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북일기 루트
울산에서 회령까지 — 아버지의 길과 40년 뒤 아들의 길, 그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나라의 일
타임라인 (14개 지점)
- 전쟁 중의 무과 급제 — 아버지 박계숙 (1594 · 울산)
그때 나라는: 임진왜란 세 해째. 왜군이 남해안에 성을 쌓고 눌러앉은 사이 조선은 무과를 자주 열어 군관을 급히 채웠다. 이 사람은: 울산의 박계숙이 스물여섯에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박홍춘의 아들이었다. 급제했다고 바로 벼슬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북방 국경을 한 해 지키는 부방(赴防)을 먼저 치러야 했고, 그 길을 떠나기까지 열한 해가 걸렸다.
- 울산을 떠나다 — 아버지의 부방길 시작 (1605 10월 15일 · 울산)
그때 나라는: 전쟁이 끝난 지 일곱 해. 선조 말년의 조선은 무너진 성곽과 줄어든 군사를 추스르는 중이었고, 북쪽 여진은 누르하치 아래 뭉쳐 가고 있었다. 남쪽 도의 무사를 뽑아 북방에 보내는 제도가 다시 힘을 받았다. 이 사람은: 서른일곱의 박계숙이 10월 15일 울산 집을 나섰다. 이날부터 집에 돌아온 1607년 1월 1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디서 자고 어디를 지났는지 적었다. 이 노정 기록이 17세기 초 조선의 길과 역참을 보여 주는 드문 자료가 됐다. 그는 떠나면서 변방에 있는 동안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고향으로 실려 가는 시신 — 부방은 목숨을 거는 일 (1605 12월 · 함경도 남쪽 길 위)
그때 나라는: 함경도 국경은 여진과 자주 부딪히는 자리였다. 남쪽에서 온 무사들이 그 전투에서 죽었다. 이 사람은: 두 달 넘는 길 위에서 박계숙은 같은 임무로 북방에 갔다가 죽어 고향으로 실려 가는 무사의 시신을 만났다. 그는 술 몇 잔과 마른 안주를 차려 제사를 지내 주었다. 같은 임무로 온 무사였다. 자기가 가는 길의 끝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길 한복판에서 본 것이다. 이 웨이포인트의 자리는 노정 중간을 대표하는 근사 좌표다.
- 경성의 기생 금춘 — 사흘 만에 깨진 다짐 (1605 12월 · 함경도 경성)
그때 나라는: 경성은 함경도 북쪽 군사와 행정의 중심이었고, 관에 속한 기생이 오가는 관리와 군관의 시중을 들었다. 이 사람은: 박계숙은 이곳에서 기생 금춘을 만났다. 첫날과 둘째 날은 촛불 아래 이야기만 나누고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 다짐을 지킨 것이다. 셋째 날 그는 시 한 수를 지어 건넸고 다짐은 거기서 끝났다. 서로를 떠본 말과 시가 한문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400년 전 변방의 남녀가 어떤 말로 마음을 건넸는지가 문장으로 남은 드문 자리다. 부임지 회령으로 가야 했지만 그는 경성에 열흘을 머물렀다.
- 회령 보을하진 — 아버지의 한 해, 그리고 기생 배종 (1606 · 함경도 회령 보을하진)
그때 나라는: 회령은 두만강 가의 국경 도시로, 세종 때 6진을 개척하면서 만든 자리다. 남쪽에서 온 군관들은 여기서 활을 쏘고 순찰을 돌며 한 해를 보냈다. 이 사람은: 박계숙은 회령부의 보을하진에서 근무했다. 일기에는 활쏘기와 술자리, 동료들과의 일상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그는 배종이라는 기생과 한 해 넘게 가까이 지냈다. 근무가 끝나고 울산으로 돌아가면서 그 관계는 끝났다. 그런 줄 알았다. 이 자리는 40년 뒤 아들의 일기에서 다시 나온다.
- 울산으로 돌아오다 — 아버지의 일기가 끝나는 날 (1607 1월 1일 · 울산)
그때 나라는: 이듬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한다.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작하고, 그 끝에 인조반정과 두 번의 호란이 온다. 이 사람은: 1607년 1월 1일, 박계숙이 집에 돌아왔다. 24장짜리 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는 일기 끝에 후손들이 대대로 볼 수 있게 귀중히 보관하라고 적었다. 이 말은 40년 뒤 아들이 그 뒤에 자기 일기를 덧붙이면서 지켜졌다.
- 두 일기 사이 — 삼전도의 굴욕 (1637 1월 30일 · 서울 송파(삼전도))
그때 나라는: 아버지가 돌아온 뒤 30년 사이에 광해군이 쫓겨나고(1623), 후금이 두 번 쳐들어왔다(1627, 1636).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을 버티다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은 청의 신하국이 됐다. 이 사람은: 이때 박계숙은 예순여덟, 아들 박취문은 스무 살이었다. 울산에서 이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일기는 없다. 그러나 아들이 7년 뒤 걸어갈 북방의 길은 이 전쟁 뒤에 완전히 달라진 나라의 길이었다. 회령은 그 청과 조선이 물건을 바꾸는 시장이 서던 자리가 된다.
- 아들이 같은 길을 떠나다 — 명이 망한 해 (1644 12월 9일 · 울산)
그때 나라는: 이해 봄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해 명이 망했고, 청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들어갔다. 조선이 200년 섬긴 나라가 사라진 해다. 소현세자는 아직 심양에 볼모로 있었다. 이 사람은: 스물여덟에 무과에 급제한 박취문이 12월 9일 집을 나섰다. 아버지와 같은 길, 같은 회령이었다. 아버지처럼 다짐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일기 뒤에 자기 일기를 이어 붙였고 체제까지 그대로 따랐다. 두 사람이 쓴 것이 한 권이 된 이유다.
- 동해안 길 — 삼척과 강릉, 사흘에 한 번 (1644 12월 30일 · 강릉)
그때 나라는: 경상도에서 함경도로 가는 길은 둘이었다. 한양을 거치는 큰길과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는 길. 동해안 길에는 관아마다 술집과 관에 딸린 여종이 있어 지나가는 관리와 군관의 시중을 들었다. 이 사람은: 박취문은 동해안 길을 택했다. 삼척을 지나 12월 30일 강릉에 닿았다. 출발 이튿날부터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상대를 바꿔 가며 잠자리를 가진 것이 날짜별로 적혀 있다. 여자를 멀리하겠다던 동료가 밤을 보내고 새벽에 서둘러 떠나는 것을 보고는 우습다고 한마디 적었다. 자기는 다짐 자체를 안 했으면서.
- 강릉에서 얻은 병 — 한 달의 공백 (1645 1월 · 강릉)
그때 나라는: 조선에는 성병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관기 제도와 잦은 이동이 병을 옮기는 길이었고, 의서에는 그 치료법이 실려 있었다. 이 사람은: 1645년 1월 초 박취문은 강릉의 이름난 기생을 찾아갔다가 그 자리에서 자신이 병을 옮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상대는 크게 울었고 그는 약값을 대겠다고 했다. 사흘에 한 번씩 이어지던 기록이 한 달 가까이 끊긴다. 치료 때문이었다. 한 달 뒤 기록이 다시 시작될 때 그는 몸이 나은 기쁨을 노골적인 한마디로 적었다. 이 대목을 읽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공개를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회령 군영의 하루 — 활쏘기, 참수 농담, 송아지 흥정 (1645 · 함경도 회령)
그때 나라는: 병자호란 뒤 회령에는 청과 조선의 시장(회령개시)이 섰다. 국경은 이제 여진과 싸우는 곳이 아니라 청의 관리가 드나드는 곳이었다. 이 사람은: 박취문의 일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활쏘기다. 120번이 넘는다. 훈련이자 놀이였고, 진 쪽이 벌을 받는 것으로 긴장을 풀었다. 지면 목을 베자는 농담을 걸고 진 사람을 뜰로 끌어내 묶었다가, 송아지로 목숨값을 대신하는 것으로 흥정을 마치고 잔치를 여는 장면이 그 예다. 동료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기 자존심을 접고 처벌을 막아 준 일도 있다. 삼천 리 밖까지 함께 온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 방직기 — 거절하면 벌을 받았다 (1645 · 함경도 회령)
그때 나라는: 변방 군관에게는 방직기(房直妓)라는 여자가 배정됐다. 이름은 빨래와 밥을 맡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근무 기간의 아내였다. 관에 속한 기생이나 여종이 맡았고, 군관의 근무가 끝나면 다음 군관을 맞아야 했다. 이 사람은: 일기에는 방직기가 되기를 거부한 관비의 어머니와 오빠를 불러 매질한 일이 적혀 있다. 결국 그 여인은 시중을 들어야 했다. 조선의 변방이 여성의 몸을 어떻게 썼는지가 한 줄에 박혀 있다. 이 루트는 이 대목을 빼거나 줄이지 않는다.
- 월매가 찾아오다 — 40년을 건너온 인연 (1645 · 함경도 회령)
그때 나라는: 이해 2월 소현세자가 8년 만에 심양에서 돌아왔고 두 달 뒤 갑자기 죽었다. 청과 조선 사이의 사람과 물건과 소식이 회령 같은 국경 도시를 통해 오갔다. 이 사람은: 울산에서 새 군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한 여인이 군영을 찾아왔다. 이름은 월매. 40년 전 아버지 박계숙이 가까이 지냈던 기생 배종의 딸이었다. 배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박계숙은 일흔을 넘긴 노인이었다. 월매는 이것저것 묻고서 이 군관이 어머니가 평생 이야기하던 그 사람의 아들임을 알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늦도록 죽은 어머니 이야기를 했고, 박취문이 회령을 떠날 때까지 가까이 지냈다.
- 조총과 눈물, 그리고 귀향 — 아들의 일기가 끝나는 날 (1646 4월 4일 · 울산)
그때 나라는: 조총은 임진왜란 뒤 조선군의 주력 무기가 됐고, 변방 군영은 자체로 조총을 만들었다. 이 사람은: 박취문이 맡은 일은 조총 제조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근무가 끝나 갈 무렵 조총 수백 자루를 더 만들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는 종일 하소연했고 울기까지 했다. 울산에 여든 가까운 부모가 있었고 그는 외아들이었다. 몇 달을 매달린 끝에 풀려나 1646년 4월 4일 집에 돌아왔다. 55장짜리 일기는 여기서 끝난다. 아버지의 24장에 아들의 55장이 붙어 한 권이 됐고, 그 책은 울산 박씨 집안에서 400년을 내려와 지금 울산박물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