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
사서 지키고, 찾아내고, 돌려받고, 다시 내어놓은 사람들 — 서울에서 도쿄·교토·파리를 돌아 다시 서울까지
타임라인 (12개 지점)
- 광화문을 헐지 말라 — 경계에 선 일본인들 (1922 · 경성 광화문)
그때 나라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경복궁 앞마당에 들어서면서 광화문을 헐어 없애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이 사람들은: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잡지에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실어 반대했다. 광화문은 헐리지 않고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졌다. 야나기는 2년 뒤 경복궁 안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열었고, 그 곁에는 조선의 소반과 도자기를 연구하던 아사카와 다쿠미가 있었다. 다쿠미는 조선에서 세상을 떠나 스스로 원한 대로 망우리에 묻혔다. 다만 야나기가 조선 미술을 「슬픔의 아름다움」으로 본 시각은 식민지 사람을 가엾은 존재로 굳혔다는 비판을 함께 받는다. 이 루트는 그 둘을 모두 적고 시작한다.
- 도쿄에서 고려청자를 통째로 사 오다 (1937 · 일본 도쿄)
그때 나라는: 식민지 시기 내내 무덤에서 파낸 고려청자와 절에서 뜯어낸 불상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조선 물건이 비싸게 팔렸다. 이 사람은: 서울의 젊은 부자 전형필(간송)은 도쿄에 살던 영국인 변호사 개스비가 모아 온 고려청자 수집품을 통째로 사들였다. 흩어지기 전에 한꺼번에 들여온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위해 땅을 팔았다고 전한다. 돈으로 사는 일이 왜 지키는 일이 되는지 — 그 무렵에는 사지 않으면 바다를 건너갔기 때문이다.
- 보화각과 훈민정음 — 성북동의 금고 (1940 · 경성 성북동)
그때 나라는: 조선어 교육이 폐지되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강요가 시작됐다. 이 사람은: 전형필은 1938년 성북동에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첫 사립 박물관 보화각을 지었고, 1940년 무렵 경북 안동에서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을 사들여 해방 때까지 드러내지 않고 지켰다. 한글을 어떤 원리로 만들었는지 적은 단 하나의 책이다. 그의 눈을 길러 준 사람은 3·1운동 민족대표였던 위창 오세창이었다.
- 공습 직전의 도쿄에서 세한도를 받아 오다 (1944 · 일본 도쿄)
그때 나라는: 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군의 폭격이 일본 본토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서예가 손재형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가진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도쿄로 건너갔다. 날마다 찾아가 청한 끝에 그림을 넘겨받았다. 이듬해 그 집이 공습을 맞아 소장품 상당수가 불탔다고 전한다. 한발만 늦었어도 세한도는 없었다.
- 파리 국립도서관 — 직지가 세상에 나오다 (1972 5월 ·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그때 나라는: 개항기에 프랑스 외교관이 수집해 간 고려의 책 한 권이 파리 국립도서관 동양 문헌 사이에 있었다. 이 사람은: 1955년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고 건너간 박병선은 국립도서관 사서가 되어 그 책 『직지』의 끝에 적힌 「주조」라는 글자를 붙잡았다. 금속활자로 찍은 책임을 증명하려고 활자 인쇄를 직접 흉내 내 보다 오븐에 불을 내기도 했다. 1972년 「세계 책의 해」 전시에서 직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직지는 지금도 파리에 있다.
- 베르사유 별관 창고 — 외규장각 의궤를 찾다 (1975 · 프랑스 베르사유 (국립도서관 별관))
그때 나라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왕실 의궤를 싣고 갔다. 백 년 넘게 어디 있는지 몰랐다. 이 사람은: 박병선은 「병인양요 때 가져온 책은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는 옛 기록을 단서로 삼아 오래 찾던 끝에, 1975년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파손 도서로 분류돼 있던 의궤를 찾아냈다. 이 일로 도서관과 사이가 틀어져 뒤에 사서 일을 그만두었다고 전한다. 그 뒤에도 열람실을 드나들며 의궤를 하나하나 풀어 썼다.
- 야스쿠니 신사의 구석 — 북관대첩비를 알리다 (1978 · 일본 도쿄 야스쿠니 신사)
그때 나라는: 임진왜란 때 정문부의 의병이 함경도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이긴 일을 새긴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길주에서 뜯어 갔다. 이 사람은: 1909년 조소앙이 이 비가 도쿄에 있다고 처음 적었지만 식민지 시기라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1978년 재일 사학자 최서면이 야스쿠니 신사 한구석에 서 있는 이 비를 확인해 세상에 알렸다. 이긴 전쟁의 기록이 진 쪽의 신사에 전리품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되찾기 운동이 시작됐다.
- 교토에서 되찾은 1,700점 — 정조문과 고려미술관 (1988 10월 25일 · 일본 교토 기타구)
그때 나라는: 광복 뒤에도 일본에 남은 한반도 유물은 돌아올 길이 거의 없었다. 1965년 한일협정에 딸린 문화재 협정으로 돌아온 것은 일부였다. 이 사람은: 어린 나이에 교토로 건너간 재일동포 정조문은 1955년 무렵 조선 백자 항아리 하나를 계기로 일본 곳곳에 흩어진 우리 유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40년 가까이 모은 1,700여 점과 자기 집터로 1988년 고려미술관을 열었다. 남도 북도 아닌 「고려」라는 이름을 붙였고, 통일 전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지켰다. 간송이 바다를 건너가기 전에 샀다면, 그는 이미 건너간 것을 그 땅에서 되찾았다.
- 북관대첩비, 백 년 만에 돌아와 북으로 가다 (2005 10월 20일 · 함경북도 길주)
그때 나라는: 일본은 오랫동안 「남과 북 어느 쪽에 돌려줘야 할지 모른다」며 반환을 미뤘다. 이 사람들은: 한국의 초산 스님과 일본의 가키누마 스님이 우정으로 길을 텄고, 남북이 함께 반환을 요구하기로 뜻을 모으면서 2005년 10월 20일 비석이 서울로 돌아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서 잠시 사람들을 만난 뒤 이듬해 3월 1일 북쪽에 넘겨져 원래 자리인 길주로 갔다. 남과 북이 함께 되찾은 드문 문화재다. 서울 경복궁에는 똑같이 만든 복제비가 서 있다.
- 오대산 실록, 도쿄대에서 돌아오다 (2006 · 강원 평창 오대산)
그때 나라는: 조선왕조실록은 전쟁에 대비해 여러 곳 산속 사고에 나누어 두었다.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총독부가 도쿄제국대학으로 보냈고, 대부분이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탔다. 이 사람들은: 남은 책이 도쿄대에 있다는 사실을 두고 스님들과 시민들이 환수위원회를 꾸려 싸웠다. 2006년 47책이 돌아왔는데, 형식은 도쿄대가 서울대에 「기증」하는 것이었다. 되찾았다는 말과 돌려받았다는 말 사이의 거리가 거기 있다. 실록은 뒷날 오대산 자락에 새로 지은 박물관으로 옮겨져 떠난 자리 가까이 돌아갔다.
- 2011년, 두 나라에서 의궤가 돌아오다 (2011 · 서울)
그때 나라는: 1993년 한국과 프랑스가 외규장각 의궤를 두고 협상을 시작했지만 프랑스는 한 나라에 돌려주면 선례가 된다며 버텼다. 이 사람들은: 2011년 봄 외규장각 의궤 297책이 145년 만에 돌아왔다. 형식은 5년마다 갱신하는 「대여」였다. 그해 말에는 일본 궁내청에 있던 조선왕실의궤 등 1,205책도 돌아왔다. 박병선은 환영식에 나와 벅차다고 하면서도 대여를 반환으로 바꿔 달라는 부탁을 남겼고, 그해 11월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 세한도, 모두의 것이 되다 (2020 ·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그때 나라는: 개인이 평생 모은 수집품을 나라에 내놓는 일이 이어졌다. 이 사람들은: 손재형이 도쿄에서 받아 온 세한도는 몇 사람의 손을 거쳐 개성 출신 수집가 손세기에게 갔고, 아들 손창근이 이어받아 지켰다. 2020년 그는 이 그림을 아무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내놓았다. 한 점의 그림이 사서 지킨 사람, 되찾아 온 사람, 이어서 지킨 사람, 내어놓은 사람을 모두 거쳐 비로소 모두의 것이 된 것이다. 이 루트의 마지막 정거장이 박물관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