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독립운동가 — "조선의 모스크바"의 시작

1909~1944

대한광복회가 결성되고, 3·1운동이 독자적으로 불붙고, 유림과 시인이 목숨을 걸었던 곳 — 지금의 대구경북이 한때 전국에서 가장 뜨거운 항일 거점이었다는 사실

타임라인 (14개 지점)

  1. 서상일, 대동청년단을 결성하다 (1909 · 대구)안경을 쓴 서상일이 손을 들고 있는 흑백 인물사진서상일 · 사진 경향신문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22세의 대구 청년 서상일이 안희제·김동삼·윤병호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단체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이듬해 한일합방이 공표되자 서상일은 9인 결사대를 조직해 서울 주재 9개국 공사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 대구경북 항일 조직의 계보가 여기서 시작된다.

  2. 박상진, 상덕태상회를 세우다 (1912 · 대구)양복 차림의 박상진 의사 상반신 흑백 인물사진박상진 의사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의병장 허위의 문하에서 배우고 판사시험까지 합격했던 박상진이 판사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대구에 곡물상 "상덕태상회"를 세워 독립운동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 상회·여관을 가장한 이런 거점은 이후 전국 8도로 확대되며 대한광복회의 연락망이 된다.

  3. 조선국권회복단 결성 (1915 1월 · 대구 (안일사))바위 절벽 아래 자리한 안일사 법당과 앞마당대구 앞산 안일사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앙지뉴 필름 (공공누리 제1유형)

    박상진이 대구 앞산 안일암(안일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다. 겉으로는 청년 계몽 조직인 달성친목회(1908)의 후신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유망한 청년들을 규합해 비밀리에 국권회복을 도모하는 배일 조직이었다.

  4. 대한광복회 결성 — 1910년대 최대 비밀결사 (1915 7월 · 대구 (달성공원))잔디밭 사이로 붉은 길이 나 있고 뒤쪽에 한옥 건물이 보이는 공원대구 달성공원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이범수 (공공누리 제1유형)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광복단(채기중 등)이 대구 달성공원에서 통합해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총사령 박상진을 중심으로 충청·전라·경기·황해·평안도와 만주까지 조직을 넓혀간 이 단체는 독립군 양성과 무장투쟁을 목표로 삼은, 국내에서 결성된 가장 큰 독립군 단체였다.

  5. 대구권총사건 — 군자금 확보 시도 (1916 9월 4일 · 대구)

    박상진과 대한광복회 동지들이 대구의 부호 서우순의 집에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려 했으나, 놀란 서우순의 비명에 집사가 달려오자 총을 쏘며 달아나다 붙잡혔다. 관련자들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고, 대한광복회로서는 조직 노출의 위험을 안게 된 사건이었다.

  6. 박상진 체포, 대한광복회 와해 (1918 · 대구)한복 차림의 김좌진 인물사진김좌진 장군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칠곡 부호 장승원과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이 잇따라 실패한 여파로 박상진이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해 귀국하던 길에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대한광복회는 큰 타격을 입었고, 노백린은 미주로, 김좌진은 만주로 망명하는 등 조직원들이 흩어졌다.

  7. 대구 3·8 만세운동 — 영남 3·1운동의 효시 (1919 3월 8일 · 대구 (서문시장))태극기가 걸린 돌담 사이로 오르는 좁은 돌계단 길대구 3·1만세운동길 90계단 · 사진 Ycho410 · CC BY-SA 4.0 · 위키미디어 공용

    기독교계 유지 이만집·이상백·백남채 등이 서울의 독립선언 계획을 전해 듣고, 서문 밖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계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신명여학교·성경학교 학생들과 주민·기독교인·천도교인 1,000여 명이 가세해, 영남 지역 3·1운동의 첫 봉화가 됐다 — "학생 의거"라고도 불린다.

  8. 김창숙, 유림단 파리장서를 이끌다 (1919 3월 · 경북 성주)두루마기에 띠를 두른 김창숙 선생의 흑백 인물사진김창숙 선생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성주의 유학자 김창숙이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빠진 것에 실망해, 전국 유림 137명의 연명으로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파리장서)를 작성했다. 그는 이를 들고 상하이로 망명해 파리강화회의의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전달했다 — 이 일로 수백 명의 유학자가 체포되는 제1차 유림단 사건이 벌어졌다.

  9. 박상진 순국 (1921 8월 11일 · 대구형무소)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박상진이 대구형무소에서 형장에 올랐다. 판사 시험에 합격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그 길을 버리고, 국내 최대 무장독립운동 조직을 이끌다 형장에서 최후를 맞았다.

  10. 조양회관 건립 — "조선의 빛을 본다" (1922 10월 · 대구 (달성동))朝陽會館 현판이 걸린 붉은 벽돌 건물의 아치형 입구대구 망우공원 조양회관 · ©한국관광콘텐츠랩 · 촬영 김지호 (공공누리 제1유형)

    조선국권회복단 핵심 인물이자 대동청년단을 만들었던 서상일이 대구에 조양회관을 세웠다. "조선의 빛이 돼라"는 뜻의 이 건물은 대구구락부·대구여자청년회 등이 입주해 대구경북 청년들이 모여 민족사상을 기르는 민중계몽운동의 거점이 됐다 — 무장투쟁 노선이 꺾인 뒤에도 대구의 항일 정신은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11. 김창숙 — 의열투쟁의 자금줄 (1926 · 경북 성주)돔 지붕을 얹은 서양식 석조 건물의 옛 사진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구상하던 김창숙이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로 잠입해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 자금은 이듬해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의거를 지원하는 데 쓰였다 — 유림 출신 학자가 무장투쟁의 후원자로 나선 셈이다.

  12. 장진홍 의거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시도 (1927 10월 18일 · 대구 (중앙로))모자를 쓴 장진홍 의사 흑백 인물사진장진홍 의사 · 사진 작가 미상 · 퍼블릭 도메인 · 위키미디어 공용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경북도청·경북경찰부·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4곳을 동시에 폭파하려 폭탄이 든 벌꿀 선물상자를 배달시켰으나, 첫 배달지인 조선은행 대구지점 앞에서 폭발해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범인을 잡지 못한 일제는 안동 출신 시인 이원록(이육사)과 그 형제들을 진범으로 조작해 대구형무소에 가뒀다 —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가 훗날 그의 필명 "이육사"가 됐다.

  13. 장진홍,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다 (1930 7월 31일 · 대구형무소)

    일본으로 피신했던 장진홍은 1929년 오사카에서 붙잡혀 송환됐다. 혹독한 고문에도 동지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던 그는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1930년 7월 31일 밤 일제의 손에 죽는 치욕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했다.

  14. 이육사,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다 (1944 1월 16일 · 중국 베이징)둥근 안경에 양복을 입은 이육사 흑백 인물사진이육사 · 사진 http://www.264.or.kr · CC BY 3.0 · 위키미디어 공용

    장진홍 의거로 억울한 옥살이를 겪은 뒤 신문기자·의열단 군사간부학교 졸업을 거쳐 저항시를 쓰던 이육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감옥을 오갔다. 광복을 한 해 앞두고 베이징의 일본 감옥에서 순국했다 —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던 그의 시구는, 대구경북이 낳은 조직·집회·유림·시인 모두가 공유했던 하나의 다짐으로 이 루트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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