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추일기 루트
붓을 놓고 활을 든 양반의 67년 — 열 해의 과거길, 마흔까지의 백수, 임금의 눈에 든 하루
타임라인 (13개 지점)
- 열여덟에 일기를 시작하다 (1763 · 경상도 선산(현 구미 선산읍))
그때 나라는: 영조 말년이었다. 탕평을 내세웠지만 노론이 오래 권력을 쥐어, 영남 남인 계열 집안에는 문과 길이 거의 막혀 있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이듬해다. 이 사람은: 선산의 양반 노상추가 열여덟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일기는 여든넷으로 세상을 떠나던 해까지 67년을 이어져, 현존하는 조선시대 일기 가운데 가장 긴 기록이 된다. 한 사람의 생애가 거의 통째로 자기 글씨로 남은 셈이다.
- 붓을 놓고 활을 들다 (1769 · 경상도 선산)
그때 나라는: 양반에게 문과는 가장 영광스러운 길이었지만, 당색이 맞지 않으면 급제해도 관직이 나오지 않는 일이 흔했다. 이 사람은: 그의 집안은 원래 문반이었는데 할아버지 노계정이 무관으로 전향해 병마절도사까지 올랐다. 영조의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다.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노상추는 빨리 관직을 얻어 식솔을 먹이려 무과를 택했다. 양반이 평생 잡고 살아야 할 붓을 놓고 활을 잡은 것이다.
- 한양까지 일주일, 그 길을 몇 번이나 (1770 · 선산 → 한양 과거길)
그때 나라는: 무과는 활만 쏘는 시험이 아니었다. 먼 표적을 맞히는 목전, 무거운 철전, 통에 넣어 쏘는 편전, 말을 타고 쏘는 기사, 창과 인형을 다루는 과목, 임진왜란 뒤로는 조총까지. 경국대전과 병법서도 외워야 했고 연습 도구는 응시자가 마련했다. 좋은 활 하나가 소 한 마리 값에 맞먹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선산에서 한양까지는 일주일 걸리는 길이었고, 떨어지면 그 길을 다시 가야 했다. 일기에는 화살이 빗나갔다, 철전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합격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그리고 들어간 논과 밭과 돈을 직접 적어 두었다.
- 서른다섯에 급제 —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1780 · 한양)
그때 나라는: 정조가 즉위한 지 몇 해 뒤였다. 규장각을 세우고 서얼의 관직 진출을 일부 열어 주는 조치를 내리며 인재를 넓게 쓰려던 임금이었다. 이 사람은: 열 해 넘게 매달린 끝에 서른다섯에 무과에 급제했다. 일기에 그날의 기쁨이 남아 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집안에서 오래 나오지 않던 급제자였으니 고향에서 잔치를 열었다. 그런데 진짜 어려움은 그다음에 왔다.
- 합격하고도 백수 — 자리를 부탁하러 다니다 (1784 · 한양 · 선산)
그때 나라는: 무과는 합격자를 많이 뽑았고 그에 비해 관직은 적었다. 급제자 상당수가 자리를 받지 못한 채 지냈고, 인사에는 당색과 연줄이 크게 작용했다. 이 사람은: 급제한 뒤 몇 해를 더 기다렸다. 합격은 했는데 자리가 없는 상태로 한양과 고향을 오가며 무관 자리를 부탁하러 다녔다. 그는 영남 사람이었고 한양의 인사는 다른 세력이 쥐고 있었다.
- 수문장에서 훈련원 주부까지 — 말단의 세월 (1786 · 한양 도성 문루)
그때 나라는: 도성의 문을 지키는 수문장, 훈련원의 주부 같은 자리는 무관의 출발점이었다. 이 사람은: 마흔이 넘어 겨우 받은 자리들이 그런 말단이었다. 대궐과 광화문, 혜화문에서 수비를 맡은 기록이 일기에 나온다. 사극에서 보는 조선 무관과는 거리가 먼 하루다.
- 함경도 갑산 — 세력이 없어 변방을 전전한다 (1787 · 함경도 갑산)
그때 나라는: 변방의 진에는 말단 무관이 배치됐다. 이 시리즈 1편의 박계숙·박취문 부자가 한 해 근무하러 갔던 함경도 국경, 그 제도의 후신이다. 이 사람은: 갑산의 말단직에 임명된 날의 일기에는 세력이 없어 변방을 전전하는 자기 신세에 대한 한탄이 적혀 있다. 그래도 그는 주어진 직분을 성실히 했고, 그 기록이 뒤에 그를 살렸다.
- 정조가 시험지에서 이름을 보다 (1791 · 한양 군영)
그때 나라는: 정조는 친위부대 장용영을 세우고 무관을 직접 챙기던 임금이었다. 활쏘기 시험 성적표를 임금이 직접 들여다보는 일이 있었다. 이 사람은: 군영의 활쏘기 시험에서 오위장 노상추의 이름을 본 정조가 예전에 병조판서를 지낸 이에게 물었고, 병마절도사 노계정의 손자라는 답을 들었다. 실록에 남은 임금의 말은 이렇다. 그 할아버지의 사적은 알았지만 손자가 누구인지 몰라 찾아 쓰려 해도 못 했는데 오늘 시험지에 이름이 있었으니 그에게 운이 있다고 할 만하다.
- 삭주부사 — 말단만 전전하던 사람이 고을 수령이 되다 (1792 · 평안도 삭주)
그때 나라는: 부사는 정삼품, 고을을 다스리는 자리다. 압록강에 가까운 삭주는 국경 고을이었다. 이 사람은: 일기에는 그토록 정육품 자리를 꿈꿨는데 조상의 음덕으로 그보다 높은 자리를 얻게 됐다는 말이 남았다. 삭주에서의 일도 적혀 있다. 자신이 잡아들인 죄인을 옆 고을 군수가 마음대로 풀어 주자 분노한 대목 같은 것이다.
- 두창과 홍역 — 집안이 전염병 앞에서 한 일 (1799 · 경상도 선산)
그때 나라는: 조선 후기에는 두창과 홍역이 여러 차례 크게 돌았다. 1799년에는 전국에서 큰 유행이 있었고 정약용이 홍역 치료서를 따로 쓸 정도로 사회 문제였다. 이 사람은: 이 일기가 요즘 특히 주목받는 이유가 전염병 기록이다. 집안에 누가 걸렸고 약재를 구하러 어디까지 갔으며 앓는 사람을 어디에 두었는지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나라의 기록은 몇 명이 죽었다고 적지만 이 일기는 한 집안이 그 앞에서 무엇을 했는지 적는다. 그는 세 번 혼인하고 아내들과 차례로 사별했다고 전하며,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를 잇달아 잃은 한탄도 남아 있다.
- 홍주영장·가덕진 절제사 — 그리고 바뀌는 세상 (1801 · 충청도 홍주 · 경상도 가덕진)
그때 나라는: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같은 해 공노비가 혁파되고, 돈으로 신분을 사는 사람이 늘고, 양반 집안 안에서 적자와 서자의 구분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이 사람은: 그는 충청도에서 영장을 지내고 예순 중반에는 남해의 진에서 절제사를 맡았다. 그리고 문중에서 서얼 표시를 빼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집안이 망하는 것은 하루를 기다릴 것도 없겠다고 적었다. 신분 질서가 그에게 준 것은 별로 없었는데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은 것은 그 질서였다.
- 고향으로 — 관직을 놓고 늙어 가다 (1811 · 경상도 선산)
그때 나라는: 세도정치 아래 수탈이 심해지고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다. 이 사람은: 예순 후반에 관직을 놓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가 살았다. 일기의 무게가 다시 집안 살림과 농사, 문중 일로 옮겨 간다. 청년기의 수험 일기, 장년기의 관직 일기, 노년기의 향촌 일기로 이 67년을 세 토막으로 나눠 보는 이유다.
- 붓이 멈추다 — 67년, 국역 열두 권으로 남다 (1829 9월 12일 · 경상도 백운동(현 의성))
그때 나라는: 조선의 개인 일기 가운데 이만큼 긴 기록은 없다. 이 일기는 18~19세기 사회상을 보여 주는 1차 사료로 꼽힌다. 이 사람은: 일흔 후반에 백운동으로 거처를 옮겨 여든넷으로 세상을 떠났다. 67년의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고 간찰첩과 함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우리말로 옮겨 열두 권으로 완간했고, 원문과 국역문과 원본 이미지를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일기 가운데 지금 가장 쉽게 전체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이 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