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주요 전투 — 38선에서 판문점까지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다부동 — 3년 1개월, 한반도 전역을 휩쓴 전선의 기록
타임라인 (15개 지점)
- 6·25전쟁 발발 — 북한군의 전면 남침 (1950 6월 25일 · 38선 전역)
전쟁 직전 서울 한국은행 앞 거리, 1950년 6월 · 사진 USAG- Humphreys · CC BY 2.0 · 위키미디어 공용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소련제 전차를 앞세워 38선 전 전선에서 기습 남침했다. 국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내주었고, 전쟁은 3년 넘게 한반도 전역을 휩쓸게 된다.
- 다부동 전투 —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저지선 (1950 8월 3일 · 경북 칠곡 다부동)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 야외 전시장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김지호 (공공누리 제1유형)국군 1사단(백선엽)과 미 27연대(마이켈리스 대령)가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의 파상 공세를 약 한 달간 막아냈다 — 1사단이 유학산·수암산 등 좌우 고지를, 미군이 도로와 계곡("볼링장") 축선을 맡는 한미 협동 방어전이었다. 이곳이 뚫리면 대구, 나아가 부산까지 위험해지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저지선이었다. 병력 손실을 감수한 사투 끝에 방어선을 지켜냈고, 이는 곧이어 벌어질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을 시간을 벌어줬다.
- 인천상륙작전 — 전세를 뒤집다 (1950 9월 15일 · 인천)
인천 레드비치의 상륙함(LST), 1950년 9월 15일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상륙에 불리하다는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상륙작전. 성공 확률이 낮다는 평가를 뒤엎고 성공하며 전세를 단숨에 뒤집었다. 낙동강까지 밀렸던 전선이 순식간에 북상하기 시작했다.
- 서울 수복 — 석 달 만의 귀환 (1950 9월 28일 · 서울)
서울 미국 영사관에 국기를 올리는 미 해병, 1950년 9월 27일 · 사진 U.S. Marines (Official Marine Corps Phot…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로 진격해 중앙청에 태극기를 다시 게양했다. 6월 28일 함락된 지 꼭 석 달 만이었다. 그러나 서울을 되찾은 기쁨 뒤에는, 인민군 점령기 동안 부역 혐의로 몰린 시민들에 대한 또 다른 보복이 뒤따르게 된다.
- 평양 탈환과 북진 — 압록강까지 (1950 10월 19일 · 평양)
평양에서 북진하는 호주군 3대대, 1950년 10월 26일 · 사진 Hobson, Phillip Oliver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계속 북진해 압록강 인근까지 진출했다. 통일이 눈앞에 온 듯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북진이 중국의 참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 중공군 참전 — 전쟁의 국제화 (1950 11월 25일 · 압록강 인근(운산·온정리))
중국인민지원군 보병 분대, 1952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압록강까지 진출한 유엔군 앞에 대규모 중국인민지원군이 나타나 대공세를 펼쳤다. 통일을 눈앞에 뒀다고 여겨지던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져 총퇴각이 시작됐다. 한국 내전으로 시작된 전쟁이 미국과 중국이 직접 맞붙는 국제전으로 완전히 성격을 바꾼 순간이었다.
- 장진호 전투 — 영하 30도, 포위망을 뚫다 (1950 11월 27일 · 함경남도 장진호)
장진호 일대를 빠져나오는 미 해병 1사단 행렬, 1950년 · 사진 Photo by Corporal Peter McDonald, USMC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 일대에서 압도적 수의 중공군에게 포위됐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혹한 속에서 총기가 얼어붙고 동상으로 죽어가는 병사가 속출했다. 미 해병대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뿐"이라는 말을 남기며 포위망을 뚫고 흥남까지 철수에 성공했지만, 희생은 막대했다.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 흥남 철수 — 10만 명을 실은 마지막 배 (1950 12월 15일 · 함경남도 흥남항)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른 흥남 피란민, 1950년 12월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중공군의 대공세로 육로 퇴각이 막히자 유엔군과 피란민이 흥남항에서 배로 철수했다.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정원을 훨씬 초과한 피란민을 태우고도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 거제도까지 항해했다.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이 철수 작전으로 목숨을 건졌다.
- 1·4 후퇴 — 서울 재함락 (1951 1월 4일 · 서울)
폭파 직전 한강 다리를 건너 철수하는 미군 전차, 1951년 1월 4일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중공군의 남하를 막지 못하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후퇴했다. 석 달 전 되찾았던 수도를 또 한 번 잃은 것이다. 시민들은 한겨울 혹한 속에서 두 번째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 지평리 전투 — 중공군의 남하를 멈추다 (1951 2월 13일 · 경기 양평 지평리)
미 육군 포스터 그림 〈지평리 돌파〉 · 사진 U.S. Army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미 2사단 23연대와 프랑스 대대가 지평리에서 포위된 채 사흘간 중공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냈다. 후퇴만 거듭하던 유엔군이 처음으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정면에서 격퇴한 전투로, 전선이 다시 안정되는 전환점이 됐다.
- 현리 전투 — 국군 3군단의 붕괴 (1951 5월 16일 · 강원 인제 현리)
중공군의 춘계 공세 앞에 국군 3군단이 현리 일대에서 지휘 체계가 무너지며 궤멸적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국군 단독 작전의 한계를 뼈아프게 드러낸 전투로, 이후 국군 군단급 작전은 유엔군 지휘 체계에 더 긴밀히 편입된다.
- 백마고지 전투 — 주인이 열 번 바뀐 고지 (1952 10월 6일 · 강원 철원(395고지))
철원 백마고지 전승비와 위령비 · 사진 acrofan.com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국군 9사단과 중공군이 철원의 395고지를 열흘간 주고받으며 뺏고 빼앗겼다. 포격으로 고지 능선이 하얗게 패어 백마(白馬)가 누운 모습 같다 해서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군이 최종적으로 고지를 지켜내며 정전을 앞둔 고지전의 상징적 승리로 기록됐다.
- 저격능선 전투 — 고지전의 소모전 (1952 10월 14일 · 강원 철원(오성산 일대))
삼각고지(상감령) 전투의 중국군, 1952년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백마고지와 거의 같은 시기, 인근 저격능선에서도 국군과 중공군이 42일간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벌였다. 정전 회담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동안, 전선은 몇 개의 고지를 두고 끝없이 뺏고 빼앗기는 참호전으로 굳어져 있었다.
- 금성 전투 — 정전을 며칠 앞둔 최후의 공세 (1953 7월 13일 · 강원 김화(금성 일대))
철원 김화 칠성전망대에서 본 휴전선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한반도관광센터 비켄 (공공누리 제1유형)정전협정 서명을 불과 2주 앞두고 중공군이 국군 담당 전선인 금성 돌출부를 대규모로 공격했다. 정전 후 국경선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확정 짓기 위한 마지막 영토 다툼이었다. 이 전투로 남한은 금성천 이북의 상당 지역을 내주게 됐고, 이는 오늘날 휴전선의 굴곡진 모양으로 남아 있다.
- 정전협정 — 끝나지 않은 전쟁 (1953 7월 27일 · 판문점)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 1953년 7월 27일 · 사진 U.S. Department of Defense (F. Kazukaiti…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유엔군과 북한군·중공군 사이에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 없는 휴전에 반대해 서명을 거부했다. 3년 1개월간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은 종전이 아니라 정전으로 멈췄다 — 오늘날까지 한반도는 법적으로 여전히 전쟁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