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1811년 12월 18일 · 평안 가산

세도정치기 극심한 수탈과 더불어, 조정이 평안도 출신을 차별해 요직에 등용하지 않는다는 지역 차별에 대한 오랜 불만이 겹치면서, 몰락 양반 홍경래는 상인·광산 노동자·농민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한때 평안도 여러 고을을 장악할 만큼 세력을 떨쳤지만, 정주성에서 관군에 포위된 끝에 5개월 만에 진압되고 홍경래도 전사했다. 단순한 민란을 넘어 지역 차별과 세도정치의 구조적 모순을 정면으로 제기한 이 봉기는, 반세기 뒤 임술농민봉기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대규모 민란의 서막이었다.

왜 일어났나

평안도는 조선 내내 차별받은 땅이었다. 과거에 붙어도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했고, 청과의 무역으로 돈이 돌면서 신흥 상인과 몰락 양반이 늘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 매관매직과 수탈이 심해지고 흉년이 겹쳤다. 몰락 양반 홍경래는 우군칙·김창시와 10년을 준비해 1811년 12월 가산에서 봉기했고, 열흘 만에 청천강 이북 8개 고을을 차지했다.

무엇이 달라졌나

정주성에서 4개월을 버티다 관군이 땅굴로 성벽을 폭파해 함락되었고, 홍경래는 전사했다. 붙잡힌 2천여 명 가운데 어린이를 뺀 모두가 처형되었다. 난은 실패했으나 세도정치가 얼마나 썩었는지를 드러냈고, 50년 뒤 임술민란과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중 봉기의 앞머리가 되었다. 홍경래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오래 돌았다.

관련 인물

참고 자료

이 사건과 이어지는 것

이 사건은 조선 지도(1392~1875)의 사건입니다 — 조선 사건 연표 · 지도 · 이야기 · 기록 ·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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