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 루트
71세의 문관이 20만을 이끌고 두 달을 버틴 끝에 — 거란 10만이 수천으로 줄어 돌아가기까지
타임라인 (12개 지점)
AI 재현 지점마다 붙은 그림은 실제 사진이 아니라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린 그림입니다.
- 세 번째로 오다 — 강동 6주를 내놓으라 (1018 12월 · 개경)

거란이 세 번째로 압록강을 건넜다. 명분은 강동 6주였다. 1차 침입 때 서희가 담판으로 얻어낸 그 땅을 도로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소배압이 이끄는 병력은 10만이라 기록됐다. 고려는 20만 8천 300명을 모아 맞섰다. 상원수는 강감찬. 그해 나이 일흔하나였고, 무장이 아니라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문관이었다. 부원수는 강민첨이었다. 두 번의 침입에서 고려는 왕이 나주까지 피난 갔고 개경이 불탔다. 세 번째는 달라야 했다.
- 흥화진 — 소가죽으로 물을 막다 (1018 12월 · 흥화진 삼교천(평북 의주 일대))

강감찬은 흥화진 앞 하천을 막게 했다. 『고려사』는 소가죽을 꿰어 물을 가두었다가, 거란군이 강을 건널 때 터뜨렸다고 적었다. 물이 쏟아지는 사이 매복해 둔 기병 1만 2천이 덮쳤다. 살수의 수공담과는 사정이 다르다. 살수 쪽은 사료에 아예 없지만 이쪽은 『고려사』에 분명히 실려 있다. 다만 큰 하천을 가죽으로 막았다가 터뜨려 10만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는 규모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기록이 있다는 것과 규모가 그대로였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거란군은 첫 관문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 소배압의 도박 — 성을 버리고 개경으로 (1018 12월 · 청천강 이북)

흥화진에서 피해를 입은 소배압은 뜻밖의 선택을 한다. 길목의 성들을 함락시키는 대신 그대로 지나쳐 개경으로 직행하기로 한 것이다. 수도를 치면 전쟁이 끝난다는 계산이었다. 612년 수나라 별동대가 요동성을 버려두고 평양으로 내달린 것과 같은 판단이다. 그리고 같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 — 등 뒤에 적의 성을 남긴 군대는 보급선을 스스로 끊는다.
- 자주 — 강민첨이 뒤를 물다 (1018 12월 · 자주(평남 자산))

부원수 강민첨이 남하하는 거란군을 자주까지 쫓아가 쳤다. 이어 내구산에서, 마탄에서 잇따라 들이받았다. 정면으로 막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옆구리와 뒤를 계속 무는 방식이었다. 거란군은 전진했지만 전진할수록 줄었다. 그리고 뒤에 남겨둔 성들 때문에 보급이 오지 않았다.
- 신은현 — 텅 빈 들판 앞에서 (1019 1월 · 신은현(황해 신계 부근))

거란군이 개경 100리 밖 신은현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것은 텅 빈 들이었다. 현종은 성 밖 백성을 모두 성안으로 들이고 곡식과 우물을 치웠다. 청야였다. 개경에는 나성이 올라가고 있었고, 성벽 안에는 먹을 것이 있었으며, 성벽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배압은 성을 칠 수도, 머무를 수도 없었다. 정찰병을 보냈다가 붙잡히자, 그는 회군을 결정한다. 개경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는 그가 지나쳐 온 성들이 그대로 있었다.
- 연주·위주 — 돌아가는 길목마다 (1019 2월 · 연주·위주(평남 개천·영변 일대))

회군하는 거란군을 고려군이 길목마다 기다렸다. 연주와 위주에서 500여 급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남하할 때 지나쳐 버린 성들이 이제 하나씩 발톱이 되어 돌아왔다. 굶주리고 지친 군대가 적진 한가운데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압록강까지는 아직 멀었다.
- 귀주 — 두 군대가 마주 서다 (1019 2월 1일 · 귀주(평북 구성))

1019년 2월 1일, 귀주 벌판에서 두 군대가 마주 섰다. 고려군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거란군은 압록강으로 가려면 이 들을 지나야 했다. 처음에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 양쪽 다 물러설 수 없는 자리였다. 거란군은 살아 돌아가기 위해, 고려군은 30년을 끝내기 위해 싸웠다.
- 김종현의 원병, 그리고 바람 (1019 2월 1일 · 귀주 벌판)

팽팽하던 전황이 두 가지로 무너졌다. 개경에서 올라온 김종현의 병력 1만이 거란군의 후방에 닿았고, 그때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고려사』는 이렇게 적었다. 남쪽에서 불던 바람이 갑자기 북쪽으로 바뀌어, 비바람이 거란군 쪽으로 몰아쳤다고. 화살이 바람을 타고 날아갔고 거란군은 눈을 뜨지 못했다. 앞뒤가 끊긴 채 바람까지 등진 군대는 무너졌다. 이 대목은 사료의 기록이지만, 자연 현상을 승패의 원인으로 적는 것은 전근대 사서의 흔한 서술 방식이기도 하다. 다만 그전에 이미 두 달에 걸쳐 만들어진 조건 — 굶주림, 끊긴 보급, 계속된 추격 — 이 있었다는 점은 기록 전체가 말해준다.
- 10만이 수천으로 (1019 2월 1일 · 귀주 벌판~석천)

거란군은 석천을 건너 달아났다. 고려군은 반령까지 쫓았다. 『고려사』는 시신이 들을 덮었고 노획한 병장기와 마필과 낙타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고 적었다. 살아서 압록강을 건넌 자가 수천 명이었다. 10만이 들어와 수천이 돌아갔다. 소배압은 갑옷과 병장기를 다 버리고 단신으로 강을 건넜다. 요 성종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 꾸짖었다 — 네 얼굴 가죽을 벗겨 죽이겠다고.
- 영파역 — 왕이 금꽃을 꽂아주다 (1019 2월 · 영파역(개경 근교))

개선하는 강감찬을 현종이 영파역까지 나가 맞았다. 채색 비단으로 장막을 치고 풍악을 울리게 했으며, 손수 금으로 만든 꽃 여덟 가지를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위로했다. 일흔한 살의 문관이었다. 젊어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평생 문서와 행정 사이에서 살았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갔다.
- 나성과 천리장성 — 이긴 뒤에 쌓다 (1029 · 개경 나성)

전쟁이 끝나고 고려가 한 일은 성을 쌓는 것이었다. 강감찬이 건의한 개경 나성이 1029년 완공됐고, 북쪽 국경에는 천리장성이 1044년까지 이어졌다. 이겼는데 왜 쌓았을까. 세 번을 겪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긴다는 것과 다시 오지 않게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것.
- 그 뒤 200년 — 오지 않은 네 번째 (1019 · 압록강)

거란은 다시 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규모로는 오지 못했다. 고려·거란·송 사이에 세력 균형이 자리 잡았고, 그 균형 위에서 동아시아는 100년이 넘는 평화를 얻었다. 귀주대첩이 3대 대첩에 드는 이유는 규모 때문만이 아니다. 이 한 번의 승리가 전쟁 자체를 끝냈기 때문이다. 살수가 수나라를 무너뜨렸다면, 귀주는 침공을 멈추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