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일기 — 예순셋 안주인이 눈을 녹여 마시며 한글로 쓴 4년

1636 12월 · 한양 → 죽도(보령) → 여산 → 충주 → 한양

우리가 아는 병자호란은 절반이다. 남한산성의 47일, 삼전도에서 무릎 꿇은 임금. 전부 성 안의 이야기다. 성 밖의 이야기는 한 권의 책에 남았다. 예순셋 노부인이 피란길에서 한글로 쓴 일기다.

쓴 사람은 조애중이다. 조선 여인으로는 드물게 이름 두 글자가 전한다. 사랑할 애에 무거울 중. 남편은 남이웅, 인조 때 좌의정까지 오른 중신이다. 열일곱에 시집와 반백년을 함께 살았다. 남 보기에 부러울 것 없는 집안이었지만 이 집에는 아픔이 하나 있었다. 슬하의 다섯 남매를 모두 부모보다 먼저 떠나보냈다.

【피란길, 1636년 겨울】 청이 나라 이름을 바꾸고 형제가 아니라 신하가 되라고 통보했을 때 조정은 오랑캐를 황제로 섬길 수 없다는 목소리가 압도했다. 청 태종은 말 대신 군대로 답했다. 12월,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고 선봉 기병은 성을 하나하나 함락시키는 대신 그냥 지나쳐 달렸다. 목표가 땅이 아니라 임금 하나였기 때문이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하려다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그 행렬에 남이웅이 있었다.

문제는 한양 집이었다. 성문이 닫히기 직전 그 안에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남편이 아내에게 보낸 급보였다.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짐 챙길 생각도 말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떠나라는 것이었다. 짐을 챙기지 말라는 말은 목숨만 건지라는 뜻이다. 편지를 받아든 집에 어른은 예순셋 안주인 하나였다. 그는 동서와 조카며느리들, 그러니까 집안 여자들과 종들을 이끌고 대문을 나섰다. 챙긴 살림은 양식을 담은 쌀궤 하나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하루를 한글로 적기 시작했다.

일기에 남은 지명은 남편이 가리킨 곳이 아니다. 화성과 평택을 지나 신창, 당진, 서산, 홍성으로 낯선 고을 이름이 남쪽으로 줄줄이 이어진다. 남편이 정해 준 길조차 이미 갈 수 없는 길이었던 것이다. 가지고 나온 상자를 땅에 묻은 날이 있고, 잘 곳이 없어 물 위에 뜬 배에서 밤을 지낸 날도 있다. 한겨울 강바람 속의 배라니, 예순셋 몸으로는 하룻밤도 버거운 일이다. 길은 온통 피란민이었고 소문이 사람보다 빨리 달렸다.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소문이 가리키는 방향의 반대로 걷는 수밖에 없었다.

【무인도 죽도】 행렬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바다였다. 청군은 말 위에서 싸우는 기병이었고 말은 바다를 건너지 못한다. 뭍이 뚫린 이상 숨을 곳은 섬뿐이었다. 배를 대고 오른 곳이 충청도 보령 앞바다의 죽도,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었다.

우물이 없으니 눈을 긁어 녹여 마셨다. 집이 없으니 대나무를 베어 막을 쳤다. 그것도 연장 하나 없이 맨손으로. 그렇게 얽어낸 것이 두 칸짜리였다고 일기는 적는다. 정월 눈보라 속에 세운 대나무 두 칸이 예순셋의 거처였다. 그 안에 열네 사람이 생 댓잎을 바닥에 깔고 지냈다. 아침에는 물가에 내려가 지어 간 찬밥을 일행이 몇 숟가락씩 나눠 먹었고, 종들이 연장도 없이 대나무를 베어 막을 지었다. 무인도 첫 아침이 이 두 문장이다. 대감집 마님과 종들이 찬밥 한 그릇을 숟가락으로 나누는 풍경. 전쟁은 밥그릇 앞에서 신분을 지웠다.

여기서 하나 짚어야 한다. 그는 성 안의 일을 몰랐다. 소식은 며칠씩 늦게, 그것도 소문의 형태로 섬까지 왔다. 우리가 아는 병자호란과 이 사람이 겪은 병자호란 사이에는 시차가 있었다.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섬으로 번져 왔을 때, 그것은 오랑캐는 물에 약하다던 믿음이 깨졌다는 뜻이었다. 섬이라고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났는데 남편이 더 멀리 간다】 1637년 1월 30일 임금이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절했다. 47일 농성의 끝이었다. 피란민에게는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항복 조건에는 땅도 은도 아닌 사람이 들어 있었다. 소현세자를 볼모로 심양에 보내라는 것이었다. 세자를 모시고 갈 신하가 필요했고, 그 명단에 남이웅의 이름이 올랐다. 47일을 성에서 버틴 예순 중반의 노대신이 집에 들를 새도 없이 만주로 떠난 것이다. 성문 하나였던 부부 사이가 이제 압록강 너머 천 리로 벌어졌다. 그 길을 걸어간 것은 세자와 신하들만이 아니었다. 이 전쟁에서 청에 끌려간 조선 백성은 수만에서 수십만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수는 지금도 모른다.

부인은 섬에서 나와 서산과 당진, 예산과 청양의 친척집을 옮겨 다녔고, 전라도 여산까지 내려가 오래 머물렀다. 손윗동서가 사는 고을이었기 때문이다. 남의 집 곁방살이는 아무리 살가운 친척이라도 철이 바뀌면 눈치가 보이는 법이다. 그 와중에도 일기는 이어진다. 이 시기 일기에 유난히 자주 나오는 지명이 심양이다. 심양에서 편지가 왔다, 심양으로 편지를 붙였다. 방법은 인편이었다. 사신 행렬이나 장사치 편에 서찰을 붙이는 것이라 몇 달이 걸리고 절반은 도중에 사라졌다. 그래도 그 종이 한 장이 남편의 생사를 확인할 유일한 길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부부를 이어 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이 한 장이었다. 닫히는 성문 틈으로 빠져나온 급보로 시작해 압록강을 건너온 서찰로 이어진 것이다.

소식이 끊긴 날의 일기에는 가슴속에 늘 불이 있는 듯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속이 타들어간다는 말을 400년 전 여인은 이렇게 적었다.

【꿈, 그리고 살림 장부】 이 무렵 일기에 아주 특별한 기록이 늘어난다. 꿈이다. 꿈을 꾸면 깨어나 그 꿈을 적었다. 심양의 남편이 나오는 꿈, 그리고 먼저 떠난 자식들이 나오는 꿈. 어머님을 뵙고 먼저 간 아들의 어린 얼굴도 보았다는 날, 깨어 보니 마음이 흐뭇하나 아쉽기 그지없다고 적었다. 죽은 아이를 꿈에서 만난 아침이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흐뭇하기도 하다는 것, 자식 잃은 부모만 아는 마음일 것이다. 같은 날 일기는 자식 하나 없이 흰머리를 어찌하는가로 이어지고, 죽은 아들이 저승에서 제 할머니를 모시고 있으려나 싶어 더 마음이 아프다는 줄로 끝난다. 어느 봄날에는 처마 밑 제비 한 쌍이 새끼를 치고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사람이 저 짐승만 못한가 싶다고 적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이 눈물의 문장 바로 다음 줄에 그날 밭에 뿌린 씨앗과 종들이 한 일이 이어진다. 울다가 장부를 적고 장부를 적다가 운다. 이게 이 일기의 진짜 얼굴이다.

【충주, 살림을 다시 일으키다】 1638년 정월 그는 충주로 옮겼다. 집안 전답이 있고 서울에 가까워 남편 소식을 빨리 들을 수 있으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이 일기의 다른 면목이 드러난다. 예순넷 노부인이 집안 경영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흩어진 논밭을 파악하고 농사 계획을 세우고 일꾼을 배치했다. 언제 무엇을 뿌리고 누가 어느 밭에서 일했으며 소를 몇 마리 썼고 얼마를 걷었는지가 날짜별로 적혀 있다. 이 일기를 농사일기라 부르는 연구자가 있을 정도다.

종들의 이름도 계속 나온다. 죽도에서 대나무를 베던 사람들이다. 먼 지방에 사는 종의 안부까지 챙겨 적었다. 누가 아프다더라, 누구의 형편이 어떻다더라. 재산 목록이 아니라 식구의 안부처럼. 물론 아름답게만 볼 일은 아니다. 노비는 엄연히 이 집의 재산이었고 이 살림은 그들의 노동 위에 서 있었다. 다만 전쟁으로 무너진 살림을 다시 일으킨 실무 총책임자가 예순 넘은 안주인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제사 풍경이 뒤집는 것】 피란길에서도 그는 제사를 거르지 않았다. 무인도에서 눈을 녹여 마신 사람이 기일을 챙긴 것이다. 그런데 이 일기 속 제사 풍경은 우리가 아는 조선과 다르다.

첫째, 제사를 맏아들 집이 혼자 지내지 않는다. 형제 부부가 돌아가며 맡는다. 올해 이 집이 지냈으면 다음엔 저 집이다. 윤회봉사라고 한다. 제사가 한 집의 의무가 아니라 형제들이 나눠 지는 당번이었던 셈이다. 둘째, 이 부인은 시부모 제사만 지낸 것이 아니라 친정 부모의 제사까지 챙겼다. 시집간 딸이 친정 제사를 챙기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 딸도 없으면 외손이 제사를 이어받았다. 외손봉사라고 하는데 조선 전기와 중기에는 흔한 일이었다.

딸이 어떻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나. 답은 감정이 아니라 재산에 있다. 조선 전기의 관행은 자녀에게 재산을 고르게 나눠 주는 균분상속이었다. 남아 있는 분재기를 보면 시집간 딸의 몫이 아들과 같고, 제사 비용을 대는 땅이 제사를 지낼 사람에게 따로 붙어 갔다. 제사는 권리가 아니라 재산에 딸려 오는 의무였던 것이다. 재산을 똑같이 받았으니 제사도 똑같이 나눠 진다. 계산이 맞는 이야기다. 이 시절 족보도 아들을 먼저 쓰고 딸을 뒤에 몰아 적는 방식이 아니라 태어난 순서대로 적었고, 사위와 외손의 이름도 나란히 실렸다. 혼인 풍습도 사위가 처가에 들어가 사는 쪽이 일반적이었다. 장가간다는 말이 본래 장인 집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럼 우리가 아는 조선은 언제 시작됐나. 맏아들이 제사를 독차지하고 재산도 몰아받고 딸은 밀려나는 그 조선 말이다. 학계가 보는 전환점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바로 이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다. 사대부들이 맏아들 중심의 종법 질서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하나이고, 재산을 자녀 수대로 계속 쪼개면 몇 대 못 가 가문이 가난해진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또 하나였다. 재산을 맏아들에게 몰아주자 제사도 자연스레 맏아들 몫이 됐고, 재산을 못 받은 딸이 제사에서 빠지는 것은 그다음 순서였다. 그러니 우리가 조선의 전통이라 믿어 온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 후기의 발명품인 셈이다. 병자일기가 귀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 옛 방식이 살아 있던 마지막 풍경을 통째로 담고 있다.

【재회, 그리고 마지막 장】 1638년 초여름 일기의 공기가 문득 달라진다.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심양으로 떠난 지 1년이 훌쩍 지난 뒤였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린 재회인데도 일기에 요란한 감격은 없다. 남편의 밥상, 남편의 손님, 남편의 건강. 이날 이후 평범한 기록들이 다시 일기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남편이 돌아왔다는 긴 문장보다 다시 챙길 수 있게 된 밥상 하나가 그의 기쁨을 대신 말해 준다. 슬픔도 기쁨도 일상으로 눌러 담는 것, 어쩌면 그게 이 사람의 방식이었다.

가족이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할 때 그가 가장 앞세운 짐은 조상의 신주였다. 피란 내내 지켜 온 그것을 직접 모시고 도성에 들어갔다. 서울 생활이 다시 시작되자 중신의 집에는 관료와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 접대와 살림을 총괄한 사람도 물론 그였다. 누가 다녀갔고 무엇을 대접했고 담 너머로 무엇이 오갔는지 목록까지 남았다. 덕분에 이 일기는 17세기 사대부가 살림의 백과사전이 됐다.

1640년 8월 9일 일기가 멈춘다. 1636년 12월 피란길에서 시작해 3년 10개월, 그의 나이 예순일곱이었다. 왜 멈췄는지 일기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연구자들은 지금 남은 것이 전체 기록의 가운데 토막으로 보인다고 한다. 앞뒤로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는 이 4년은 그가 쓴 전부가 아니다. 남은 것만 세어도 놀랍다. 그 3년 10개월 동안 붓을 걸른 날은 손에 꼽는다. 경황 없던 피란 첫 며칠, 서울 귀환 직후의 일주일, 그리고 중병으로 앓아누운 며칠. 오히려 그 빈 날짜가 사정을 말해 준다.

【뒷이야기】 남이웅은 벼슬이 계속 올라 좌의정에 이르렀다. 부인은 1645년 일흔둘로 세상을 떠나고 남편은 3년 뒤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지금 공주 땅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일기는 한글 필사본 한 책으로, 겉표지에는 숭정병자일기라 적혀 있다. 병자일기로 불리게 된 것은 나중이다. 왜 한글이었을까. 이 시대 사대부의 일기는 거의 다 한문이다. 쇄미록도 한문이다. 한문은 남성의 문자였고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 여성이 남긴 기록은 절대적으로 적고, 병자일기가 귀한 첫 번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한글로 썼기에 살아남은 말들이 있다. 가슴속에 늘 불이 있는 듯하다, 사람이 저 짐승만 못한가 싶다. 격식을 갖춘 한문으로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가 남긴 것은 문장이 아니라 말이었다.

이 낡은 책은 후손들이 공주의 사당에서 대대로 간직해 400년을 건너왔고,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임금의 47일은 실록과 승정원일기 수백 장에 남았다. 조애중의 4년은 한글 일기 일흔두 장에 남았다. 왕의 기록은 나라가 어떻게 무너지고 굴복했는지 알려주고, 이 일기는 그 폐허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건넜는지 알려준다. 눈을 녹여 마신 물 한 모금, 찬밥 몇 숟가락, 심양으로 붙인 편지 한 장, 꿈에 본 아이의 얼굴과 처마 밑 제비, 밭에 뿌린 씨앗까지. 너무 작아서 나라의 기록에는 실리지 못할 것들이다. 바로 그 작음 때문에 이 일기는 사료가 됐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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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기로 읽는 조선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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