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일록 — 붓을 들던 시골 선비가 의병을 모으러 다닌 18년

1592 4월 23일 · 경상도 함양

쇄미록에서 우리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본 임진왜란을 읽었다. 오희문은 싸우지 않았다. 산으로 숨고 가족을 먹이고 소문을 적었다. 이번 편은 같은 7년을 다른 땅에서 본 기록이다. 왜군이 상륙한 바로 그 경상도, 그리고 이 사람은 숨지 않고 의병을 모으러 다녔다.

이름은 고대일록. 함양의 선비 정경운이 왜란 발발 사흘 뒤부터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까지 18년을 적었다. 필사본 넉 권이다. 놀라운 것은 시작 날짜다. 1592년 4월 2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것이 13일이었으니, 소식이 함양에 닿고 며칠 만에 그는 붓을 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 돌아보며 쓴 기록이 아니라 그날그날 적은 기록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기록 대부분이 전후에 정리된 것이어서 이 차이가 크다.

【어려서 고아가 된 사람】 정경운은 어려서 부모를 잃었고, 전쟁 전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낮은 벼슬자리에 있었다. 스승은 정인홍이다. 지리산 아래 경상우도는 조식의 학맥이 뿌리내린 땅이었고, 그 문하는 실천을 앞세우는 기풍이 강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이 학맥의 사람들이 대거 의병으로 일어선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왜란이 터진 지 스무 날쯤 뒤, 그는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함양의 동료들과 함께 천 명 가까운 의병을 모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초유사 김성일과 의병장 김면의 밑에서 소모유사와 종사관을 맡았다. 소모라는 말이 생소할 것이다. 사람을 모으는 일이다. 즉 그의 임무는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고을을 돌며 싸울 사람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끌어모으는 것이었다.

이 대목이 이 일기를 특별하게 만든다. 전투 기록은 장수들이 남겼다. 그런데 그 전투를 가능하게 한 일, 누가 몇 명을 모았고 쌀을 어디서 얼마나 걷었으며 활과 화살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기록이 드물다. 정경운의 자리가 바로 거기였다. 이름 없는 의병들의 전쟁이 이 일기에 남은 이유다.

【경상우도에서 본 전쟁】 그는 김성일과 김면의 참모였으므로 경상우도 의병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소상히 적을 수 있었다. 스승 정인홍과 동문 김면, 조종도, 곽준, 이대기 같은 이름이 일기에 나온다. 이들은 낙동강 서쪽에서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아선 사람들이다. 나라의 기록에는 이름 한 줄로 지나가는 일들이 여기서는 날짜와 사람 수와 곡식 섬수로 적혀 있다.

일기는 의병만 적지 않았다. 굶주림과 살육, 황폐해진 국토가 그대로 있다. 왜군의 동태를 살펴 보고한 대목, 성주에 있던 왜군이 쌀을 찧는 것을 보고 달아날 준비라고 알린 내통자의 말까지 적혀 있다. 이순신과 김덕령 같은 장수들의 소식도 들어온다. 그리고 쇄미록과 똑같이, 구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의 횡포를 적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각각 다른 도에 있었는데 같은 것을 보았다. 이것이 개인 일기 여러 권을 나란히 놓아야 하는 이유다. 한 사람의 기록은 증언이지만 여러 사람의 기록이 겹치면 사실이 된다.

【1597년, 남계서원이 불타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전라도를 노리고 다시 올라왔고, 남원성이 무너지고 경상우도의 고을들이 다시 짓밟혔다. 함양의 남계서원도 이때 불에 탔다. 조선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이자 정여창을 모시던 곳이다.

여기서 정경운이 한 일이 그 사람을 보여 준다. 그는 이 서원의 유사였고, 불길 속에서 위패를 옮겨 숨겼다가 뒤에 다시 봉안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칼과 곡식을 모으러 다닌 사람이 종이와 위패를 지킨 것이다. 이 시리즈의 4편에서 조애중이 피란 짐 가운데 조상의 신주를 가장 앞세운 것과 같은 자리다. 무엇을 먼저 챙기는지가 그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말해 준다.

【전쟁이 끝난 뒤의 전쟁】 대개 임진왜란 기록은 1598년에 끝난다. 그런데 이 일기는 그 뒤로 11년을 더 간다. 그리고 전쟁 뒤의 이야기가 오히려 낯설고 생생하다.

황폐해진 고을을 복구하는 일이 사족들의 몫으로 떨어졌다. 논밭을 다시 일구고 흩어진 사람을 모으고 서원을 다시 세워야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향전이라 부르는 고을 안의 다툼이 벌어진다. 남계서원을 어디에 다시 세울 것인가, 누구를 모실 것인가를 두고 함양의 사족들이 갈라져 싸운 것이다. 정경운은 그 다툼에 휘말려 마음고생을 했다.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웠던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자 서원 자리를 두고 등을 돌린 셈이다.

중앙 정계의 바람도 이 시골 고을까지 불어왔다. 그의 스승 정인홍은 광해군 대에 큰 권력을 쥐었다가 뒤에 몰락하는 인물이다. 일기가 끝나는 1609년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이니, 스승의 시대가 열리는 무렵에 붓이 멈춘 것이다. 그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고, 훗날 남계서원의 원장에 올랐던 기록도 남아 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말로 끝나지 않는 기록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승리 다음에 온 것은 굶주림과 복구와 서로에 대한 다툼이었다. 나라의 기록은 전쟁의 끝을 1598년으로 적지만, 고을에 살던 사람의 기록은 전쟁이 훨씬 오래 이어졌다고 말한다.

【발견된 일기】 이 일기가 세상에 나온 과정도 이야기가 된다. 초서로 쓰인 넉 권은 오래도록 후손의 집에 있었다. 1986년 한 대학 교수가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있던 10대 후손의 집에서 이 일기를 발견해 학계에 소개했다. 그 뒤 남명학연구원이 여러 해에 걸쳐 완역해 2009년에 냈고, 지금은 대중 번역본으로도 읽을 수 있다. 정경운의 종매부가 남긴 또 다른 친필 일기도 함양의 후손 집에 있다고 전한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런 일기가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 권의 임진왜란】 이제 우리는 같은 7년을 세 자리에서 볼 수 있다. 난중일기는 바다에서 지휘한 사람의 기록이고, 쇄미록은 싸우지 않고 가족을 먹인 사람의 기록이며, 고대일록은 싸울 사람을 모으러 고을을 돌아다닌 사람의 기록이다. 세 권을 겹쳐 놓으면 전쟁이 지도 위의 화살표가 아니라 사람의 자리로 보인다. 배를 몰 사람과 밥을 지을 사람과 그 둘을 모아 오는 사람이 다 필요했던 7년이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계속 말하는 것이 여기서 또 확인된다. 나라의 기록은 무엇이 결정됐는지를 남기고, 개인의 기록은 그 결정이 누구의 하루로 이루어졌는지를 남긴다. 함양의 시골 선비가 붓을 놓지 않은 덕에, 이름이 남지 않은 천 명의 의병이 어디서 어떻게 모였는지가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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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기로 읽는 조선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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