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편에서 조선에서 가장 긴 일기를 읽었다. 노상추의 67년이다. 이번 편은 조선에서 가장 두꺼운 일기다. 기간은 그보다 짧은데 분량은 훨씬 많다.
쓴 사람은 황윤석, 전라도 흥덕 지금의 고창 성내면 사람이다. 열 살에 일기를 쓰기 시작해 예순셋으로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까지 썼다. 53년 동안 쌓인 것이 원고 6천여 장, 책으로 묶어 57책이다. 글자 수로 530만 자 안팎이라고 한다. 정약용이 평생 쓴 글을 모은 여유당전서가 500만 자쯤이니, 한 사람의 일기가 그보다 많은 셈이다. 현존하는 조선 일기류 가운데 가장 방대하다.
이름은 이재난고다. 이재는 그의 호이고 난고는 어지러운 초고라는 뜻이다. 책마다 쓰기 시작한 해와 끝낸 해를 적고 난고라는 표제를 달았다. 정리되지 않은 원고라고 자기가 붙인 이름인데, 그 어지러움이 이 기록의 성격이다.
【일기이면서 연구 노트】 지금까지 읽은 일기들은 대개 하루의 일을 적었다. 밥과 병과 손님과 곡식. 이 일기는 거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그날 공부한 것이다.
문학과 경학, 예학과 역사, 지리와 풍수, 음률과 산학, 천문과 역법, 언어와 의학, 농사와 공업과 상업까지. 무엇을 배웠고 무엇이 이해되지 않았고 어떻게 풀었는지가 일기 안에 그대로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일기이면서 평생의 연구 노트다. 요즘 학계가 그를 백과전서파로 분류하는 이유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수학과 천문이다. 18세기 조선에는 청을 거쳐 서양의 학문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칙 계산법, 유클리드 기하학, 마테오 리치가 소개한 산수와 역법, 삼각측량. 황윤석은 그것을 구해 읽고 익히고 일기에 정리했다. 이 시리즈에서 우리는 꿈으로 길흉을 점치던 선비도 보았고 손자의 장수를 빌며 굿을 한 선비도 보았다. 같은 나라에서 한 세대 뒤에는 기하학을 붙들고 앉은 선비가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이 하나의 얼굴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음악 쪽도 만만치 않다. 그는 종묘 제향에 여러 차례 참례해 제례악을 직접 겪었고, 뒤에는 궁중 음악을 맡는 관청의 주부가 되어 악률과 악기와 악서를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열두 율의 길고 짧은 순서라든가 거문고 줄을 짚는 옛 법과 지금 법이 다른 까닭 같은 것을 일기에 논문처럼 적어 놓았다. 조선 음악사 연구자들이 이 일기를 꺼내 드는 대목이다.
【그런데 벼슬은 잘 안 됐다】 그의 삶이 순탄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대과에는 붙지 못했고,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 말년에 충청도의 목천과 전의에서 현감을 지냈는데 재직 기간이 모두 한 해를 채우지 못했다. 앞 편 노상추가 무과에 붙고도 마흔까지 자리를 못 얻었던 것과 비슷한 자리다. 실력과 벼슬이 따로 가는 시대였다.
그러니 그가 남긴 것은 관직의 기록이 아니다. 그는 서울에 머물 때도 계속 공부하고 계속 적었다. 이 일기의 가치는 그가 무엇이 되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알고 싶어 했느냐에 있다.
【냉면 한 그릇과 육백 리 길】 딱딱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1768년 7월, 과거 시험을 본 다음 날 점심에 일행과 함께 냉면을 시켜 먹었다는 대목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음식을 시켜 먹은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꼽힌다. 250년 전 일기에 시험 끝나고 냉면 먹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이다.
고향 흥덕에서 서울까지 오르내린 길도 자세히 적혀 있다. 육백 리 가까운 거리를 엿새나 이레에 걸쳐 갔고, 어디서 자고 어디를 지났으며 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가 남았다. 앞 편의 노상추가 선산에서 한양까지 일주일 걸리는 과거길을 오갔던 것과 같은 시대, 같은 종류의 길이다. 두 일기를 나란히 놓으면 18세기 조선의 지방 지식인이 서울을 어떻게 오갔는지가 동쪽과 서쪽 두 갈래로 보인다.
【초서라는 벽】 이 일기가 연구되기까지 오래 걸린 이유가 하나 있다. 한문 초서로 쓰였기 때문이다. 초서는 흘려 쓴 글씨라 한문을 읽는 사람도 해독이 쉽지 않다. 앞 편들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고대일록도 초서였고, 묵재일기도 초서라 연구 과제로 교감과 역주를 따로 진행했다.
이재난고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이 1994년부터 열 해에 걸쳐 영인해 펴냈고, 색인집까지 합쳐 열 책이 됐다. 그렇게 정서가 되고 나서야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국역은 아직 다 마치지 못했다. 530만 자니까 그럴 만하다.
그의 글 가운데 일부는 일찍부터 책으로 나왔다. 손자와 전라도관찰사가 힘을 모아 문집을 냈고, 십여 년 뒤 후손과 고을 선비들이 속고를 냈다. 다만 그것은 방대한 난고에서 골라 뽑은 것이라, 일기 전체와는 성격이 다르다.
【기록이 고향으로 돌아가다】 이 기록의 근래 이야기가 있다. 후손이 보관해 온 난고의 일부와 목판이 고향 고창군에 기탁·기증됐다. 이백오십 년 만의 귀향이라고 불렸다. 그 무렵 조사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책이 확인됐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행장에 근거하면 그가 남긴 저술이 백 권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지금 전하는 것도 전부가 아닐 수 있다.
이 일기는 전북의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고, 2023년에는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도 등록됐다. 문학이나 역사 자료가 아니라 과학기술 자료로 등록됐다는 점이 이 기록의 성격을 그대로 말해 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고창에 섰다. 지역에서는 보물 지정을 건의하고 있다.
【왜 이 사람은 계속 적었을까】 이 시리즈에서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각자 이유가 있었다. 유희춘은 19년을 빼앗겨서, 오희문은 떠도는 삶을 잊지 않으려고, 조애중은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노상추는 자기 몫을 기록해 두려고 적었다. 황윤석의 이유는 조금 다르다. 그는 알고 싶어서 적었다.
무엇을 배웠고 어디까지 이해했으며 무엇이 여전히 막혀 있는지를 적어 두는 일, 이것은 요즘 말로 하면 공부 노트이고 연구 일지다. 나라가 그에게 시킨 일도 아니었고 관직에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어지러운 초고라 스스로 이름 붙인 것을 53년 동안 쌓아 두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어지러운 초고가 18세기 조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궁금해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두꺼운 증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