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전쟁이 아니었다. 1591년 11월 27일, 쉰셋의 한양 양반 오희문이 종 둘을 데리고 남쪽으로 길을 나섰다. 처남 이빈이 전라도 장수 현감으로 부임해 있었고, 누이는 영암에 시집가 살고 있었다. 가는 길에 어린 시절을 보낸 충청도 영동의 외가에도 들를 참이었다. 그런데 이 여행에는 더 급한 목적이 있었다. 장흥과 성주에 있는 노비들에게 신공을 받는 일이었다.
신공이 무엇인지부터 짚고 가자. 조선 양반은 노비를 전부 집에 두고 부리지 않았다. 상당수는 지방에 내려보내 농사를 짓게 하고, 해마다 곡식이나 베를 걷어 올리게 했다. 이런 노비를 외거노비라 하고, 그들이 바치는 것을 신공이라 했다. 과거에 붙지 못해 벼슬이 없던 오희문에게 이 신공은 집안 살림의 핵심이었다. 그러니 직접 내려가 받아야 했다. 몇 달이면 돌아올 여행이었다.
【장수에서 들은 소식, 1592년 4월】 이듬해 4월 16일, 장수의 처남 집에 머물던 그에게 소식이 날아들었다. 왜선 수백 척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고 부산진성이 공격당했다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이었다. 하필 그가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였다. 왜군은 스무 날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떠났다. 오희문의 노모와 아내와 자식들은 전부 한양에 있었다.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길 한가운데를 왜군이 막고 있었다.
그런데 오희문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처남이 고을 수령이라는 점이었다. 관아에는 파발과 공문이 매일 드나들었고, 그는 그 소식을 날마다 받아 적었다. 이 일기가 사료가 된 이유가 여기 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말이 달랐다. 지켰다는 사람, 이미 함락됐다는 사람. 그는 그 뒤죽박죽인 소문도 그냥 적지 않고 누가 어디서 들었는지까지 남겼다. 눈으로 본 것과 소문으로 들은 것을 가른 것, 이 습관이 이 일기를 소설이 아니라 사실로 만든다.
6월, 왜군이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밀고 내려왔다. 오희문은 처남의 가족, 고을 아전들과 함께 산으로 숨었다. 비가 오면 옷과 짐이 젖고, 길이 막히면 곡식이 끊겼다. 그 와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해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실제로 싸우는 의병장은 높이 평가했지만, 이름만 걸고 관청 곡식을 축내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었다. 어느 의병이 왜군의 목이라며 바친 수급이 실은 목화 따다 살해된 조선 백성의 머리였다는 대목도 일기에 있다.
【가족을 다시 만나다】 전쟁이 난 지 한 해 가까이 지나서야 그는 가족의 피란처를 알아내 다시 만났다. 살아서 얼굴을 마주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한양은 여전히 전쟁터였다. 이제 온 가족이 남의 땅에서 피란살이를 해야 했다. 충청도 홍주에서 시작해 1593년 여름 임천으로 옮겼다. 먹여야 할 입은 열 명이 넘었다.
여기서부터 이 일기의 진짜 얼굴이 나온다. 1593년 봄, 집안에 전염병이 돌아 그 자신도 석 달 가까이 앓아누웠다. 실제로 이 무렵 일기에는 한동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9년을 적어 온 사람이 붓을 들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 빈 날짜가 오히려 그해를 말해 준다. 왜군의 칼을 피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열병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신분 질서가 소리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내종 둘이 말 한 필에 양식과 살림 도구까지 싣고 밤사이 달아났다. 그 말은 피란길에 노모를 태울 유일한 수단이었다. 전쟁으로 관아의 힘이 약해져 잡아올 방법이 없었다. 더 놀라운 일은 집 안에서 벌어졌다. 여종 하나가 밥을 똑같이 나눠 주지 않는다며 항의하고는 솥에 불을 지피지 않겠다고 드러누웠다. 400년 전 조선의 파업이다. 양반이라면 매를 들어야 정상이었는데, 오희문은 베를 내주며 달랬다. 밥 지을 사람이 없으면 온 식구가 굶어야 했으니까. 그날 일기에 그는 노비가 상전 위에 올랐다고 적었다.
【기근, 1594년】 1594년 4월 3일자 일기는 이 책에서 가장 참혹한 대목이다. 요즘 마을에 거지가 안 보인다는 말을 듣고 보니 두어 달 사이 대부분 굶어 죽은 것이었다.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육촌 친척까지 죽여 먹었다는 말이 들려왔고, 혼자 길을 가면 뒤에서 쫓아온다고들 했다. 그는 이러다 사람의 씨가 마르겠다고 적었다. 다만 그는 이것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분명히 밝혔다. 직접 본 것은 따로 있었다. 길가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일곱여덟 살 아이와 여인. 남편이 셋이서 구걸해도 얻는 것이 없자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 가 버린 것이었다.
오희문 자신도 남의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노비들을 시켜 술과 떡을 빚어 장에 내다 팔게 했다. 아내는 떡을 만들고 여자아이들과 여종들은 행전을 만들었다. 술을 좋아하면서 자기는 한 잔 마시지 못했다. 종이 팔아 온 쌀을 되질해 보고 한 말이 모자란다며 괘씸해하는 대목도 있다. 야박해 보이지만, 그 한 말이 겨울을 좌우하던 시절이었다.
【구원군의 얼굴】 1593년 여름 장터에서 그는 명나라 군사를 보았다. 평양성을 되찾은 구원군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지나가던 소금 장수의 말을 빼앗으려다 실패하자 아무 상관없는 조선 사람을 결박해 매질하고 술과 꿀과 병아리를 내놓으라 했다. 고을 현감조차 그들 앞에서 손을 쓰지 못했다. 오희문은 왜군을 물리쳐 주기를 바라면서도 이 횡포를 빠짐없이 적었다. 구원자와 수탈자가 한 얼굴에 겹쳐 있었다.
【막정과 분개와 송노】 이 일기에서 가장 아픈 대목은 세 노비의 이야기다. 막정은 서른일곱 해를 이 집에서 일한 늙은 사내종이었고, 분개는 그의 아내였으며, 송노는 같은 집의 또 다른 사내종이었다. 1595년 가을 송노가 달아났다. 일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마음을 나눈 상대가 분개였다. 오희문 부부는 분개를 안방에 가두고 지키게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잠긴 방 주변이 온통 파헤쳐져 있었다. 송노가 밤사이 돌아와 굴뚝으로 들어가려다 막히자 마구간 바닥에서 분개의 방 밑으로 땅굴을 판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달아났다. 오희문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분노했다. 그런데 무너진 사람은 따로 있었다. 막정이었다. 아내가 동료와 달아난 뒤 그는 일을 거부하고 밥을 먹지 않았고, 그해 겨울 세상을 떠났다. 오희문은 원망하면서도 관을 마련해 묻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같은 사건이 세 사람에게 완전히 다르게 새겨졌다. 송노에게는 사랑, 막정에게는 삶의 붕괴, 오희문에게는 배신.
【딸과 아들, 1597년】 막내딸 단아는 피란길 내내 아버지의 마음을 붙들어 주던 아이였다. 1597년 2월 1일 밤부터 두통을 앓다가 이튿날 낮 말 한마디 못 하고 떠났다. 그는 붙들고 통곡했지만 한없는 슬픔을 어찌하겠느냐고 적었다. 그리고 한 달 반 뒤, 성균관에서 사람이 방목을 들고 나팔을 불며 찾아왔다. 평강 현감으로 있던 맏아들 오윤겸이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이 집안에서 대를 이어 처음 나온 문과 급제자였고, 아버지가 평생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기쁨 뒤에 바로 걱정이 붙었다. 문과 급제자는 나라가 부르면 멀리 떠나야 했다. 그는 한 몸을 나라에 맡겼으니 이제부터는 내 아들이 아니라고 적었다. 아들의 성공이 곧 긴 이별의 시작이었다. 그해 정유재란이 터졌다.
가족은 임천을 정리하고 아들이 현감으로 있는 강원도 평강으로 옮겼다. 1598년 봄 그는 새 벌통을 옛 벌통 옆에 놓았다가 두 무리가 싸워 죽은 벌이 한 됫박이나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전쟁 통에 벌 싸움을 말려 보려던 예순 살 양반이다. 5월 아들이 황해도로 떠나던 날, 그는 문밖에 서서 아들의 흰옷이 숲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고 산을 넘어 아주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서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하고 왜군이 물러났다. 7년 전쟁이 끝났다. 그런데 이듬해 환갑을 맞은 그는 예순 나이에도 늘 배고픔 속에 산다고 적었다. 그리고 죽은 딸 단아가 자색 저고리를 입고 꿈에 나타나 먹을 것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아내와 등불 아래 마주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돌아오다, 1601년】 일기 끝 무렵, 6년 동안 사라졌던 이름이 다시 나온다. 송노와 분개. 두 사람은 분개의 친정어머니가 사는 곳에서 부부처럼 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둘이나 낳아 있었다. 거처가 알려지자 송노가 물품을 챙겨 옛 주인을 찾아와 엎드렸다. 오희문은 뜻밖에도 그를 다시 받아들였다. 세월이 흘러 분노가 누그러진 데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도망 노비라는 굴레는 그대로였다.
1601년 2월 27일,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이제 종이도 다 되었고 서울에 돌아와 더는 떠돌지 않으니 붓을 그친다고. 승리를 선언한 것도, 살아 돌아온 자신을 자랑한 것도 아니었다. 종이가 다했고 떠도는 삶이 끝났으니 그만 쓴다는 말. 그렇게 필사본 일곱 책 800여 장이 남았다. 쇄미록이라는 이름은 시경의 한 구절, 자잘하고 보잘것없는 떠돌이라는 뜻에서 따왔다. 자기 9년을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뒷이야기】 아들 오윤겸은 벼슬이 계속 올라 1628년 영의정에 올랐다. 아버지는 그보다 15년 전 세상을 떠났고, 아들 덕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평생 대과에 붙지 못한 사람의 한이 죽은 뒤에 풀린 셈이다. 일기는 해주 오씨 집안에 전해져 1991년 보물로 지정됐고, 지금은 국립진주박물관에 있다. 2019년 박물관이 여덟 권짜리 새 번역을 냈다. 승자의 기록이 전투와 공을 남긴다면, 이 일기는 전쟁을 견디는 데 무엇이 필요했는지를 남겼다. 쌀 한 말과 말 한 필, 소식을 전할 사람 하나, 그리고 살아 돌아올 가족을 기다리는 시간. 너무 사소해 나라의 기록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들이다. 바로 그 사소함 때문에 이 일기는 400년 뒤 전쟁 뒤편의 삶을 보여 주는 사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