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일기 루트

1636~1640

성 안에 47일이 있었다면 성 밖에는 4년이 있었다 — 예순셋 안주인이 눈을 녹여 마시며 한글로 적은 피란길

타임라인 (13개 지점)

  1. 닫히는 성문에서 나온 편지 — 짐 챙길 생각도 말고 떠나라 (1636 12월 · 한양)

    그때 나라는: 청이 국호를 바꾸고 신하의 예를 요구했으나 조정은 거부했다. 12월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성을 지나쳐 달려 열흘 만에 한양 근교에 닿았고, 강화도 길이 끊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 행렬에 남이웅이 있었다. 이 사람은: 집에 남은 어른은 예순셋 안주인 조애중 하나였다. 성문이 닫히기 직전 남편의 급보가 도착했다. 짐 챙길 생각도 말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떠나라는 것. 목숨만 건지라는 뜻이었다. 그는 동서와 조카며느리들, 종들을 이끌고 대문을 나섰다. 챙긴 것은 양식을 담은 쌀궤 하나였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하루를 한글로 적기 시작했다.

  2. 화성과 평택 — 소문이 사람보다 빨리 달렸다 (1636 12월 · 경기 화성·평택)

    그때 나라는: 청 기병은 조선의 방어선을 우회해 남쪽까지 흩어져 내려왔다. 길은 온통 피란민이었고 어느 길목에 적이 나타났다는 말이 확인되지 않은 채 번졌다. 이 사람은: 남편이 가리킨 곳은 충청도였지만 일기에 남은 지명은 그 길이 아니다. 화성과 평택을 지나 남쪽으로 낯선 고을 이름이 줄줄이 이어진다. 남편이 정해 준 길조차 이미 갈 수 없는 길이었던 것이다.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소문이 가리키는 방향의 반대로 걷는 수밖에 없었다.

  3. 상자를 땅에 묻고, 배에서 밤을 지내다 (1636 12월 · 충청도 신창·당진)

    그때 나라는: 정묘호란 때 한 번 겪은 일이라 사람들은 청군이 어디까지 오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남쪽으로, 더 바다 쪽으로 움직였다. 이 사람은: 가지고 나온 상자를 땅에 묻어야 한 날이 있었고, 잘 곳이 없어 물 위에 뜬 배에서 밤을 지낸 날도 있었다. 한겨울 강바람 속의 배라니, 예순셋 몸으로는 하룻밤도 버거운 일이었다. 한겨울에 밤새 길을 걷고, 길이 엇갈려 가족과 종을 찾아 헤맨 일도 적혀 있다.

  4. 무인도 죽도 — 눈을 녹여 마시고 대나무로 집을 얽다 (1637 1월 · 충청도 보령 앞바다 죽도)

    그때 나라는: 청군은 말 위에서 싸우는 기병이었고 말은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뭍이 뚫린 이상 백성이 숨을 곳은 섬뿐이었다. 이 사람은: 배를 대고 오른 곳이 사람이 살지 않는 죽도였다. 우물이 없으니 눈을 긁어 녹여 마셨고, 집이 없으니 연장 하나 없이 맨손으로 대나무를 베어 두 칸짜리 막을 얽었다. 그 안에 열네 사람이 생 댓잎을 바닥에 깔고 지냈다. 아침에는 물가에 내려가 지어 간 찬밥을 몇 숟가락씩 나눠 먹었다. 대감집 마님과 종들이 한 그릇을 숟가락으로 나누는 풍경이다. 전쟁은 밥그릇 앞에서 신분을 지웠다.

  5. 섬으로 들려온 소식 — 강화도 함락, 그리고 삼전도 (1637 1월 30일 · 서울 송파(삼전도))

    그때 나라는: 강화도가 함락되고 1월 30일 인조가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47일 농성의 끝이었다. 이 사람은: 그는 성 안의 일을 몰랐다. 소식은 며칠씩 늦게, 그것도 소문의 형태로 섬까지 왔다. 우리가 아는 병자호란과 이 사람이 겪은 병자호란 사이에는 시차가 있었다. 오랑캐는 물에 약하다던 믿음이 깨졌다는 것은, 섬이라고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6. 전쟁이 끝났는데 남편은 더 먼 곳으로 — 심양 (1637 2월 · 심양(선양))

    그때 나라는: 항복 조건에는 땅도 은도 아닌 사람이 들어 있었다. 소현세자를 볼모로 심양에 보내라는 것이었고, 모시고 갈 신하가 필요했다. 같은 길 위를 밧줄에 묶여 걸어간 백성이 수만에서 수십만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수는 지금도 모른다. 이 사람은: 그 호종 명단에 남이웅의 이름이 올랐다. 47일을 성에서 버틴 예순 중반의 노대신이 집에 들를 새도 없이 만주로 떠난 것이다. 성문 하나였던 부부 사이가 이제 압록강 너머 천 리로 벌어졌다.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와 남편이 끌려갔다는 절망이 한꺼번에 닥쳤다.

  7. 친척집 곁방살이 — 여산의 손윗동서 (1637 · 전라도 여산(익산))

    그때 나라는: 전쟁 직후의 사회는 어수선했다. 도적이 들끓어 재산을 모조리 도둑맞는 일이 있었고, 고을에 귀신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람은: 섬에서 나와 서산·홍성·대흥·청양의 친척집을 옮겨 다니다 전라도 여산까지 내려가 오래 머물렀다. 손윗동서가 사는 고을이라 서로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집 곁방살이는 아무리 살가운 친척이라도 철이 바뀌면 눈치가 보이는 법이다. 그 와중에도 일기는 하루하루 이어진다.

  8. 가슴속에 늘 불이 있는 듯하다 — 심양으로 붙인 편지 (1637 · 전라도 여산)

    그때 나라는: 심양의 조선 사람들이 머문 곳은 심양관이라 불렸다. 밭을 얻어 농사를 짓고 물건을 사고팔며 살림을 꾸렸고, 끌려간 사람을 값을 치르고 되사오는 일까지 했다. 이 사람은: 이 시기 일기에 유난히 자주 나오는 지명이 심양이다. 심양에서 편지가 왔다, 심양으로 편지를 붙였다. 방법은 인편이었다. 사신 행렬이나 장사치 편에 서찰을 붙이는 것이라 몇 달이 걸리고 절반은 사라졌다. 그래도 그 종이 한 장이 남편의 생사를 확인할 유일한 길이었다. 소식이 끊긴 날의 일기에는 가슴속에 늘 불이 있는 듯하다고 적혀 있다. 속이 타들어간다는 말을 400년 전 여인은 이렇게 적었다.

  9. 꿈에 본 아이의 얼굴, 그리고 처마 밑 제비 (1638 · 전라도 여산)

    그때 나라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꿈은 잠꼬대가 아니라 길흉을 읽는 통로였다. 쇄미록의 오희문도, 미암일기의 유희춘도 꿈을 적었다. 이 사람은: 이 집 부부는 슬하의 다섯 남매를 모두 먼저 떠나보냈다. 그는 꿈을 꾸면 깨어나 그 꿈을 적었다. 먼저 간 아들의 어린 얼굴을 본 아침에는 마음이 흐뭇하나 아쉽기 그지없다고 적었다. 죽은 아이를 꿈에서 만난 아침이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흐뭇하기도 하다는 것, 자식 잃은 부모만 아는 마음일 것이다. 어느 봄날에는 처마 밑 제비 한 쌍이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모습을 한참 보다가 사람이 저 짐승만 못한가 싶다고 적었다.

  10. 충주 — 예순넷 안주인이 농사를 지휘하다 (1638 1월 · 충청도 충주)

    그때 나라는: 전쟁으로 논밭이 황폐해지고 일손과 소가 모자랐다. 살림을 다시 세우는 일이 곧 살아남는 일이었다. 이 사람은: 집안 전답이 있고 서울에 가까워 남편 소식을 빨리 듣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 충주로 옮겼다. 여기서 이 일기의 다른 면목이 드러난다. 흩어진 논밭을 파악하고 농사 계획을 세우고 일꾼을 배치했다. 언제 무엇을 뿌리고 누가 어느 밭에서 일했으며 소를 몇 마리 썼고 얼마를 걷었는지가 날짜별로 적혀 있다. 이 일기를 농사일기라 부르는 연구자가 있을 정도다. 눈물의 문장 바로 다음 줄에 그날 뿌린 씨앗이 이어진다.

  11. 피란길에서도 기일을 세다 — 형제가 돌아가며 지내는 제사 (1638 · 충청도 충주)

    그때 나라는: 조선 전기와 중기의 관행은 자녀에게 재산을 고르게 나눠 주는 균분상속이었고, 제사는 재산에 딸려 오는 의무였다. 그래서 형제가 돌아가며 제사를 맡고(윤회봉사), 아들이 없으면 딸이, 딸도 없으면 외손이 이어받았다(외손봉사). 족보도 태어난 순서대로 적고 사위와 외손을 나란히 실었다. 우리가 아는 맏아들 중심의 조선은 이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인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자리를 잡는다. 이 사람은: 무인도에서 눈을 녹여 마신 사람이 기일을 챙겼다. 시부모 제사만이 아니라 친정 부모의 제사까지 직접 관할했다. 이 일기가 귀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 옛 방식이 살아 있던 마지막 풍경을 통째로 담고 있다.

  12. 남편이 돌아오다 — 요란한 감격 없이, 밥상 하나로 (1638 · 충청도 충주)

    그때 나라는: 볼모로 간 신하들이 차례로 교대해 돌아왔다. 소현세자는 8년을 심양에 있다가 1645년에야 귀국하고 두 달 뒤 갑자기 죽는다. 이 사람은: 심양으로 떠난 지 1년이 훌쩍 지난 초여름, 남편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린 재회인데도 일기에 요란한 감격은 없다. 남편의 밥상, 남편의 손님, 남편의 건강. 이날 이후 평범한 기록들이 다시 일기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남편이 돌아왔다는 긴 문장보다 다시 챙길 수 있게 된 밥상 하나가 그의 기쁨을 대신 말해 준다.

  13. 서울로 — 신주를 앞세우고 돌아와, 일기가 멈추다 (1640 8월 9일 · 한양)

    그때 나라는: 남이웅은 뒤에 대사헌·한성판윤·형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 사람은: 서울로 돌아갈 때 그가 가장 앞세운 짐은 조상의 신주였다. 피란 내내 지켜 온 그것을 직접 모시고 도성에 들어갔다. 중신의 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 접대와 살림을 총괄한 사람도 그였다. 누가 다녀갔고 무엇을 대접했는지 목록까지 남아 이 일기는 17세기 사대부가 살림의 백과사전이 됐다. 1640년 8월 9일 일기가 멈춘다. 3년 10개월, 그의 나이 예순일곱이었다. 붓을 걸른 날은 피란 첫 며칠, 서울 귀환 직후의 일주일, 그리고 앓아누운 며칠뿐이다. 남은 것은 한글 필사본 한 책 일흔두 장.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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