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일록 루트
싸울 사람을 모으러 고을을 돌던 시골 선비의 18년 — 함양에서 합천·성주·진주,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의 전쟁
타임라인 (12개 지점)
- 왜란 사흘 뒤, 붓을 들다 (1592 4월 23일 · 경상도 함양)
그때 나라는: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진과 동래성이 무너지고 관군의 방어선이 차례로 뚫리는 중이었다. 이 사람은: 소식이 함양에 닿고 며칠 만에 정경운이 일기를 시작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낮은 벼슬자리에 있던 서른일곱의 선비였다. 임진왜란 기록은 대개 전쟁이 끝난 뒤 정리된 것인데, 이 일기는 그날그날 적은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날부터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까지 18년을 적는다.
-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1592 5월 10일 · 경상도 합천)
그때 나라는: 관군이 무너지자 각 고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지리산 아래 경상우도는 조식의 학맥이 뿌리내린 땅이었고, 실천을 앞세우는 그 문하에서 의병장이 대거 나왔다. 이 사람은: 왜란 스무 날쯤 뒤 정경운은 함양의 동료들과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천 명 가까운 사람을 모았다고 전한다. 스승은 정인홍이었고, 동문인 김면·조종도·곽준·이대기 같은 이름이 일기에 나온다.
- 소모유사 — 그의 임무는 사람을 모으는 일이었다 (1592 6월 · 경상우도 여러 고을)
그때 나라는: 초유사 김성일이 경상우도에서 의병을 모아 조직하고 있었고, 의병장 김면은 낙동강 서쪽에서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아섰다. 이 사람은: 정경운은 그 밑에서 소모유사와 종사관을 맡았다. 소모는 사람을 모으는 일이다. 칼을 휘두르는 자리가 아니라 고을을 돌며 싸울 사람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끌어모으는 자리였다. 전투 기록은 장수들이 남겼지만, 누가 몇 명을 모았고 쌀을 어디서 얼마나 걷었는지는 기록이 드물다. 이 일기가 특별한 이유다.
- 진주성 — 서쪽 길을 막아낸 자리 (1592 10월 · 경상도 진주)
그때 나라는: 10월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했으나 김시민이 적은 병력으로 막아냈다.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을 지킨 싸움이었다. 이 사람은: 정경운은 함양과 진주 일대에서 활동했고, 일기에는 이 무렵 경상우도 의병들의 움직임과 왜군의 동태가 날짜별로 적혀 있다. 성주에 있던 왜군이 쌀을 찧는 것을 보고 달아날 준비라고 알려 온 사람의 말까지 남아 있다.
- 굶주림과 명군의 횡포 — 다른 도에서 같은 것을 보았다 (1594 · 경상도 함양)
그때 나라는: 전선이 멎은 사이 전국에 큰 기근이 들었고, 구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를 먹이고 접대하는 짐이 고을과 백성에게 떨어졌다. 이 사람은: 일기에는 굶주림과 살육, 황폐해진 국토가 그대로 있다. 그리고 명나라 군대의 횡포를 적었다. 같은 무렵 전라·충청에서 쇄미록을 쓰던 오희문도 같은 것을 적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다른 도에 있었다. 한 사람의 기록은 증언이지만 여러 사람의 기록이 겹치면 사실이 된다.
- 정유재란 — 경상우도가 다시 짓밟히다 (1597 8월 · 전라도 남원)
그때 나라는: 강화 교섭이 깨지고 일본이 다시 쳐들어왔다. 이번에는 전라도가 목표였다. 남원성이 무너지고 경상우도의 고을들이 다시 짓밟혔다. 이 사람은: 함양은 남원과 지리산을 사이에 둔 고을이다. 전선이 바로 옆으로 지나갔다. 일기에는 이때의 피란과 참상이 적혀 있다.
- 남계서원이 불타다 — 위패를 옮겨 숨기다 (1597 · 경상도 함양 남계서원)
그때 나라는: 정유재란의 불길에 서원과 향교가 여럿 탔다. 남계서원은 조선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이자 정여창을 모시던 곳이다. 이 사람은: 정경운은 이 서원의 유사였다. 불길 속에서 위패를 옮겨 숨겼다가 뒤에 다시 봉안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칼과 곡식을 모으러 다닌 사람이 종이와 위패를 지킨 것이다. 이 시리즈 3편에서 조애중이 피란 짐 가운데 조상의 신주를 가장 앞세운 것과 같은 자리다. 무엇을 먼저 챙기는지가 그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말해 준다.
- 전쟁이 끝났다 — 그런데 일기는 11년을 더 간다 (1598 12월 · 경상도 함양)
그때 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군이 물러났다. 노량에서 이순신이 전사하며 7년 전쟁이 끝났다. 이 사람은: 대개 임진왜란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그런데 이 일기는 그 뒤로 11년을 더 간다. 그리고 전쟁 뒤의 이야기가 오히려 낯설고 생생하다. 나라의 기록은 전쟁의 끝을 1598년으로 적지만, 고을에 살던 사람의 기록은 전쟁이 훨씬 오래 이어졌다고 말한다.
- 고을을 다시 일으키다 — 복구는 사족의 몫이었다 (1600 · 경상도 함양)
그때 나라는: 전쟁이 끝난 땅에는 사람도 소도 씨앗도 모자랐다. 황폐해진 고을을 복구하는 일이 지역 사족들의 몫으로 떨어졌다. 이 사람은: 논밭을 다시 일구고 흩어진 사람을 모으고 서원을 다시 세우는 일에 매달렸다. 일기의 무게가 전쟁에서 살림과 향촌으로 옮겨 간다. 이 부분이 임진왜란 뒤 향촌 사회가 어떻게 회복됐는지를 보여 주는 드문 기록으로 꼽힌다.
- 향전 — 함께 싸운 사람들이 서원 자리를 두고 갈라지다 (1603 · 경상도 함양)
그때 나라는: 전쟁 뒤 고을마다 누가 향촌의 주도권을 쥐는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이를 향전이라 한다. 이 사람은: 남계서원을 어디에 다시 세우고 누구를 모실 것인가를 두고 함양의 사족들이 갈라져 싸웠고, 정경운은 그 다툼에 휘말려 마음고생을 했다.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자 서원 자리를 두고 등을 돌린 셈이다. 승리 다음에 온 것은 굶주림과 복구와 서로에 대한 다툼이었다.
- 붓이 멈추다 — 스승의 시대가 열리는 무렵 (1609 10월 7일 · 경상도 함양)
그때 나라는: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그의 스승 정인홍은 이 무렵 큰 권력을 쥐게 되고 뒤에 몰락한다. 이 사람은: 1609년 10월 7일 일기가 멈춘다.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이다. 18년, 넉 권. 뒤에 남계서원의 원장에 올랐던 기록도 남아 있다.
- 후손의 집에서 발견되다 — 그리고 완역까지 (1986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그때 나라는: 초서로 쓰인 조선 일기는 읽어낼 사람이 적어 문중에 있어도 알려지지 않는 일이 많았다. 이 사람은: 초서 넉 권은 오래도록 후손의 집에 있었다. 1986년 한 대학 교수가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의 10대 후손 집에서 이 일기를 발견해 학계에 소개했고, 남명학연구원이 여러 해에 걸쳐 완역해 2009년에 냈다. 정경운의 종매부가 남긴 또 다른 친필 일기도 함양의 후손 집에 있다고 전한다. 번역되지 않은 그런 일기가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