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만행 루트 — 50년의 가해 기록

1895~1945

경복궁에서 하얼빈까지, 상하이에서 마이즈루 앞바다까지 — 제국이 저지른 범죄의 무대들

타임라인 (18개 지점)

  1. 을미사변 — 명성황후 시해 (1895 10월 8일 · 한성 경복궁 건청궁)기와지붕 건물들이 마당을 둘러싼 건청궁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경복궁 건청궁 · 사진 Royal Palaces and Tombs Center · 공공누리 제1유형 · 위키미디어 공용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 건청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한 나라의 국모를, 그것도 왕궁 안에서 외국 자객들이 살해한 전례 없는 만행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반세기에 걸친 일본 제국의 조선 침탈과 국가 폭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 제암리 학살 사건 (1919 4월 15일 · 경기 수원(화성) 제암리)스코필드와 이승만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흑백 사진스코필드와 이승만, 1958년 · 사진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3·1운동이 확산되자 일본 군경이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 안에 몰아넣고 문을 잠근 뒤 총격을 가하고 불을 질러 20여 명을 학살했다. 인근 수촌리에서도 비슷한 방화·학살이 있었다.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현장을 사진으로 남겨 국제 사회에 알렸고, 이는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잔혹한 진압 실상을 세계에 폭로한 대표적 증거가 됐다.

  3. 간도 참변(경신참변) (1920 10월 · 간도 전역)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이 그 보복으로 간도 일대 조선인 마을을 무차별 습격했다. 독립군과 무관한 민간인 수천 명이 학살되고 마을 전체가 불탔다. 훈춘 마적을 매수해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한 뒤 이를 구실로 대군을 투입한 훈춘사건이 이 참변의 발단이 됐다 — 자작극으로 침공의 명분을 만든 전형적 사례다.

  4.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 9월 1일 · 도쿄·요코하마 일대)나무에 둘러싸인 검은 비석과 꽃이 놓인 추도비요코아미초공원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 사진 Hotsuregua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

    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방화를 저지른다"는 유언비어가 퍼지자 일본 군경과 자경단이 조선인을 색출해 학살했다. 최소 수천 명(추정치는 6,000명 이상까지 제기됨)이 죽창과 몽둥이, 총으로 살해됐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이 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진상조사나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

  5. 731부대 — 관동군 방역부 발족 (1936 · 하얼빈)군복에 안경을 쓴 이시이 시로 흑백 인물사진이시이 시로, 1932년 · 사진 Masao Takezawa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세균전 연구를 위한 관동군 방역부가 하얼빈에 설치됐다. 이시이 시로가 이끈 이 부대는 훗날 731부대로 불리며 조선인과 중국인 포로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의 거점이 된다. "방역"이라는 이름 뒤에 인류사에 남을 전쟁범죄가 준비되고 있었다.

  6. 알뜨르 비행장 — 제주 군사화의 시작 (1937 · 제주 대정면 모슬포(알뜨르))넓은 들판 위에 낮게 엎드린 콘크리트 비행기 격납고제주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김계호 (공공누리 제1유형)

    중일전쟁 수행을 위해 제주 모슬포 일대에 대규모 군용 비행장을 건설했다. 중국 난징 공습에 나선 폭격기들이 이곳에서 발진했다. 제주도민들은 강제 동원돼 활주로와 격납고 건설 노역에 시달렸다. 평화로운 섬이 제국의 침략전쟁을 위한 최전방 병참기지로 바뀐 시작점이었다.

  7. 노구교 사건 — 중일전쟁 발발 (1937 7월 7일 · 베이핑(베이징) 루거우차오)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주변 마을을 하늘에서 찍은 흑백 정찰사진루거우차오(노구교), 1937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 총격이 발생한 것을 구실로 일본이 전면적인 중국 침략을 개시했다. 조작 논란이 큰 이 작은 충돌이 이후 8년간 이어지는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조선은 이 전쟁의 병참기지로 전락하며 인력·물자 수탈이 급격히 심해진다.

  8. 일본군 위안부 — 성노예 제도의 본격화 (1937 12월 · 상하이(점령지 위안소))의자에 앉은 소녀 청동상 뒤로 일본대사관 건물이 보이는 거리서울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2012년 · 사진 Sakaori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

    중일전쟁이 확대되며 일본군은 점령지마다 "위안소"를 설치하고 조선인 여성을 비롯한 수만~수십만 명을 취업 사기, 협박, 강제 연행 등으로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다. 피해자 중 상당수가 10대였다. 일본 정부는 오랫동안 민간 업자의 소행이라 주장했으나, 이후 발굴된 일본군 공문서를 통해 군이 직접 위안소를 설치·관리·통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공개 증언 이후에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이고 법적인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9. 731부대 — 핑팡 시설과 생체실험 (1939 · 하얼빈 핑팡(731부대 본부))네모난 건물 단지를 하늘에서 내려다본 흑백 사진하얼빈 핑팡 731부대 시설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하얼빈 핑팡에 대규모 세균전 연구시설이 완공됐다. 조선인과 중국인, 러시아인 포로들이 "마루타(통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생체 해부, 세균 감염 실험, 동상 실험 등에 강제로 동원돼 살해됐다. 희생자 수는 최소 3,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살아서 이 시설을 나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0. 국민징용령 — 강제동원의 법적 근거 (1939 10월 · 조선총독부(경성))돔을 얹은 거대한 석조 건물인 옛 조선총독부 청사 사진조선총독부 청사, 1929년 · 사진 門田房太郞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국민징용령이 조선에 적용되며 노동력 강제동원이 법적 강제력을 갖추게 됐다. 이후 수백만 명의 조선인이 탄광·군수공장·비행장 건설 현장으로 끌려갔다. "모집"이나 "관 알선"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질은 강제였고, 거부하면 처벌이 뒤따랐다.

  11. 사할린 조선인 강제동원 시작 (1939 · 남사할린(탄광 지대))

    탄광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 수만 명이 남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됐다. 광복 후에도 이들은 소련 영토가 된 사할린에 발이 묶여 오랫동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 일본은 자국민만 먼저 귀환시키고 조선인 노동자들은 그대로 남겨뒀다. 사할린 한인 상당수는 평생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로 살았다.

  12. 학병제 시행 — 학생들의 강제 징집 (1943 10월 20일 · 경성)아파트 단지 옆 산자락에 계단식으로 들어선 회색 기념관 건물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부산관광공사 (공공누리 제1유형)

    전문학교·대학 재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까지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집해 일본군으로 전선에 내보냈다. 형식은 지원이었지만 거부한 학생과 그 가족에게는 갖은 불이익과 감시가 뒤따랐다. 이때 끌려간 학병 중 상당수가 훗날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13. 군함도(하시마) 탄광 강제징용 (1943 · 나가사키 하시마섬(군함도))바다 위에 콘크리트 건물이 빽빽이 들어찬 하시마섬을 하늘에서 본 모습나가사키 하시마섬(군함도) · 사진 kntrty · CC BY 2.0 · 위키미디어 공용

    나가사키 앞바다의 작은 섬 하시마(군함도) 해저 탄광에 조선인 노동자 수백~수천 명이 강제로 끌려가 열악한 환경에서 채굴 노동에 시달렸다. 섬 자체가 감옥이나 다름없어 탈출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2015년 일본은 이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며 강제노동의 역사를 알리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지만, 실제 전시에서는 그 사실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아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14. 여자정신근로령 — 여성 강제동원의 법제화 (1944 8월 23일 · 조선총독부(경성))

    12세부터 40세까지 미혼 여성을 군수공장 등에 강제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됐다. "일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선전으로 많은 소녀들이 동원됐으나 실제로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렸고, 일부는 위안부로 전용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는 법적으로 별개의 제도였지만, 현실에서는 그 경계가 자주 무너졌다.

  15. 결7호작전 — 제주를 본토결전 최전선으로 (1945 2월 · 제주(모슬포·송악산·수월봉 일대))풀 덮인 해안 언덕 아래 뚫린 동굴 입구와 안내 비석제주 송악산 일제 진지동굴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김지호 (공공누리 제1유형)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군은 제주도를 본토 방어의 최전선으로 삼는 결7호작전을 수립했다. 제주도 전역에 갱도 진지와 자살특공(가미카제) 기지를 구축하며 6만여 명의 일본군을 주둔시켰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 수만 명이 진지 구축 노역에 강제 동원됐다. 다행히 본토결전은 실행되지 않았지만, 이때 만들어진 군사 시설과 주둔 병력의 존재는 훗날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진압의 하부 구조로도 이어진다.

  16. 731부대 해체 — 그리고 미국의 면책거래 (1945 8월 · 하얼빈 핑팡 → 도쿄)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ar East 간판이 걸린 법정 건물 정면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 이치가야 법정, 1946년 · 사진 『秘録 大東亜戦史 東京裁判篇』昭和28年11月30日発行、富士書苑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패전이 임박하자 731부대는 생체실험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설을 폭파하고 살아남은 마루타(실험 대상자)들까지 모두 살해했다. 그러나 부대장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관련자 대부분은 전범 재판에 서지 않았다 — 미국이 세균전 연구 자료를 넘겨받는 대가로 이들의 전범 기소를 면제해주는 비밀 거래를 맺었기 때문이다. 인류 최악의 생체실험 책임자들이 그렇게 법의 심판을 피해 갔다.

  17. 해방 직전 제주 — 끝내 터지지 못한 전장 (1945 8월 · 제주 섯알오름)

    결7호작전으로 구축된 갱도 진지와 탄약고 등 군사시설을 남긴 채 일본군은 항복과 함께 철수했다. 본토결전이 벌어지지 않아 직접적인 전투 피해는 면했지만, 일본군이 남긴 탄약고 터는 훗날 1950년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 정부에 의한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의 현장이 된다. 일제가 만든 군사 시설이, 광복 후에는 자국 정부에 의한 또 다른 학살의 무대가 된 셈이다.

  18. 우키시마호 침몰 — 귀국길의 비극 (1945 8월 24일 · 마이즈루 앞바다(교토))항구에 정박한 큰 배를 옆에서 찍은 흑백 사진우키시마마루, 1942년 · 사진 福井静夫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광복 직후, 강제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 수천 명을 태우고 아오모리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예정 항로를 벗어나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일본은 미군 기뢰에 의한 触雷(촉뢰)라고 발표했으나, 고의 폭침 의혹이 오랫동안 제기돼 왔다. 공식 발표로도 500명 이상이 숨졌지만 실제 승선 인원조차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희생자 규모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길에서마저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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