천은 '반란의 도시'라는 낙인 아래 73년을 침묵해야 했다.
보도연맹은 국가가 좌익 전력자를 '계도'한다며 가입시킨 관변 단체였고, 할당량을 채우느라 좌익과 무관한 농민들까지 이름을 올렸다. 전쟁이 터지자 군과 경찰은 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해 전국의 골짜기에서 집단 처형했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지금도 유해가 나온다.
전쟁의 이름 아래 지켜져야 할 국민이 아군과 우방의 총에 희생되었다. 노근리 쌍굴다리에서는 피란민들이 미군의 사격에, 거창·산청·함양에서는 주민들이 국군의 총에 목숨을 잃었고, 수복 후에는 부역 혐의 처형이 전국에서 이어졌다.
진보당의 조봉암은 1959년, 민족일보의 조용수는 1961년, 인혁당 재건위 8인은 1975년 — 대법원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 처형되었다. 법정이 사형을 선고했으나 죄는 조작된 것이었고, 반세기 뒤 재심 법정은 이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유신의 긴급조치는 정권 비판을 곧 범죄로 만들었고, 정보기관은 납북 귀환 어부와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고문으로 간첩으로 만들었다. 조작된 죄명 아래 사형과 무기징역이 선고되었고, 가족들의 삶까지 연좌의 그늘에 묶였다.
부랑인 단속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길에서 붙들려 시설에 감금되었다. 부산 형제복지원에서는 강제노역과 폭행 속에 수백 명이 죽어 암매장되었고, 선감도의 소년들은 바다를 헤엄쳐 도망치다 스러졌다. 국가는 이 감금을 단속 실적으로 지원했다.
신군부는 '사회악 일소'를 내걸고 재판 없이 3만 9천여 명을 검거해 전방 군부대의 '순화교육'으로 보냈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일상이었던 그곳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살아 나온 이들도 평생의 후유증을 안았다.
학생운동을 하던 청년들이 강제 징집되어 '녹화사업'이라는 이름의 사상 개조와 프락치 강요에 시달리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그 밖에도 수많은 병사가 '자살'이라 적힌 통지서 한 장으로 가족에게 돌아왔다. 유족들은 수십 년째 그 죽음의 진실을 묻고 있다.
2016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홀로 고치던 열아홉 청년이, 2018년 태안화력에서 컨베이어벨트를 홀로 점검하던 스물넷 김용균이 목숨을 잃었다. 가방 속 컵라면이 남았다. 위험은 하청으로 외주화되었고, 오늘도 어딘가에서 노동자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3년 10월, 정원을 훌쩍 넘긴 여객선이 거친 바다로 출항했다가 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구명장비는 모자랐고 관리와 감독은 어디에도 없었다 — 21년 뒤 세월호와 함께 다시 소환된 이름이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성수대교 상판 48미터가 강으로 떨어졌다. 출근길 시민과 등굣길의 무학여고 학생들이 탄 버스가 그 위에 있었다. 부실 시공과 부실 관리 — 보이지 않는 부실이 목숨을 앗는다는 것을 이 도시가 처음 배운 날이었다.
1995년 6월 29일 저녁, 서초동 삼풍백화점이 20초 만에 무너져 내렸다. 붕괴 조짐이 아침부터 나타났지만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했다 — 광복 이후 최대의 단일 건물 참사였고, 이윤이 안전 위에 놓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 자리였다.
1999년 6월 30일 새벽,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수련원 숙소에서 불이 났다. 캠프에 온 유치원생 열아홉 명과 인솔자들이 잠결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인허가 비리와 부실한 안전 관리가 드러났고, 한 유가족은 국가대표 시절 받은 훈장을 반납하고 이 나라를 떠났다.
1999년 10월 30일 밤, 축제를 마친 학생들이 모여 있던 지하 호프집에서 불이 났다. 비상구는 잠겨 있었고 무허가 영업은 단속의 바깥에 있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교복을 입던 아이들이었지만, '학생이 왜 호프집에'라는 시선이 오랫동안 추모조차 가로막았다.
2003년 2월 18일 아침, 중앙로역에 정차한 전동차에서 방화로 불이 붙었다. 불은 맞은편에 들어온 전동차로 옮겨붙었는데, 그 열차의 문은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곧 출발합니다'라는 안내방송을 믿고 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들이 희생되었다.
안전하다고 광고된 가습기살균제가 1994년부터 17년간 팔렸다. 아이의 머리맡에, 산모의 곁에 놓였던 그 물건이 폐를 굳게 만들었다. 2011년 원인이 밝혀지기까지 피해자들은 병명도 모른 채 죽어갔고, 국가의 화학물질 안전 확인 체계는 그동안 작동하지 않았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세월호가 맹골수도에서 기울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믿은 승객들은 선실에서 기다렸고, 선장과 선원들은 먼저 배를 떠났으며, 구조는 오지 않았다. 희생자 304명 중 250명이 수학여행길의 단원고 학생들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핼러윈을 앞둔 이태원의 좁은 골목에 인파가 몰렸다. 위험을 알리는 신고가 몇 시간 전부터 이어졌지만 통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골목 안에서 159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