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학 기행

1908~1945

신체시에서 옥중의 시인까지 — 식민지의 모국어로 쓴 37년

타임라인 (20개 지점)

  1. 최남선 — 「해에게서 소년에게」, 새로운 시의 첫 파도 (1908 11월 · 경성 신문관)

    열여덟 살의 최남선이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정형률을 깬 최초의 신체시로 꼽힌다. 그는 신문관을 세워 근대 출판을 개척했고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8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들어간 뒤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학 교수를 지냈고 1943년에는 도쿄까지 가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2009)에 수록된 이 행적은 한국 근대의 문을 연 공적과 함께, 나란히 기록되어야 할 사실이다.

  2. 이광수 — 『무정』,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1917 · 경성)

    이광수가 매일신보에 연재한 『무정』은 개인의 내면과 자유연애, 근대적 자아를 다룬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평가받는다. 그는 1919년 도쿄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뒤 전향해 조선문인협회 회장을 맡았고,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郎)로 창씨개명한 뒤 "조선인의 이마에서 조선을 씻어내야 한다"는 글과 학병 권유 연설로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이자 가장 뼈아픈 배신의 기록이다.

  3. 김동인과 《창조》 — 문학을 위한 문학의 선언 (1919 2월 · 도쿄, 그리고 평양)

    도쿄 유학생 김동인·주요한 등이 창간한 동인지 《창조》는 계몽의 도구가 아닌 예술로서의 문학을 선언한 첫 순문예지다. 김동인은 「감자」·「배따라기」로 한국 단편소설의 미학을 세웠고 구어체 문장과 3인칭 시점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1939년 이른바 "성전(聖戰) 종군작가"로 중국 전선에 다녀왔고 1940년대에는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글을 썼다 —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으며, 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이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다.

  4. 염상섭 —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삼대』까지 (1921 · 경성)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로 출발한 염상섭은 『만세전』(1924)에서 3·1운동 전야 식민지 조선의 숨막히는 현실을 "구더기가 들끓는 무덤"으로 그렸고, 『삼대』(1931)에서는 조부-아버지-아들 세 세대의 갈등으로 식민지 자본주의 아래 조선 사회의 축도를 완성했다. 어느 이념에도 기울지 않는 냉정한 관찰자의 눈 — 한국 사실주의 소설은 그에게서 기틀을 얻었다.

  5. 현진건 — 「운수 좋은 날」, 그리고 일장기를 지운 날 (1924 · 경성)

    인력거꾼 김첨지의 가장 운수 좋았던 하루가 가장 참혹한 하루가 되는 「운수 좋은 날」(1924)은 식민지 하층민의 삶을 반어의 미학으로 새긴 한국 단편의 고전이다. 현진건은 소설가이자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1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 펜으로도, 편집자의 가위로도 시대에 저항한 사람이다.

  6. 김소월 — 『진달래꽃』, 조선의 슬픔에 리듬을 주다 (1925 · 평안북도 정주)

    시집 『진달래꽃』은 이별과 그리움의 정서를 민요조 가락에 담아, 서양 사조를 그대로 옮기던 당대 시단과 달리 한국어 고유의 리듬으로 근대시를 세웠다. 오산학교에서 스승 김억을 만나 시를 배운 정주 출신의 이 시인은 1934년 서른두 살로 세상을 떠났지만, 「진달래꽃」·「산유화」·「초혼」은 오늘날까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남아 있다.

  7. KAPF 결성 — 문학은 무기가 될 수 있는가 (1925 8월 · 경성)

    박영희·김기진 등이 결성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은 문학을 계급 해방의 무기로 삼겠다고 선언하며 1920~30년대 문단의 한 축을 이뤘다. 「우리 오빠와 화로」의 시인 임화가 그 상징적 얼굴이었다. 두 차례 검거 사건 끝에 1935년 강제 해산됐고, 해방 후 임화는 월북했다가 1953년 북한에서 "미제 간첩"으로 몰려 처형된다 — 식민지와 분단이 한 문학 세대를 어떻게 삼켰는지 보여주는 복선으로, 이 이야기는 2부 근현대문학 기행에서 이어진다.

  8. 한용운 — 『님의 침묵』, 그리고 북향으로 지은 집 (1926 · 경성 성북동 심우장)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승려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에서 빼앗긴 "님"을 향한 사랑의 언어로 저항의 시학을 완성했다. 1933년 성북동에 지은 심우장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보지 않겠다며 일부러 북향으로 앉힌 집이다 —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그는 이 집에서 눈을 감았다. 시와 삶과 집의 방향까지 일치했던 사람이다.

  9.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6 6월 · 대구)

    《개벽》 1926년 6월호에 실린 이 시 한 편으로 잡지는 판매금지를 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국토 상실의 아픔을 이만큼 정면으로 노래한 시는 없었다. 대구의 시인 이상화는 이후에도 붓을 꺾지 않았고, 해방을 두 해 앞둔 1943년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10. 정지용 — 「향수」, 한국 현대시의 언어를 벼리다 (1927 · 충북 옥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옥천 출신 정지용의 「향수」(1927)는 감각적 이미지와 정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언어 수준을 끌어올렸다. 『백록담』(1941)에 이르는 그의 시는 청록파 등 후배 시인들의 교과서였다. 해방 후 좌익 문학 단체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이름조차 지워졌다가 1988년에야 해금됐다 — 분단이 문학사에 남긴 검열의 상처이며, 이 이야기 역시 2부로 이어진다.

  11. 강경애 — 간도에서 쓴 『인간문제』 (1934 · 북간도 용정)

    간도 용정에서 궁핍하게 살며 글을 쓴 강경애는 『인간문제』(1934)에서 농촌에서 인천 방직공장으로 흘러간 여성 노동자의 삶을 그렸다 —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기록이다. 중앙 문단과 떨어진 변경에서, 여성으로서, 그는 당대 누구보다 정직한 리얼리즘을 남겼다. 서른여덟에 병사해 오래 잊혔다가 뒤늦게 재평가된 이름이다.

  12. 심훈 — 필경사에서 쓴 『상록수』, 그리고 「그날이 오면」 (1935 · 충남 당진 필경사)

    당진의 초가 필경사(筆耕舍)에서 심훈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공모 당선작 『상록수』를 썼다 — 농촌계몽에 몸 바친 청년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생전에 발표할 수 없었던 시 「그날이 오면」에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1936년 손기정의 베를린 우승 소식에 즉흥시를 쓰고 몇 주 뒤 급서했으니, 그는 끝내 그날을 보지 못했다.

  13. 김유정 — 실레마을의 웃음과 슬픔 (1936 · 강원 춘천 실레마을)

    고향 실레마을을 무대로 「봄봄」(1935)·「동백꽃」(1936)을 쓴 김유정은 해학과 토속어의 작가다 — 웃기는 이야기의 바닥에는 소작농의 가난과 무지가 깔려 있어, 웃고 나면 서늘해진다. 등단 2년 만에 30편 가까운 단편을 쏟아내고 1937년 스물아홉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그의 이름을 딴 김유정역은 사람 이름이 붙은 한국 최초의 기차역이다.

  14. 이상 — 「날개」, 식민지 모더니즘의 극한 (1936 · 경성, 그리고 도쿄)

    조선총독부 건축 기수 출신의 이상은 연작시 「오감도」(1934)로 독자들의 항의 속에 연재가 중단되는 스캔들을 일으켰고, 「날개」(1936)에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의 독백으로 식민지 지식인의 분열된 내면을 그렸다. 다방 제비를 운영하며 경성 모더니즘의 아이콘이 됐던 그는 1937년 도쿄에서 사상불온 혐의로 구금됐다 풀려난 직후 스물일곱에 객사했다 — 한국 문학이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 실험이 거기서 멈췄다.

  15. 백석 — 『사슴』, 100부의 전설 (1936 1월 · 함흥, 그리고 만주)

    정주 출신 백석이 자비로 100부만 찍은 시집 『사슴』은 평안도 방언과 토속 음식, 공동체의 기억을 시에 새겨넣었다 — 표준어의 시대에 사투리로 쓴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를 거쳐 만주를 유랑하며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같은 절창을 남겼고, 해방 후 고향에 남아 분단과 함께 남쪽에서 금지된 이름이 됐다. 1988년 해금 이후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돌아온 그의 이야기도 2부로 이어진다.

  16. 채만식 — 『탁류』의 풍자, 그리고 『민족의 죄인』의 고백 (1937 · 전북 군산)

    쌀이 실려 나가던 항구 군산을 무대로 한 『탁류』(1937~38)와 『태평천하』(1938)에서 채만식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타락을 반어와 풍자로 해부했다. 그러나 그 역시 1940년대 친일 소설과 시국 강연에 나섰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다른 점은 그 이후다 — 해방 후 『민족의 죄인』(1948~49)에서 그는 자신의 훼절을 문인 중 거의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해부했다. 과(過)를 지울 수는 없지만, 과를 스스로 마주한 기록으로 함께 남는다.

  17. 서정주 — 『화사집』의 재능, 친일과 권력 찬양의 기록 (1941 · 전북 고창)

    고창 질마재 출신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1941)은 생명파의 관능적 언어로 한국 시사에 뚜렷한 재능을 새겼고, 그의 시적 영향력은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행적의 기록은 무겁다 —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창씨개명하고 가미카제 조선인 대원을 찬양하는 「마쓰이 오장 송가」(1944) 등 친일 작품을 썼으며(친일인명사전 수록), 해방 후에도 1980년 방송에서 신군부의 광주 진압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1987년에는 전두환의 56회 생일에 "처음으로"라는 찬양 축시를 바쳤다. 일제·독재를 가리지 않고 반복된 권력 찬양은 그의 시적 성취와 함께, 있는 그대로 기록되어야 할 사실이다.

  18. 이육사 — 「광야」의 시인, 베이징 감옥에서 지다 (1944 1월 · 베이징)

    안동 출신 이원록은 대구형무소 수인번호 264를 필명으로 삼았다 — 이육사. 의열단에 가입해 열일곱 차례 투옥되면서도 「절정」·「청포도」·「광야」를 썼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시와 무장투쟁이 한 몸이었던 그는 1944년 1월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시인이자 전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온전한 저항의 이름이다.

  19. 윤동주 — 후쿠오카 형무소, 해방 반년 전 (1945 2월 16일 · 후쿠오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북간도 명동촌에서 나고 연희전문에서 시를 쓴 윤동주는 1943년 교토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해방을 여섯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물여덟에 옥사했다.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그의 원고는 벗들의 손에 살아남아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세상에 나왔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저항이 되는 시 — 근대문학은 이 젊은 죽음으로 가장 순정한 마지막 페이지를 얻었다.

  20. 해방 — 되찾은 모국어, 그러나 갈라지는 문단 (1945 8월 · 경성)

    1945년 8월, 조선어로 쓰고 조선어로 출판할 자유가 돌아왔다. 그러나 해방 다음 날 임화가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문단은 곧장 좌우로 갈라졌고, 월북과 월남, 재북과 잔류의 선택이 문인들의 운명을 갈랐다 — 백석은 북에 남았고 정지용의 이름은 남에서 지워진다. 되찾은 모국어가 반쪽 난 이야기, 그리고 그 폐허에서 다시 자라난 문학의 이야기는 2부 「근현대문학 기행」(근현대 지도)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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