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과 웅진 백제
섬에서 태어난 왕이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까지 — 공주에서 가카라시마까지, 무령왕의 자취와 그를 둘러싼 기록의 자리
타임라인 (12개 지점)
- 한성 함락 — 오백 년 도읍이 하루아침에 (475 9월 ·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아차산성)
고구려 장수왕의 3만 군대가 한성을 에워싸고 이레 만에 무너뜨렸다. 개로왕은 아차산성 아래로 끌려가 죽었고, 아들 문주왕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남쪽 웅진으로 내려간다. 백제 700년의 절반이 이 자리에서 끝났다. 무령왕이 물려받게 될 나라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 가카라시마 — 일본서기가 적은 출생지 (461 4월 ·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 가카라시마)
일본서기 웅략기는 백제신찬을 인용해, 461년 개로왕의 아우 곤지가 왜로 가던 길에 이 섬에서 아이가 태어나 섬군(嶋君)이라 불렀다고 적었다. 섬 이름 각라도가 지금의 가카라시마다. 오래도록 왜가 지어낸 이야기로 여겨졌지만, 1971년 무령왕릉 지석에서 사마왕이라는 이름과 462년생에 해당하는 나이가 나오면서 이 기록 쪽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 드러났다. 섬에는 무령왕 탄생 전승지 표석과 오비야우라 동굴이 있고, 공주시와 가라쓰시가 해마다 오간다.
- 아스카베 신사 — 곤지를 모신 자리 (461 · 일본 오사카부 하비키노시)
무령왕의 아버지로 기록된 곤지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다. 곤지는 왜에 머무는 동안 다섯 아들을 두었고 이 일대에 백제계 집단의 근거를 남겼으며, 477년 백제로 돌아와 내신좌평이 되었다. 그의 아들 동성왕은 왜에 있다가 백제 왕으로 즉위했다. 일본서기는 이 파견을 천왕을 모시러 갔다고 적지만, 인질로 보낸 자식들이 돌아와 잇따라 왕이 되는 종속국은 없다. 같은 사실을 어떤 술어에 담느냐의 문제다.
- 공산성 — 마흔에 오른 왕이 앉은 자리 (501 12월 · 충남 공주시 금성동)
웅진 백제 63년의 왕성이다. 금강을 등지고 산줄기를 따라 쌓아 지키기는 좋았지만 들이 좁아 나라를 키우기는 어려웠다. 문주왕과 삼근왕, 동성왕이 잇따라 신하 손에 죽은 곳도 여기다. 501년 동성왕이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죽자 마흔 살의 사마가 왕위에 올랐고, 이듬해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백가를 직접 쳐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왕을 죽인 자를 왕이 처단한 이 한 장면으로 웅진의 혼란이 끝난다. 지금은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 스물두 담로 — 왕의 자제와 종족을 나누어 보내다 (521 · 충남 공주 일원(양서 기록))
양서 백제전은 백제가 도읍을 고마라 하고 고을을 담로라 하며 스물두 담로를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고 적었다. 지방 세력의 자리에 왕족을 앉혀 중앙의 힘을 세운 것으로 본다. 22담로가 요서·산둥·일본 열도까지 뻗은 해외 영토였다는 주장이 대중적으로 널리 퍼졌지만, 담로를 적은 양서 자신이 그것을 중국의 군현과 같다고 설명하고 백제의 위치도 한반도 서남부로 적으며, 요서에서 백제의 성곽이나 무덤이 확인된 적은 없다. 스물두 곳이 어디였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 영산강 유역 — 왜가 주었다는 네 현의 진짜 얼굴 (512 12월 · 전남 나주·영암 일대)
일본서기 계체기는 512년 백제의 청으로 왜가 임나의 네 현을 주었다고 적는다. 그러나 왜가 소유하지 않은 땅을 줄 수는 없다. 이 지역에서는 5세기까지 옹관묘 같은 백제와 다른 양식의 무덤이 나오다가 6세기 들어 백제식으로 바뀌는데, 그 시점이 512년과 맞물린다. 백제가 스스로 확보한 남방 진출을 왜의 하사로 뒤집어 적은 것이다.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4~6세기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학설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 양국 위원이 견해를 같이했다.
- 스다하치만 신사 — 백제 왕의 이름이 새겨진 일본 국보 (503 8월 · 일본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1834년 이 신사 부근에서 나온 인물화상경에 48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안에 사마라는 이름이 있다. 1971년 지석에서 백제 사마왕이 확인되면서 이 사마를 무령왕으로 보는 데 이견이 거의 없어졌다. 다만 계미년이 503년인지, 남제왕이 누구인지, 그리고 몇 글자를 어떻게 읽느냐는 아직 논쟁 중이다 — 한 글자를 오래 살기를 바라며로 읽느냐 오래 받들 것을 생각하여로 읽느냐에 따라 상하 관계가 뒤집힌다. 거울은 지금 도쿄국립박물관에 있고 신사에는 기념비가 서 있다.
- 건강(난징) —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국서 (521 11월 · 중국 장쑤성 난징)
521년 무령왕이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올린 표문에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리고 백제가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양 무제는 그에게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의 작호를 주었고, 그 이름이 뒤에 무령왕릉 지석 첫머리에 그대로 새겨진다. 이 무렵 사행을 그린 것으로 보는 양직공도의 백제 사신 그림도 남아 있다. 무너졌던 나라가 국제 무대에서 지위를 회복했음을 스스로 말한 문장이다.
- 정지산 유적 — 왕의 빈전으로 보는 자리 (523 5월 · 충남 공주시 금성동 정지산)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산 위에서 기와를 얹은 큰 건물터와 백제 최고급 유물이 나왔다. 523년에 죽은 무령왕을 525년에 묻기까지 27개월 동안 시신을 모셔 두던 빈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지석에 적힌 27개월의 상장 기간과 자리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무덤은 화려하지만 빈전 터는 주춧돌만 남아, 왕이 죽은 뒤 이 나라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조용히 보여 준다.
- 무령왕릉 — 주인이 밝혀진 유일한 삼국시대 왕릉 (525 8월 ·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
1971년 7월 배수로를 파던 삽에 벽돌이 걸리면서 아무도 모르던 무덤이 나왔다.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유일한 삼국시대 왕릉이고, 입구에 놓인 두 장의 지석 덕분에 주인과 죽은 해와 나이까지 확인됐다. 중국 남조식 벽돌무덤에,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으로 짠 관에, 동남아에서 온 유리구슬이 함께 들어 있었다. 백제의 크기는 영토의 넓이가 아니라 이 무덤 안에서 확인된다. 무덤은 1997년부터 영구 폐쇄되어 지금은 옆에 지은 모형관으로 들어간다.
- 국립공주박물관 — 하룻밤 발굴이 남긴 것 (1971 7월 8일 ·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 수천 점이 여기 있다. 금제 관식, 왕비의 금귀걸이, 진묘수, 그리고 지석. 다만 이 발굴은 최대의 성과이자 최대의 실패로 함께 기록된다. 1971년 7월 8일 입구를 연 뒤 열몇 시간 만에 유물을 다 들어냈고, 무엇이 어디에 어떤 상태로 놓여 있었는지를 기록하는 발굴의 절반이 날아갔다. 그 뒤 발굴 절차와 현장 통제 규정이 크게 바뀌었다.
- 도쿄 — 천황이 인연을 말한 날 (2001 12월 23일 · 일본 도쿄)
2001년 생일 회견에서 아키히토 천황은 간무천황의 생모가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말했다. 무령왕에서 백 년쯤 뒤로 이어지는 계보이므로 이 한 줄로 천황가가 백제 왕가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고,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도 지나치다. 6세기 백제와 왜 사이에 사람과 피가 실제로 오갔고 그것이 8세기 일본의 공식 사서에 남았다는 사실이 이 루트의 마지막 자리다. 배 위에서 태어나 왜에서 자라고 백제의 왕이 된 사람을 지금의 국경으로 나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