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사 루트
식민지라는 현실과 새로운 예술 사이, 시대를 앓거나 시대에 굴복한 이름들
타임라인 (13개 지점)
- 고희동 — 최초의 서양화가, 붓을 바꿔 잡다 (1915 · 도쿄)
전통 화단에서 활동하던 고희동은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해 조선인 최초로 서양화(유화)를 정식으로 배우고 돌아왔다. 자화상 등 그의 초기 유화는 붓과 먹 중심이던 조선 화단에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매체를 소개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다만 그는 훗날 서양화보다 동양화로 돌아가, 이후 서양화 도입의 중심은 다른 유학생들에게 넘어갔다.
- 이광수와 무정 —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1917 · 경성)
이광수가 매일신보에 연재한 《무정》은 고전소설의 권선징악 구조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과 자유연애, 근대적 교육을 다룬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평가받는다. 문체 또한 한문투를 벗고 구어체에 가까운 국문체를 시도해, 이후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이 시기 이광수는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걷게 되는 정반대의 길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 나혜석 — 여성 최초의 개인전 (1921 · 경성)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나혜석은 조선 여성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림뿐 아니라 여성의 자아실현과 자유연애를 주장하는 글을 잇달아 발표해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신여성의 상징이 됐지만, 이혼과 스캔들 이후 사회적으로 철저히 배척당하며 말년에는 행려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쳤다 — 그의 재능과 시대가 그에게 강요한 대가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다.
- 조선미술전람회 창설 — 관제 미술의 명암 (1922 6월 · 경성)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관전(官展) 조선미술전람회("선전")가 창설됐다. 신진 화가들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대형 무대였던 만큼 많은 화가가 참여했지만, 조선총독부가 심사와 수상을 좌우하며 관학화된 화풍(향토색 짙은 목가적 소재)을 사실상 강요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후 20여 년간 조선 화단의 성장과 통제가 동시에 이뤄진 무대였다.
- 김소월과 진달래꽃 — 한국적 정서의 시 (1925 · 평안북도 정주)
김소월은 시집 《진달래꽃》에서 이별과 그리움 같은 정서를 민요조 리듬에 담아, 서양 문예사조를 그대로 옮기던 당대 흐름과 달리 한국적인 시어와 정서를 뚜렷이 세웠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로 시작하는 표제작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꼽힌다.
- 나운규와 아리랑 — 조선 영화의 탄생 (1926 10월 1일 · 경성(단성사))
나운규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주연을 맡은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일제의 검열을 피해 상징과 은유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저항 의식을 담아냈는데, 개봉 당시 관객들이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필름이 소실돼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한국 영화사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 최승희 — 조선 무용을 세계 무대에 세우다 (1930 · 도쿄)
일본에서 현대무용을 배운 최승희는 서양식 현대무용 기법에 한국 전통 춤사위를 결합한 독자적인 스타일을 창조해, 미국과 유럽 순회공연에서까지 찬사를 받으며 "동양의 무희"로 이름을 알렸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최초의 한국인 예술가로 꼽히는 이 시기의 성취는, 다만 훗날 그가 보인 행적과 함께 두 갈래로 평가된다.
- 이인성 — 향토색 화풍, 조선의 색을 그리다 (1934 · 대구)
19세에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을 받으며 "천재 화가"로 불린 이인성은, 붉은 흙과 강렬한 원색으로 조선의 자연과 풍속을 그린 향토색 화풍을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 잡았다. 대표작 〈가을 어느 날〉은 조선인 여성의 모습을 향토적 배경과 결합해 그린 작품으로, 서양화 기법과 조선적 소재를 결합하려 한 이 시기 화가들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광복 후에는 총상 사고로 30대에 요절했다.
- 이상 — 날개와 오감도, 초현실의 언어로 시대를 앓다 (1934 · 경성)
건축학을 전공한 이상은 소설 〈날개〉와 연작시 〈오감도〉에서 의식의 흐름과 파격적인 형식 실험(숫자와 기호를 시에 그대로 삽입하는 등)을 선보이며 당대 문단에 충격을 던졌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날개〉의 첫 문장은 식민지 지식인의 무기력과 자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폐결핵으로 도쿄에서 요절할 때까지, 그의 문학은 스물일곱 짧은 생애에 응축된 극단적 실험이었다.
- 이광수, 가야마 미쓰로가 되다 — 문학적 성취와 갈라선 행적 (1939 · 경성)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전시 동원이 강화되자, 이광수는 창씨개명을 가장 먼저 실천해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조선인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글을 여러 편 발표하고 각종 친일 단체에 이름을 올렸으며, 학병으로 나가라고 청년들을 설득하는 강연까지 다녔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났고, 2002년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됐다. 《무정》이 열어젖힌 근대문학의 지평과, 이 시기 그가 보인 적극적 협력 행적은 별개의 사실로서 함께 기억돼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대체적 평가다.
- 최승희, 일본군 위문 무대에 서다 (1941 · 중국 각지(일본군 점령지))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며 최승희는 일본군을 위문하는 순회공연에 참여하고, "황군 위문 예술인"으로 불리며 전쟁 협력에 나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그의 이름도 포함됐다. 광복 후 남편 안막과 함께 월북한 그는 북한에서 무용가로 활동을 이어갔지만 1960년대 후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지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가로서의 성취와 전시 협력 행적, 이후의 비극적 말로가 한 사람의 생애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다.
- 윤동주 — 서시, 그리고 감춰진 원고 (1941 · 경성(연희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며 윤동주는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었지만, 조선어 출판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시국 탓에 정식 출간을 미루고 원고를 지인에게 맡겨 보관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서시〉의 구절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그럼에도 지키려 한 양심을 함께 담고 있다 — 같은 시대, 협력의 길을 택한 이광수·최승희와는 대조적인 선택이었다.
- 윤동주, 광복을 넉 달 앞두고 옥사하다 (1945 2월 16일 ·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
일본 유학 중 항일 운동 혐의로 체포된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매일 맞다가, 광복을 불과 넉 달 앞두고 옥사했다.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했던 그의 원고는 광복 후인 1948년에야 유고 시집으로 출간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나혜석의 배척, 이상의 요절, 윤동주의 옥사, 그리고 이광수·최승희의 협력까지 — 이 시기 예술가들이 걸었던 서로 다른 길은, 식민지라는 시대가 재능 있는 이들 각자에게 얼마나 다른 선택과 대가를 강요했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