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는 다들 안다. 나라를 구한 장군의 기록이다. 그런데 조선 군인이 남긴 일기가 하나 더 있다. 여기에는 영웅이 없다. 대신 평범한 초급 군관이 변방에서 매일 무엇을 했는지가 날것 그대로 적혀 있다. 누구와 술을 마셨고, 활을 몇 발 쏘았고, 어느 기생과 밤을 보냈고, 언제 병이 났고, 집에 보내 달라고 몇 번을 울며 빌었는지까지. 일부러 그런 것을 기록하려던 게 아니다. 하루를 적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름은 부북일기(赴北日記). 북쪽으로 부방(赴防)하러 간 일기라는 뜻이다. 부방이란 남쪽 도의 무사를 뽑아 함경도와 평안도의 국경을 지키게 한 제도였다. 무과에 급제한 사람은 관직을 받기 전에 이 근무를 한 번 치러야 했다. 울산의 무관 박계숙(1569~1646)이 1605년에, 그 아들 박취문(1617~1690)이 1644년에 같은 길을 갔다. 두 사람 다 함경도 회령에서 한 해 남짓 근무했고, 집을 나선 날부터 돌아온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적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기 뒤에 자기 일기를 덧붙였고, 체제까지 아버지 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한 권이 됐다. 모두 79장, 아버지가 24장, 아들이 55장이다.
【아버지의 길, 1605년】 박계숙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박홍춘의 아들이다. 전쟁 중이던 1594년에 무과에 급제했지만 부방 길에 오른 것은 열한 해 뒤, 서른일곱 살 때였다. 1605년 10월 15일 울산을 떠나 함경도 회령부의 보을하진으로 갔고, 1607년 1월 1일 집에 돌아왔다. 전쟁이 끝난 지 일곱 해, 나라는 아직 무너진 성곽과 줄어든 군사를 추스르는 중이었고, 북쪽에서는 여진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남쪽 무사를 북방으로 보내는 제도가 이때 다시 힘을 받은 이유다.
울산에서 회령까지는 두 달이 넘게 걸리는 길이었다. 일기에는 날마다 어디서 자고 어디를 지났는지가 적혀 있어, 17세기 초 조선의 길과 역참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국가유산 지정 사유에도 이 점이 첫손에 꼽힌다. 길 위에서 그는 같은 임무로 북방에 갔다가 죽은 무사의 시신이 고향으로 실려 가는 것을 만났고, 술 몇 잔과 마른 안주를 차려 제사를 지내 주었다. 부방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함경도 경성에 닿았을 때의 장면은 이 일기가 왜 유명한지를 보여 준다. 그는 출발하면서 변방에 있는 동안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경성에서 만난 기생 금춘과 촛불 아래 밤늦도록 이야기만 나누고 잠자리를 갖지 않은 첫날과 둘째 날은 그 다짐을 지킨 날이었다. 셋째 날 그는 시 한 수를 지어 건넸고, 다짐은 거기서 끝났다. 이 대목에서 주고받은 말과 시가 한문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400년 전 변방의 남녀가 어떤 말로 서로를 떠보았는지가 문장으로 남은 드문 자리다. 회령에 도착한 뒤에는 배종이라는 기생과 한 해 넘게 가까이 지냈다. 근무가 끝나고 울산으로 돌아가면서 그 관계는 끝났다. 그런 줄 알았다.
【아들의 길, 1644년】 박취문은 스물여덟에 무과에 급제한 그해 겨울, 12월 9일 집을 나섰다. 아버지와 달리 다짐 같은 것은 없었다. 동해안 길을 따라 삼척, 강릉을 지나는 동안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여자를 바꿔 가며 잠자리를 가진 것이 날짜별로 적혀 있다. 관아에 딸린 여종, 술집 여자, 기생. 그러다 강릉에서 병을 얻었다. 한 달 가까이 그 기록이 끊긴다. 일기에 적힌 병의 이름은 성병이었다. 이 대목을 읽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공개를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회령에 도착한 뒤의 일기는 진짜 군인의 하루다. 활쏘기가 가장 많이 나온다. 아들의 일기에만 활쏘기 장면이 120번 넘게 등장한다. 훈련이자 놀이였고, 시합에서 진 쪽이 벌을 받는 것으로 긴장을 풀었다. 지면 목을 베자는 농담을 걸고 진 사람을 뜰로 끌어내 묶었다가, 송아지로 목숨값을 대신하는 것으로 흥정을 마치고 잔치를 여는 장면이 그 예다. 동료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기 자존심을 접고 처벌을 막아 준 일도 적혀 있다. 삼천 리 밖까지 함께 온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군관에게는 방직기(房直妓)라는 여자가 배정됐다. 이름은 빨래와 밥을 맡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근무 기간의 아내였다. 관에 속한 기생이나 여종이 맡았고, 거절하면 벌을 받았다. 일기에는 방직기가 되기를 거부한 관비의 어머니와 오빠를 불러 매질한 일이 적혀 있다. 조선의 변방이 여성의 몸을 어떻게 썼는지가 한 줄에 박혀 있다. 이 시리즈는 이 대목을 빼거나 줄이지 않는다.
박취문이 맡은 일은 조총 만드는 일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근무 기간이 끝나 갈 무렵 조총 수백 자루를 더 만들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는 종일 하소연했고 울기까지 했다. 울산에 여든 가까운 부모가 있었고, 그는 외아들이었다. 자기가 돌아가지 않으면 부모를 모실 사람이 없었다. 몇 달을 매달린 끝에 겨우 풀려나 1646년 4월 4일 집에 돌아왔다.
【40년을 건너온 인연】 회령에서 아들에게 한 여인이 찾아왔다. 이름은 월매. 40년 전 아버지가 가까이 지냈던 기생 배종의 딸이었다. 배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박계숙은 일흔을 넘긴 노인이었다. 월매는 울산에서 새 군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이것저것 물었고, 이 군관이 어머니가 평생 이야기하던 그 사람의 아들임을 알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늦도록 죽은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박취문이 회령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가까이 지냈다. 변방의 기생 모녀와 남쪽에서 온 군관 부자가 40년을 사이에 두고 이어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서술에도 실려 있을 만큼 잘 알려진 대목이다.
【두 일기를 나란히 놓으면】 아버지의 1605년과 아들의 1644년 사이에는 광해군의 즉위와 폐위,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있다. 나라가 두 번 침략당하고 임금이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었으며, 아들이 길을 떠난 바로 그해에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이 북경에 들어갔다. 회령은 그 청과 조선이 물건을 바꾸는 시장이 서던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변방 생활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활쏘기, 술자리, 기생, 방직기. 40년이 지나고 전쟁을 두 번 겪었는데도 군영의 하루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나라의 역사에서는 격변이었던 40년이 한 군영의 일상에서는 같은 날의 반복이었다는 것, 이것이 이 일기가 실록 옆에 놓여야 하는 이유다.
【일기의 뒷이야기】 이 일기는 울산 박씨 집안에 대대로 전해졌다. 학계에 소개된 것은 1990년대이고, 2006년 1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으며, 2012년 울산박물관이 번역본과 영인본을 함께 묶어 학술총서로 냈다. 지금은 울산박물관에 있다. 사극 속 조선 군인은 갑옷을 입고 나라를 지킨다. 부북일기의 군인은 도포 차림으로 시를 건네고, 활을 쏘고, 병에 걸리고, 동료의 목숨값을 송아지와 흥정하고, 집에 보내 달라고 울었다. 그리고 그것을 전부 적어 후손에게 남겼다. 난중일기에 나라를 구한 영웅이 있다면 부북일기에는 해학과 눈물, 의리와 욕망이 뒤섞인 날것의 조선이 있다. 어느 쪽이 진짜 조선이었나. 둘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