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가 —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유리왕조가 전하는 사연이다. 유리왕 3년(기원전 17) 왕비 송씨가 죽자 왕은 골천 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나라 사람의 딸 치희(雉姬)를 계실로 맞았는데, 둘이 다투어 양곡 동서에 두 궁을 지어 따로 살게 했다.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나가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은 사이 화희가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일 뿐인데 무례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라고 꾸짖자 치희는 부끄러워 원한을 품고 떠났고, 왕이 말을 달려 쫓았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나무 밑에서 쉬며 짝지어 나는 꾀꼬리를 보고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를 읊었다고 한다. 자연물에 자기 감정을 빗대는 이 방식은 이후 한국 서정시의 기본 문법이 되며, 집단의 노래에서 개인의 노래로 넘어가는 길목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다만 확정된 것은 거의 없다. 작자를 유리왕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나, 떠돌던 옛 노래가 후대에 유리왕 설화에 삽입됐다는 견해, 민요의 한역이라는 견해, 후대 위작이라는 견해, 나아가 유리왕 자체를 신화적 인물로 보아 작자와 연대 모두 확정 불가로 결론짓는 견해가 병존한다. 성격도 갈린다. 실연의 서정시로 보는 통설 외에, 화희·치희를 토착 골천 세력과 한나라계 이주 세력으로 읽어 통합에 실패한 군주의 정치적 좌절을 담은 서사시로 보는 견해(이명선), 화(벼)와 치(꿩)라는 이름에 착안해 수렵경제에서 농경경제로 옮겨가던 사회 변화의 신화적 투영으로 보는 견해, 부족연맹기 계절제의나 성적 제의에서 한 부족장이 부른 노래가 영웅적 인물인 유리왕의 작품으로 오인 채록됐다는 견해도 있다. 사료 자체에도 균열이 있다 — 유리왕 3년 기록에 왕비 송씨의 죽음이 보이지 않고, 당시 지배층에 동시처제도가 없었다는 지적이 있으며, \"왕이 일찍이(嘗) 나무 밑에 쉬면서\"라는 표현을 근거로 창작 시점을 유리왕 3년 이전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된다.
관련 인물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조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리왕
- 위키백과 황조가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