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미록 루트

1591~1601

곡식 받으러 떠난 남행이 9년 3개월의 피란이 됐다 — 한양에서 장수·홍주·임천·평강, 다시 한양까지

타임라인 (15개 지점)

  1. 한양을 떠나다 — 몇 달이면 돌아올 남행 (1591 11월 27일 · 한양)

    그때 나라는: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보고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를 함께 올려 조정이 갈라져 있었다. 남쪽에 성을 고치라는 명이 내려갔지만 백성의 원망이 컸다. 이 사람은: 쉰셋의 오희문이 종 둘을 데리고 한양 집을 나섰다. 장수 현감으로 부임한 처남과 영암에 사는 누이를 보고, 장흥과 성주의 노비들에게 한 해 신공을 받아 올 참이었다. 과거에 붙지 못해 벼슬이 없는 그에게 신공은 살림의 핵심이었다. 이날부터 그는 하루하루를 적기 시작했다.

  2. 영동 외가 — 어린 시절의 땅에 술을 올리다 (1591 12월 · 충청도 영동)

    그때 나라는: 조선 중기까지 사위가 처가에 들어가 사는 혼인이 흔했다. 오희문의 아버지도 처가살이를 했고,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을 외가인 영동에서 보냈다. 이 사람은: 남행길에 외가에 들러 외할아버지 산소에 술을 올렸다. 아직 전쟁은 없었다. 친척 얼굴 보고 곡식 받아 오면 끝날 여행이었다.

  3. 장수에서 들은 소식 — 왜선 수백 척이 부산에 (1592 4월 16일 · 전라도 장수)

    그때 나라는: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진과 동래성이 잇달아 무너지고, 스무 날 만에 한양이 점령됐다.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북으로 떠났다. 이 사람은: 처남의 집에 머물던 그에게 4월 16일 소식이 닿았다. 가족은 전부 한양에 있었고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길 한가운데를 왜군이 막고 있었다. 대신 그는 관아에 드나드는 파발과 공문의 내용을 날마다 받아 적기 시작했다. 누가 어디서 들었는지까지.

  4. 산으로 숨다 — 왜군이 전라도로 (1592 7월 · 장수 인근 산속)

    그때 나라는: 6월 왜군이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내려왔고 7월 초 무주까지 들어와 장수와 금산을 쳤다.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 사람은: 처남의 가족, 고을 아전들과 함께 산속 옛 절터와 암자로 숨어 들어가 여러 달을 버텼다. 비가 오면 짐이 젖고 길이 막히면 곡식이 끊겼다. 그 와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실제로 싸우는 의병장은 높이 평가했지만, 이름만 걸고 관청 곡식을 축내는 자들은 가차 없이 적었다. 어느 의병이 왜군 목이라며 바친 수급이 살해당한 조선 백성의 머리였다는 대목도 여기 있다.

  5. 가족을 다시 만나다 — 홍주의 피란살이 (1593 · 충청도 홍주(홍성))

    그때 나라는: 1593년 초 명군이 평양성을 되찾고 왜군은 한양에서 물러나 남해안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한양은 잿더미였고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이 많았다. 이 사람은: 전쟁이 난 지 한 해 가까이 지나서야 가족의 피란처를 알아내 노모와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만났다. 살아서 얼굴을 본 것만으로 기적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갈 수는 없어 온 가족이 충청도 홍주에서 피란살이를 시작했다. 먹여야 할 입이 열 명이 넘었다. 그해 봄 집안에 전염병이 돌아 그 자신도 석 달 가까이 앓았고, 그 무렵 일기는 비어 있다.

  6. 노비가 상전 위에 올랐다 — 도주와 파업 (1593 · 충청도 홍주)

    그때 나라는: 전쟁으로 관아의 힘이 약해지자 도망친 노비를 잡아올 방법이 없어졌다. 법이 멈추자 양반의 명령보다 도망칠 기회가 더 강해졌다. 이 사람은: 사내종 둘이 말 한 필에 양식과 살림 도구를 싣고 밤사이 달아났다. 그 말은 피란길에 노모를 태울 유일한 수단이었다. 더 놀라운 일은 집 안에서 벌어졌다. 여종 하나가 밥을 똑같이 나눠 주지 않는다며 솥에 불을 지피지 않겠다고 드러누웠다. 양반이라면 매를 들어야 정상인데 그는 베를 내주며 달랬다. 밥 지을 사람이 없으면 온 식구가 굶었으니까. 그날 일기에 그는 노비가 상전 위에 올랐다고 적었다.

  7. 구원군의 얼굴 — 장터의 명나라 군사 (1593 · 충청도 장터)

    그때 나라는: 명은 조선의 동맹이자 상국이었고, 평양을 되찾은 것도 명군의 힘이 컸다. 그러나 명군을 먹이고 접대하는 짐은 고을과 백성에게 떨어졌다. 이 사람은: 장터에서 그는 명나라 군사가 소금 장수의 말을 빼앗으려다 실패하자 아무 상관없는 조선 사람을 결박해 매질하고 술과 꿀과 병아리를 내놓으라 하는 것을 보았다. 고을 현감조차 그들 앞에서 손을 쓰지 못했다. 그는 왜군을 물리쳐 주기를 바라면서도 이 횡포를 빠짐없이 적었다. 구원자와 수탈자가 한 얼굴에 겹쳐 있었다.

  8. 임천으로 — 술과 떡을 팔아 식구를 먹이다 (1593 7월 · 충청도 임천(부여))

    그때 나라는: 왜군이 남해안에 성을 쌓고 눌러앉은 사이 명과 일본의 강화 교섭이 길게 이어졌다. 전선은 멎었지만 백성의 살림은 무너져 있었다. 이 사람은: 가족은 임천으로 옮겼다. 조선 사대부로서는 체면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이 여기서 시작됐다. 노비들을 시켜 술과 떡을 빚어 장에 내다 팔게 하고, 아내는 떡을, 딸들과 여종들은 행전을 만들었다. 술을 좋아하면서 자기는 한 잔 마시지 못했다. 종이 팔아 온 쌀을 되질해 보고 한 말이 모자란다며 괘씸해하는 대목도 있다. 그 한 말이 겨울을 좌우하던 시절이었다.

  9. 거지가 안 보인다 — 굶어 죽은 것이었다 (1594 4월 3일 · 충청도 임천)

    그때 나라는: 전쟁 이듬해부터 조선 전역에 큰 기근이 들었다. 농사가 두 해 끊긴 데다 군량 징발까지 겹쳐 길가에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했다. 이 사람은: 요즘 마을에 거지가 안 보인다는 말을 듣고 보니 두어 달 사이 대부분 굶어 죽은 것이었다.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육촌까지 죽여 먹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는 이러다 사람의 씨가 마르겠다고 적었다. 다만 이것은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분명히 밝혔다. 직접 본 것은 따로 있었다. 길가에 주저앉아 우는 아이와 여인. 셋이서 구걸해도 얻는 것이 없자 남편이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 가 버린 것이었다.

  10. 굴뚝과 땅굴 — 송노와 분개가 달아나다 (1595 9월 · 충청도 임천)

    그때 나라는: 임천에서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해였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며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적을 만큼 살림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이 사람은: 사내종 송노가 달아났다. 일이 싫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나눈 상대가 같은 집 사내종 막정의 아내 분개였기 때문이다. 부부는 분개를 안방에 가두고 지키게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잠긴 방 주변이 온통 파헤쳐져 있었다. 송노가 밤사이 돌아와 굴뚝으로 들어가려다 막히자 마구간 바닥에서 분개의 방 밑으로 땅굴을 판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달아났고, 오희문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적었다.

  11. 막정의 죽음 — 서른일곱 해를 일한 사람 (1595 12월 · 충청도 임천)

    그때 나라는: 노비는 사람이면서 재산이었다. 아프면 약을 주었지만 명을 거부하면 매를 들었고, 죽으면 관을 마련해 주는 것이 드문 대우였다. 이 사람은: 아내가 동료와 달아난 뒤 막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일을 거부하고 도망갈 짐까지 꾸렸지만 병이 깊어 멀리 갈 수 없었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그해 겨울 그는 세상을 떠났다. 오희문은 원망하면서도 서른일곱 해를 떠올렸다. 관을 마련해 묻고 제사까지 지내 주었다. 같은 사건이 세 사람에게 다르게 새겨졌다. 송노에게는 사랑, 막정에게는 삶의 붕괴, 오희문에게는 배신.

  12. 막내딸 단아 — 말 한마디 못 하고 (1597 2월 1일 · 충청도 임천)

    그때 나라는: 강화 교섭이 깨지고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말이 돌던 겨울이었다. 그해 정유재란이 터진다. 이 사람은: 피란길 내내 아버지의 마음을 붙들어 주던 막내딸 단아가 밤부터 두통을 앓다가 이튿날 낮 말 한마디 못 하고 떠났다. 그는 붙들고 통곡했지만 한없는 슬픔을 어찌하겠느냐고 적었다. 2년 뒤 이 아이는 자색 저고리를 입고 아버지의 꿈에 나타나 먹을 것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그날 부부는 등불 아래 마주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13. 아들의 급제 — 이제부터는 내 아들이 아니다 (1597 3월 · 충청도 임천)

    그때 나라는: 전쟁 중에도 과거는 계속됐다. 나라에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문과 급제자는 나라가 부르면 어디든 가야 했다. 이 사람은: 성균관에서 사람이 방목을 들고 나팔을 불며 찾아왔다. 평강 현감으로 있던 맏아들 오윤겸이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기쁨 뒤에 바로 걱정이 붙었다. 그는 한 몸을 나라에 맡겼으니 이제부터는 내 아들이 아니라고 적었다. 아들의 성공이 곧 긴 이별의 시작이었다. 이 아들은 훗날 영의정에 오른다.

  14. 평강 — 문밖에 서서 아들의 흰옷을 보다 (1598 5월 · 강원도 평강)

    그때 나라는: 정유재란이 한창이었다. 그해 겨울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하고 왜군이 물러나며 7년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명군은 이듬해까지 남아 고을을 괴롭혔고, 환갑을 맞은 그는 예순 나이에도 늘 배고픔 속에 산다고 적었다. 이 사람은: 가족은 아들이 현감으로 있는 평강으로 옮겼다. 봄에 새 벌통을 옛 벌통 옆에 놓았다가 두 무리가 싸워 죽은 벌이 한 됫박이나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5월 아들이 황해도로 떠나던 날, 그는 문밖에 서서 아들의 흰옷이 숲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고 산을 넘어 아주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서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15. 한양으로 — 종이가 다했으니 붓을 그친다 (1601 2월 27일 · 한양)

    그때 나라는: 전쟁이 끝난 지 두 해. 한양은 아직 불탄 궁궐 그대로였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떠나기 직전 6년 동안 사라졌던 송노와 분개가 다시 나타났다. 부부처럼 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둘이나 낳아 있었고, 송노는 옛 주인을 찾아와 엎드렸다. 오희문은 뜻밖에도 그를 다시 받아들였다. 자유를 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2월 27일 한양으로 돌아와 마지막 장을 덮었다. 종이도 다 되었고 더는 떠돌지 않으니 붓을 그친다고. 승리도 자랑도 없는, 이 사람다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남은 일곱 책 800여 장은 1991년 보물이 됐고 지금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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