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정유재란 루트
7년의 전쟁, 무너진 관군과 일어선 백성 — 부산진에서 노량까지
타임라인 (24개 지점)
- 부산진 전투 — 전쟁의 첫 총성 (1592 4월 13일 · 부산진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 1만 8천여 명이 부산 앞바다에 상륙하며 7년 전쟁이 시작됐다. 부산진첨사 정발은 소수의 병력으로 성을 지켰지만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전사했다. 검은 옷을 입고 지휘했다 하여 "흑의장군"으로 불렸던 정발의 항전은 짧았지만, 조선이 조총과 실전 경험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얼마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를 그대로 드러낸 전투였다.
- 동래성 전투 —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1592 4월 14일 · 동래읍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통첩하자, 송상현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답하며 성문을 걸어 잠갔다. 관민이 함께 맞섰지만 하루 만에 성이 함락됐고 송상현도 최후를 맞았다. 부산진에 이은 이 패전으로 일본군의 북상로가 사실상 열렸다.
- 충주 탄금대 전투 — 배수의 진이 무너지다 (1592 4월 28일 · 충주 탄금대)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던 신립은 조령의 험준한 지형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일본군과 맞섰다. 기병 돌격을 앞세운 전통적 전법이었지만, 조총으로 무장하고 조직적으로 사격하는 일본군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조선군은 궤멸했고 신립은 강물에 몸을 던져 최후를 맞았다. 이 패배로 한양 방어선이 사실상 무너지며 선조의 피난이 결정됐다.
- 선조의 의주 몽진 — 도성을 버리고 압록강까지 (1592 5월 1일 · 평안북도 의주)
탄금대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거쳐 명나라 국경과 맞닿은 의주까지 피난했다. 임금이 도성을 버렸다는 소식에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과 노비 문서를 보관하던 장례원에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전한다. 선조는 최악의 경우 명나라로 망명(내부)하는 것까지 검토했을 만큼 절박했는데, 이는 이후 신뢰 문제로 두고두고 그의 치세를 따라다니게 된다.
- 옥포해전 — 이순신, 첫 승리를 거두다 (1592 5월 7일 · 거제 옥포)
연전연패하던 육상 전선과 달리,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첫 출진에서 옥포만에 정박해 있던 일본 함대를 기습해 대선 13척을 포함한 전선을 격파하며 전쟁 첫 승리를 거뒀다. 이는 이후 일본의 수륙 병진 작전이 좌절되는 출발점이 됐다.
- 사천해전 — 거북선, 처음으로 실전에 나서다 (1592 5월 29일 · 경남 사천)
이순신의 2차 출진에서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됐다. 밀물을 기다려 포구 안으로 진입한 뒤 정박한 일본 함대를 모두 불태웠고,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자신도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지만 지휘를 놓지 않았다.
- 곽재우의 기병 — 홍의장군, 의령에서 일어서다 (1592 6월 · 경남 의령)
관군이 곳곳에서 무너지는 사이, 경상도 의령의 전직 관료 곽재우가 사재를 털어 의병을 조직해 가장 먼저 봉기했다.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전장에 나서 "홍의장군"으로 불린 그는 정암진 전투 등에서 지형에 익숙한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보급로와 배후를 교란했고, 이는 전국 각지 의병 봉기의 신호탄이 됐다.
- 한산도대첩 — 학익진, 전쟁의 흐름을 바꾸다 (1592 7월 8일 · 경남 한산도)
이순신은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의 학익진 전법으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 수군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크게 격파했다. 이 승리로 일본의 수륙 병진 작전이 완전히 좌절됐고, 곡창지대 전라도가 지켜지면서 조선은 장기 항전의 물자 기반을 확보했다.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이자 세계 해전사에서도 손꼽히는 전술적 승리로 평가된다.
- 금산 전투 — 조헌과 고경명, 의병장의 순절 (1592 8월 18일 · 충남 금산)
전직 관료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장 영규의 승병과 연합해 금산성의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수적 열세 속에 700여 의병과 함께 전멸했다("칠백의총"). 비슷한 시기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도 금산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관직에 있던 이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고 나서 목숨을 바친 이 전투는, 전국적 의병 봉기가 단순한 향토 방위를 넘어선 사대부의 대의로 받아들여지는 상징이 됐다.
- 진주대첩(1차) — 김시민, 3,800으로 2만을 막다 (1592 10월 10일 · 경남 진주성)
진주목사 김시민은 3,800여 병력으로 2만이 넘는 일본군의 총공격을 성 안에서 막아내며 진주성을 지켜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로가 다시 한 번 차단됐고, 한산도대첩·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힌다. 다만 김시민은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얼마 뒤 세상을 떠났고, 이 패배를 설욕하려는 일본군의 보복이 이듬해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이어진다.
- 휴정과 유정 — 묘향산에서 일어난 승병 (1592 7월 · 평안북도 묘향산)
묘향산에 은거하던 서산대사 휴정은 선조의 부름에 응해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을 모았고, 73세의 나이로 직접 1,500여 승병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전에 참여했다. 그의 제자 사명대사 유정은 금강산에서 별도로 승병을 일으켜 평양성·행주산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직접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벌여 포로 3천여 명을 송환시키기도 했다.
- 평양성 탈환 — 명군 참전, 전세의 전환점 (1593 1월 8일 · 평양)
일본군이 평양까지 점령하며 명나라 국경을 위협하자, 명은 이여송이 이끄는 4만여 대군을 조선에 파병했다. 조명연합군은 화포를 앞세워 평양성을 총공격해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전쟁 발발 이후 조선 측이 거둔 최초의 대규모 육상 승리였다.
- 벽제관 전투 — 이여송의 패배, 명군이 소극적으로 돌아서다 (1593 1월 27일 · 경기 고양 벽제)
평양성 탈환의 기세를 몰아 한양으로 남하하던 이여송의 명군은 벽제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크게 패했다. 이 패배 이후 이여송은 개성으로 물러나 이후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했고, 이는 명이 조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강화 교섭 쪽으로 기우는 계기가 됐다.
- 행주대첩 — 성벽 위의 부녀자들 (1593 2월 12일 · 경기 고양(행주산성))
한양 수복을 노리던 권율은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3천여 병력으로 3만에 가까운 일본군의 총공격을 막아냈다. 성 안의 부녀자들까지 앞치마에 돌을 날라 투석전을 도왔다는 일화("행주치마")가 전해질 만큼 군민이 하나가 된 항전이었다. 이 승리 이후 일본군은 한양에서 철수해 남쪽 해안 지역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 제2차 진주성 전투 — 함락과 논개 (1593 6월 29일 · 경남 진주성)
1차 진주성 패배를 설욕하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명령을 내려,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9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해 재차 진주성을 공격했다. 김천일·황진 등이 이끈 조선 측 수비군은 열흘 가까이 항전했지만 끝내 성이 함락되고 군민 6만여 명이 희생됐다. 함락 직후 촉석루에서 열린 일본군의 승전 잔치에서 관기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는 이야기가 이 전투의 비극을 상징하는 일화로 전해진다.
- 길고 헛된 강화 교섭 —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 (1593 8월 · 부산)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전선은 교착됐고,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창구로 3년 넘게 강화 교섭이 이어졌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 황녀를 일본 왕비로 삼고 조선 남부 4도를 할양하라는 등 명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던 반면, 협상 실무를 맡은 양측 관료들은 이를 은폐한 채 서로 유리하게 문서를 꾸며 보고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1596년 명의 책봉사가 오사카에서 도요토미에게 "일본 왕에 책봉한다"는 내용만 전달되며 그가 요구한 조건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협상은 완전히 결렬됐다.
- 정유재란 — 일본의 재침 (1597 1월 · 부산)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해 재차 조선을 침공했다. 이 무렵 조선은 일본이 흘린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정보를 신중하게 판단해 움직이지 않은 이순신을 "왕명 거역"으로 몰아 파직하고 백의종군시킨 직후였다. 지휘 공백 속에 재침을 맞은 조선 수군은 전쟁 초반과 달리 크게 불리한 처지에서 정유재란을 맞이하게 된다.
- 칠천량 해전 — 조선 수군의 궤멸 (1597 7월 16일 · 경남 거제 칠천량)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조정의 무리한 출전 압박 속에 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다가,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아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나포됐고 원균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산도대첩 이후 유지되던 제해권이 단 하루 만에 무너진 전쟁 최악의 패전이었다.
- 남원성 함락 — 조명연합군의 패배 (1597 8월 16일 · 전북 남원)
칠천량에서 제해권을 잃은 직후, 우키타 히데이에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5만이 넘는 일본군이 호남의 관문인 남원성을 총공격했다. 명나라 부총병 양원과 조선군이 함께 지켰지만 하루 만에 함락됐고 수천 명이 희생됐다.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전사자의 코를 베어 본국으로 보냈는데, 이때 모인 코들이 훗날 교토의 "귀무덤(미미즈카)"에 묻혔다.
- 명량대첩 — 열두 척으로 이룬 기적 (1597 9월 16일 · 전남 진도(울돌목))
칠천량 전멸 이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은 겨우 열두 척 남은 배로 명량(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이용해 130여 척의 일본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이 승리로 궤멸 직전이던 조선 수군이 되살아났고, 일본군의 서해 진출과 수륙 병진 작전이 다시 한 번 좌절됐다.
- 울산성 전투 — 가토 기요마사의 농성전 (1598 1월 4일 · 울산 학성(도산성))
명량대첩 이후 전선이 남해안 왜성들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조명연합군 5만여 명이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던 울산 도산성을 포위 공격했다. 성이 함락 직전까지 몰렸지만 일본 구원군이 도착하며 연합군이 오히려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물과 식량이 끊긴 성 안에서 흙벽을 파먹으며 버텼다는 기록이 남을 만큼 처절했던 이 공방전은, 남해안 왜성을 중심으로 한 소모전 국면이 얼마나 길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 철군의 시작 (1598 8월 18일 · 일본 교토(후시미성))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시미성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 "조선에서 철수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는 극비에 부쳐진 채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순차적으로 전달됐다. 전쟁 명분이던 정복자가 사라지면서 일본군은 각지 왜성에서 철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노량해전 — 마지막 전투, 그리고 이순신의 전사 (1598 11월 19일 · 경남 남해(노량))
도요토미의 사망으로 철수를 시작한 일본군 중 시마즈 요시히로의 함대가 노량 앞바다를 지나 퇴각하려 하자, 이순신은 조명연합함대를 이끌고 이들을 끝까지 추격해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일본 함대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이순신 자신도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7년 전쟁이 막을 내렸다.
- 전쟁이 남긴 것 — 초토화된 국토와 끝나지 않은 상흔 (1598 12월 · 한양)
7년 전쟁으로 조선의 인구가 크게 줄고 경작지 대부분이 황폐화됐으며, 불국사·경복궁 등 수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됐다. 수만 명이 일본으로 끌려가 도자기 기술 등을 전수했고, 이 가운데 일부는 훗날 사명대사 유정의 사행(1604)을 통해 송환됐다. 반면 조선을 도운 명은 국력을 크게 소모해 이후 청에 무너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됐고, 정권을 잃을 뻔했던 도요토미 가문도 전쟁의 후유증 속에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멸망당한다 — 동아시아 삼국 모두의 판도를 바꾼 7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