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루트
압록강에서 열하까지 넉 달 — 벽돌과 수레와 거름을 보고 온 사람의 여행 일기
타임라인 (12개 지점)
- 한양을 떠나다 — 임무 없는 수행원 (1780 5월 · 한양)
그때 나라는: 정조가 즉위해 규장각을 세우고 인재를 넓게 쓰려던 시기였다. 청의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의 목소리가 홍대용·박제가 등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청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사절단의 우두머리가 박지원의 팔촌 형 박명원이었고, 박지원은 자제군관이라는 자격으로 따라나섰다. 공식 임무도 벼슬도 없는 수행원이다. 보고서를 쓸 의무가 없으니 마음대로 보고 마음대로 적을 수 있었다. 이 신분이 이 책을 만들었다.
- 압록강을 건너다 — 첫날부터 벽돌을 보다 (1780 6월 24일 · 의주 · 압록강)
그때 나라는: 조선의 사절단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지나 연경으로 가는 길을 오갔다. 한 해에 몇 차례 오가는 이 길이 조선이 바깥 소식을 듣는 큰 통로였다. 이 사람은: 6월 24일 강을 건넜다. 여기서 요양까지의 보름이 도강록이다. 첫 대목부터 그는 이상한 것을 본다. 벽돌이다. 규격이 같고 쌓는 법이 정해져 있어 튼튼하고 빠르다는 것을 적었다. 조선은 돌을 그냥 쌓는데 여기는 벽돌로 성과 담을 쌓는다.
- 요양과 심양 — 밤새 필담을 나누다 (1780 7월 · 요양 · 심양(성경))
그때 나라는: 심양은 청이 북경으로 들어가기 전의 수도였고,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가 볼모로 끌려가 있던 곳이다. 이 시리즈 3편의 조애중이 편지를 붙이던 그 심양이다. 이 사람은: 성경잡지가 이 구간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종이에 써서 대화했고, 그 필담이 그대로 실려 있다. 상점과 골동품 가게를 돌아다니며 중국 상인과 학자들과 밤늦도록 주고받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
- 수레가 없어 가난하다 — 일신수필의 구간 (1780 7월 · 신광녕 → 산해관 길)
그때 나라는: 조선은 길이 좁고 수레가 드물어 물건을 등과 소에 실어 옮겼다. 물자가 한 지방에 남아돌고 다른 지방에는 없는 일이 흔했다. 이 사람은: 병참지를 달리는 아흐레의 기록이 일신수필이다. 여기서 그는 조선이 가난한 큰 이유를 수레를 쓰지 않는 데서 찾았다. 길이 좁아 수레가 못 간다고 하지만, 수레가 안 다니니 길이 좁은 것이라고 뒤집어 적었다. 수레와 시장과 가게와 다리를 보며 이용후생을 말한 대목이 이 구간에 몰려 있다.
- 산해관을 넘다 — 그리고 호질 (1780 7월 · 산해관)
그때 나라는: 산해관은 만리장성이 바다에 닿는 자리, 중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사람은: 산해관에서 연경까지 열하루의 기록이 관내정사다. 백이와 숙제의 사당에 들른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 소설 호질이 실려 있다. 그는 자기가 쓴 것이 아니라 중국 여관 벽에 있던 글을 베껴 왔다고 적어 두었다. 검열을 피하려는 장치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부패한 선비와 위선을 정면으로 찌르는 이야기를 자기 이름으로 쓰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 연경 — 그런데 황제가 여기 없다 (1780 8월 · 연경(북경))
그때 나라는: 연경은 사절단의 목적지였다. 조선 사신들은 이곳 관소에 머물며 의례를 치르고 물건을 사고 소식을 모아 돌아갔다. 이 사람은: 그런데 황제가 피서지인 열하에 있다는 소식이 왔다. 잔치에 맞추려면 사절단이 다시 북쪽으로 달려야 했다. 예정에 없던 이 열하행이 이 책의 제목이 됐다. 만약 황제가 연경에 있었다면 이 책은 그냥 연행록 한 권으로 남았을 것이다.
- 장성을 넘어 열하로 — 막북행정록 (1780 8월 · 고북구 · 장성 북쪽)
그때 나라는: 장성 북쪽은 몽골로 이어지는 땅이다. 청은 이곳에 황제의 여름 궁을 두고 몽골과 티베트의 세력을 관리했다. 이 사람은: 사절단은 밤을 새워 달렸다. 막북행정록이 이 구간이다. 물을 여러 번 건너고 잠을 못 자며 장성의 관문을 넘는 대목이 이 책에서 가장 숨 가쁘게 읽힌다.
- 열하 — 태학에 머물며 보고 들은 것 (1780 8월 · 열하(승덕))
그때 나라는: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청의 신하들과 몽골·티베트의 사절이 모였다. 조선 사절단도 그 자리에 섰다. 이 사람은: 열하의 태학에 머문 기록이 태학유관록이다. 중국 학자들과 밤새 필담을 나누며 천문과 지구가 돈다는 이야기, 서양 학문과 천주교, 두 나라의 제도를 견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잔치판의 코끼리와 요술쟁이의 재주까지 적었다. 요술 구경을 적은 대목은 그 자체로 한 권이 된다.
- 거름 무더기를 칭찬하다 (1780 8월 · 열하 → 연경 돌아오는 길)
그때 나라는: 사대부가 농사와 물자를 입에 올리는 것을 낮게 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 사람은: 그는 중국의 잘 만든 것 가운데 하나로 거름 무더기를 꼽았다. 똥을 가지런히 쌓아 둔 모양을 보고 저것도 저렇게 쓰면 재산이 된다고 본 것이다. 사대부가 똥을 칭찬한 것이니 당시 눈에는 망측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용후생이라는 말의 실제 내용이다. 백성의 삶에 쓸모 있는 것을 먼저 보자는 태도다. 사상을 설명하는 대신 벽돌과 수레와 거름을 적어 놓으니 200년 뒤에도 무슨 말인지 바로 안다.
- 옥갑야화 — 일기 안에 허생전이 들어 있다 (1780 9월 · 연경 관소)
그때 나라는: 조선의 상업과 무역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북학파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연경으로 돌아온 뒤의 기록 가운데 옥갑야화가 있고, 그 안에 소설 허생전이 실려 있다. 이것도 이야기꾼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해 두었다. 형식이 처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의 간양록과 통한다. 포로였던 강항은 하루씩 적을 수 없어 상소와 견문록을 묶었고, 박지원은 하고 싶은 말을 곧바로 쓸 수 없어 여행 일기 안에 소설을 숨겼다.
- 돌아와서 쓰다 — 그리고 욕을 먹다 (1780 10월 · 한양)
그때 나라는: 청을 오랑캐로 보고 망한 명을 마음으로 섬기던 시대였다. 청의 벽돌과 수레를 배우자는 말은 그 자체로 불편했다. 이 사람은: 귀국해 견문을 정리해 3년쯤 뒤 스물여섯 권을 완성했다. 발표 뒤 보수적인 쪽에서는 오랑캐의 나라를 칭찬했다며 비난했고, 한문 문장을 격식대로 쓰지 않고 우리말 말맛을 섞어 쓴 것도 문제가 됐다. 뒤에 임금이 문체를 바로잡으라 한 논의에서 이 책이 거론되기도 했다.
- 백 년 넘게 필사본으로 돌다가 — 활자로 세상에 나오다 (1901 · 한양)
그때 나라는: 정식으로 간행되지 못한 책이 필사본으로 돌아다니는 일은 조선에서 드물지 않았다. 금지되고 욕먹으면서도 사람들이 베껴 읽으면 그것이 인기의 증거였다. 이 사람은: 열하일기는 오래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다 1901년에 처음 활자로 간행됐다. 그의 글이 세상에 제대로 나오기까지 백 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친필본은 그의 글을 모아 온 한 학자가 소장하다 1986년에 기증해, 지금 단국대학교의 문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