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추일기 — 열여덟에 시작해 여든넷에 멈춘 67년, 조선에서 가장 긴 일기

1763 · 경상도 선산(구미)

1763년, 열여덟 살 청년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든넷으로 세상을 떠나던 해까지 그 일기를 이어 갔다. 67년, 날짜로는 이만 사천 일이 넘는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일기 가운데 가장 긴 기록이다.

이 시리즈에서 우리는 이미 긴 일기를 여러 권 보았다. 미암일기가 10년, 쇄미록이 9년 3개월, 묵재일기가 30여 년 가운데 17년 8개월분. 그런데 이 일기는 한 사람의 생애가 거의 통째로 들어 있다. 열여덟의 수험생이었던 사람이 서른다섯에 급제하고 마흔에도 자리를 못 얻어 떠돌다가 쉰에 고을 수령이 되고 예순 후반에 물러나 고향에서 늙어 죽는 과정이, 그 사람 자신의 글씨로 남았다.

【양반이 붓을 던지고 활을 들다】 쓴 사람은 노상추다. 경상도 선산, 지금의 구미에서 태어난 양반이다. 그런데 스물 몇 살에 큰 결심을 한다. 양반이 평생 잡고 살아야 할 붓을 놓고 활을 잡은 것이다. 무관이 되겠다는 결심이었다.

왜 문과가 아니라 무과였을까. 그의 집안은 원래 문반이었는데 할아버지가 무관으로 전향해 병마절도사까지 올랐다. 영조의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다. 집안이 무관 길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 노론이 권력을 오래 쥐면서 영남의 남인 계열 집안에는 문과 길이 거의 막혀 있었다. 급제해도 관직이 나오지 않는 일이 흔했다. 게다가 선산 일대는 농사가 쉽지 않은 땅이었고,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빨리 관직을 얻어 식솔을 먹여야 했다.

【열 해 넘게 매달린 시험】 무과가 활만 쏘는 시험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240보 떨어진 표적을 맞히는 목전, 쇠로 만든 무거운 철전, 통에 넣어 쏘는 편전, 말을 타고 달리며 쏘는 기사, 창을 다루고 인형을 내리치는 과목, 여기에 임진왜란 뒤로는 조총까지 들어왔다. 경국대전과 병법서도 외워야 했다. 연습 도구는 응시자가 직접 마련했고, 좋은 활 하나 값이 소 한 마리에 맞먹었다고 한다. 선산에서 한양까지는 일주일 걸리는 길이었고, 한 번에 붙지 못하면 그 길을 다시 가야 했다.

그의 일기에는 그 좌절이 그대로 있다. 목전을 쏘았는데 화살이 빗나갔다, 철전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합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들어간 돈을 직접 적어 두었다. 논과 밭과 현금을 합쳐 열 해 넘는 준비에 다 들어갔다는 계산이다. 오늘의 돈으로 환산하는 이야기가 돌아다니지만, 환산 방식이 제각각이라 이 시리즈는 숫자를 옮기지 않는다. 다만 그가 남긴 한탄은 옮길 만하다. 앞으로 굶어 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겠다고, 공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가혹하다고 적었다.

서른다섯에 마침내 급제했다. 정조 즉위 몇 해 뒤였다. 일기에 그날의 기쁨이 남아 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집안에서 오래 나오지 않던 급제자였으니 고향에서 잔치를 열었다.

【합격하고도 백수】 그런데 진짜 어려움은 급제 다음에 왔다. 관직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몇 해를 더 기다렸다. 합격은 했는데 자리가 없는 상태로 한양과 고향을 오가며 무관 자리를 부탁하러 다녔다.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는 영남 사람이었고 한양의 인사는 다른 세력이 쥐고 있었다.

마흔이 넘어 겨우 받은 자리도 말단이었다. 수문장, 훈련원의 주부 같은 자리를 전전했다. 함경도 갑산의 말단직에 임명된 날의 일기에는, 세력이 없어 변방을 전전하는 자기 신세에 대한 한탄이 적혀 있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조선 무관과는 거리가 먼 하루다.

【정조가 시험지에서 이름을 보다】 인생을 바꾼 일은 우연히 찾아왔다. 군영에서 활쏘기 시험이 있었고 그가 좋은 성적을 냈다. 그 성적표를 정조가 본 것이다. 임금은 노상추라는 이름을 보고 예전에 병조판서를 지낸 사람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병마절도사 노계정의 손자입니다.

정조가 남긴 말이 실록에 전한다. 그 할아버지의 사적은 알고 있었지만 손자가 누구인지는 몰랐고, 그래서 찾아 쓰려 해도 못 했는데 오늘 시험지에 이름이 들어 있었으니 그에게 운이 있다고 할 만하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그를 발탁했고, 그는 평안도 삭주의 부사로 나갔다. 정삼품이다. 말단만 전전하던 사람이 고을 수령이 된 것이다. 일기에는 그토록 정육품 자리를 꿈꿨는데 조상의 음덕으로 그보다 높은 자리를 얻게 됐다는 말이 남았다.

삭주에서의 일도 적혀 있다. 자신이 잡아들인 죄인을 옆 고을 군수가 마음대로 풀어 주자 분노한 대목 같은 것이다. 뒤에 그는 충청도에서 영장을 지내고, 예순 중반에는 남해의 진에서 절제사를 맡았다. 예순 후반에 관직을 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살다가, 일흔 후반에 다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기 안의 병과 죽음】 이 일기가 요즘 특히 주목받는 이유가 하나 있다. 전염병 기록이다. 두창과 홍역이 마을을 돌 때 집안에 누가 걸렸고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약재를 구하러 어디까지 갔고 의원을 불렀는지, 앓는 사람을 어디에 두었는지까지. 나라의 기록은 어느 해에 전염병으로 몇 명이 죽었다고 적지만, 이 일기는 한 집안이 그 앞에서 무엇을 했는지 적는다. 그래서 의학사와 생활사 연구자들이 이 일기를 자주 꺼내 든다.

죽음은 전염병만으로 오지 않았다. 4대에 걸친 대가족의 희로애락이 이 일기의 뼈대인데, 그 안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계속 나온다. 그는 세 번 혼인했고 아내들과 차례로 사별했다고 전한다. 조선 여성의 출산이 어떤 위험이었는지는 이 시리즈 앞 편들에서도 보였다. 쇄미록의 오희문이 딸 단아를 잃고 꿈에서 다시 만났고, 병자일기의 조애중은 다섯 남매를 모두 먼저 보냈다. 노상추의 일기에도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를 잇달아 잃은 대목이 나온다.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또 상을 치른다는 식의 한탄이다.

【세상이 바뀌는데 못 따라가는 사람】 일기가 67년을 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조선이 변하는 것이 보인다. 노비가 양인이 되는 길이 넓어지고, 돈으로 신분을 사는 사람이 늘고, 양반 집안 안에서 적자와 서자의 구분이 흐려지기 시작한 시대다. 이 일기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그 변화를 사료로 정리한 글이 아니라, 그 변화를 불편해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남았다는 것이다.

문중에서 서얼 표시를 빼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집안이 망하는 것은 하루를 기다릴 것도 없겠다고 적었다. 우리 눈에는 완고해 보인다. 그런데 그 완고함이 어디서 왔는지도 이 일기에 있다. 문과 길이 막혀 무과로 돌아섰고, 열 해 넘게 시험에 재산을 다 넣었고, 급제하고도 자리를 못 받아 마흔까지 떠돌았고, 임금의 눈에 우연히 들어서야 겨우 고을 수령이 된 사람이다. 신분 질서가 그에게 준 것은 별로 없었는데,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은 것은 그 질서였다. 이 시리즈는 그를 편들지도 단죄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대목이 조선 후기 양반의 자리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 준다고 적어 둔다.

【기록의 뒷이야기】 67년의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고, 그가 주고받은 간찰첩과 함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일기를 우리말로 옮겨 열두 권으로 완간했고, 원문과 국역문과 원본 이미지를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일기 가운데 지금 가장 쉽게 전체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이 일기다.

사극의 조선 양반은 위풍당당하다. 진짜 조선 양반의 하루는 이랬다. 시험에 열 해를 넣고, 붙고도 백수로 떠돌고, 말단 자리를 부탁하러 다니고, 전염병 앞에서 약재를 구하러 뛰고, 세 번 상처하고, 임금의 눈에 우연히 들어 한 번 피고, 바뀌는 세상을 못 받아들인 채 늙었다. 그걸 67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기 손으로 적었다. 이 사람이 남긴 것은 업적이 아니라 시간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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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기로 읽는 조선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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