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 루트
113만이라 기록된 대군은 왜 성 하나를 넘지 못했나 — 통일제국 수의 등장부터 살수의 협공, 그리고 수의 멸망까지 37년
타임라인 (14개 지점)
AI 재현 지점마다 붙은 그림은 실제 사진이 아니라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린 그림입니다.
- 중국이 하나가 되다 — 완충지대의 소멸 (589 · 장안(오늘날 시안))

수나라가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키고 370년 만에 중국을 통일했다. 고구려에게 이것은 남의 나라 소식이 아니었다. 중국이 여럿으로 갈라져 있던 동안 고구려는 이쪽과 저쪽을 저울질하며 외교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공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통일제국은 주변을 차례로 복속시키기 시작했다. 북의 돌궐, 남의 임읍, 서의 토욕혼. 그리고 동쪽에 남은 마지막 독립세력이 고구려였다. 인구는 수나라가 4,500만~5,000만, 고구려는 100만~300만으로 추정된다. 열다섯 배에서 오십 배의 격차다.
- 수 문제의 국서 — "너희도 진나라처럼 될 수 있다" (597 · 평양성)

수 문제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국서를 보냈다. 요하가 장강만큼 넓지 않고 고구려의 인구가 진나라보다 많지 않으니, 마음만 먹으면 제압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외교문서의 형식을 빌린 최후통첩이었다. 그 사이 수나라는 고구려와 자기 사이에 있던 말갈과 거란을 세력권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두 세력은 확고한 동맹이라기보다 상황에 따라 고구려와 협력하거나 경쟁하는 관계였지만, 그들이 수나라 쪽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두 나라 사이의 완충지대가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고구려는 다음 차례가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 영양왕의 선제공격 — 만만하게 보지 마라 (598 2월 · 요서(오늘날 랴오닝 서부))

고구려는 물러서지 않았다. 영양왕이 직접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요서를 쳤다. 영토를 빼앗으려는 전면전이 아니라 무력시위였다.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먼저 친다는 것은 전쟁의 명분을 상대에게 넘겨주는 위험한 선택이다. 그럼에도 고구려가 그렇게 한 것은, 어차피 오게 될 전쟁이라면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겠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 1차 침공 — 국경에 닿기도 전에 무너지다 (598 6월 · 요하 서안)

수 문제가 30만 대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군대는 고구려 땅을 제대로 밟아보지도 못했다. 육군은 장마와 보급 두절로 굶주림과 전염병에 시달렸고, 바다로 우회하던 수군은 폭풍을 만나 흩어졌다. 열에 여덟아홉이 죽었다고 『수서』는 적었다. 이 실패는 수나라에게 값비싼 교훈을 남겼다. 고구려를 치려면 병력만 모아서는 안 된다. 장거리 보급, 이동로, 전진기지 — 이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 14년 뒤의 침공은 이 교훈 위에서 준비된다.
- 초원에서 마주친 고구려 사신 (607 · 동돌궐 계민가한 아장(오늘날 내몽골))

즉위한 수양제가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찾아갔다가 뜻밖의 장면을 목격한다. 그곳에 고구려 사신이 와 있었다. 이미 복속시켰다고 여긴 돌궐과 고구려가 여전히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양제에게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결례가 아니라 전략적 경고였다. 고구려는 고립된 변방이 아니라 초원까지 뻗은 외교망을 가진 나라였다. 훗날 612년의 총동원을 결심하게 만든 계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탁군 집결 — 운하로 전쟁을 준비하다 (611 · 탁군(오늘날 베이징))

수양제는 아버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다. 대운하를 탁군까지 연결해 남쪽의 물자를 북방 전선까지 실어 올렸다. 배구를 고구려에 보내 지형과 성곽을 조사하게 했고(『고려풍속』이 그 결과로 전한다), 돌궐과 토욕혼을 눌러 배후를 정리했다. 대운하는 훗날 중국 경제 통합의 대동맥이 되지만, 만들어진 당시의 용도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 원정의 병참선이었다. 그리고 그 공사에 동원된 백성의 원망이 수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한몫하게 된다.
- 113만 대군의 출정 (612 1월 · 탁군 → 요하)

『수서』는 출정 병력을 113만 3,800명으로 적었다. 좌군 12군, 우군 12군, 친위 6군의 30개 군단. 여기에 식량을 나르는 인력만 60만이 더해졌다고 전한다. 출발에만 40일이 걸렸고 행렬이 960리에 이어졌다고도 했다. 전근대 사서의 병력 수치는 과장이 흔하므로 실수(實數)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국가의 역량을 통째로 쏟아부은 총동원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수양제는 각 군단에 황제 직속의 사자(使者)를 배치했다.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 곧바로 보고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군단장의 판단과 황제의 뜻이 충돌할 때 지휘를 마비시키는 구조를 만들었다. 승리를 이미 전제한 배치였다.
- 요동성 — 백만 대군이 성 하나를 넘지 못하다 (612 3월 · 요동성(오늘날 랴오양))

요하를 건너는 것부터 피를 봤다. 도강 장비가 모자랐고 강 건너편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겨우 건넌 대군은 요동성 앞에서 멈춰 섰다. 요동성은 여름 내내 버텼다. 고구려의 성곽 방어체계 앞에서 압도적인 수(數)의 우위는 작동하지 않았다. 게다가 성은 항복 의사를 내비쳤다가 조건을 따지며 시간을 끄는 일을 되풀이했다. 수양제가 모든 항복을 자기에게 보고하도록 해둔 탓에, 사자가 오가는 동안 성은 방어를 정비했다. 황제가 만든 지휘구조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 사이 계절이 흘렀다. 요동의 겨울은 수나라군에게 고구려군보다 무서운 적이었다.
- 30만 별동대 — 위험한 우회 (612 6월 · 압록강(오늘날 단둥 상류))

수나라는 결단을 내린다. 요동의 성들을 하나하나 함락시키는 대신, 30만 별동대를 편성해 평양을 직접 친다. 수도를 무너뜨려 왕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것이었다. 위험한 작전이었다. 등 뒤에 함락되지 않은 고구려 성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급선은 그만큼 길어지고, 그만큼 끊기기 쉬워진다.
- 을지문덕, 적진으로 걸어 들어가다 (612 6월 · 압록강 수나라 진영)

을지문덕이 소수의 수행원만 데리고 수나라 진영을 찾아갔다. 항복을 논의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수양제는 이미 우중문·우문술에게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을 보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 명해둔 상태였다. 걸어 들어가는 순간 목숨을 건 것이다. 우중문이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위무사 유사룡이 막았다. 회담하러 온 사람을 잡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을지문덕은 살아서 걸어 나왔다. 그가 진영에서 본 것은 따로 있었다. 병사들이 100일치 군량을 짊어지고 행군하느라 지쳐 있었고, 무게를 견디지 못해 곡식을 몰래 버리거나 땅에 묻고 있었다. 평양에 닿기 전에 굶는다 — 적의 급소가 어디인지, 그는 자기 눈으로 확인했다.
-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지다 — 청야와 유인 (612 7월 · 청천강~대동강 사이)

고구려군은 싸우다 물러서기를 되풀이했다.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졌다고 전한다. 지는 것이 전술이었다. 수나라군이 차지한 성과 마을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곡식과 우물까지 미리 치운 청야(淸野)였다. 전진할수록 이동거리는 늘고 식량은 줄었다. 승리하며 나아가는데 군대는 점점 약해졌다. 을지문덕은 싸워서 이기려 하지 않았다. 적이 스스로 무너질 자리까지 데려가고 있었다.
- 수군의 붕괴 — 협공이 사라지다 (612 7월 · 대동강 하구 → 평양 외성)

수나라에는 또 하나의 카드가 있었다.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 4만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육군과 협공하고, 동시에 식량을 대는 계획이었다. 별동대의 보급 문제를 풀 유일한 해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호아는 육군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평양을 쳤다. 고구려군이 밀리는 듯하자 외성까지 들어가 약탈을 시작했다. 평양성은 외성·중성·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가 차지한 것은 가장 바깥이었다. 매복해 있던 고구려군이 덮치자 수군은 궤멸했다. 내호아는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이로써 별동대는 홀로 남았다. 굶주린 채, 협공도 보급도 없이.
- 〈여수장우중문시〉 — 칭찬의 형식을 빌린 조롱 (612 7월 · 평양성 부근)

평양에 닿은 별동대는 이미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다섯 자 넉 줄의 시를 보냈다.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에 원문이 그대로 전한다.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신묘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 / 기묘한 셈은 땅의 이치를 다했도다 /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 만족함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 극찬의 형식이지만 내용은 정반대다. 이길 만큼 이겼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 — 굶주린 군대를 이끌고 성 앞에 선 장수에게 이보다 아픈 말은 없었다. 곧이어 고구려는 왕이 직접 황제를 찾아뵙겠다는 조건을 내밀었다. 철수할 명분을 만들어준 것이다. 우문술은 그 명분을 잡았다. 이 시는 우리 문학사에 남은 가장 오래된 한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승패를 가른 무기가 칼이 아니라 넉 줄의 글이었던 셈이다.
- 살수 — 강을 반쯤 건넜을 때 (612 7월 · 살수(청천강, 오늘날 안주 부근))

퇴각하는 수나라군을 고구려는 그대로 보내지 않았다. 곳곳에서 물고 늘어지며 살수까지 몰아붙였다. 그리고 절반이 강을 건넜을 때, 앞뒤가 끊긴 대열을 양쪽에서 쳤다. 앞에서는 각 지역의 고구려군이, 뒤에서는 을지문덕의 추격군이 덮쳤다. 조직적인 저항은 불가능했다. 압록강을 건너갔던 30만 5천 가운데 요동으로 살아 돌아간 것이 2,700명이었다고 『수서』는 적었다. 수나라 장수 신세웅도 이곳에서 죽었다. 흔히 알려진 "둑을 터뜨려 물로 쓸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수서』에도 없다. 후대에 덧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사료가 전하는 승리의 방식은 물이 아니라 협공이었다 — 그리고 그 협공이 가능하도록 반년에 걸쳐 적을 굶기고 지치게 만든 설계였다. 살수를 청천강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지만 다른 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확정된 것은 위치가 아니라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