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일기 — 나라가 19년을 지운 사람이 나라의 잃어버린 기억을 구했다

1567 10월 1일 · 담양·한양 (유배지 종성·은진)

조선은 한 선비를 19년 동안 유배지에 가두었다. 서른다섯에 끌려가 쉰다섯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인생 한가운데가 통째로 지워진 것이다. 그런데 그를 내쫓은 사건은 끝내 범인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더 기막힌 것은 그다음이다. 훗날 조정은 자신들이 내쳤던 이 사람의 일기를 찾아 국가의 역사를 쓰는 데 썼다.

【양재역의 벽보】 시작은 1547년 한양 남쪽 양재역에 붙은 익명의 벽보 한 장이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정면으로 비방하는 내용이었고, 권력을 쥔 세력은 이 벽보를 구실 삼아 눈엣가시 같던 선비들을 쓸어냈다. 범인은 찾지 못했지만 처벌자 명단은 계속 길어졌다. 그 명단에 서른다섯의 유희춘이 있었다. 그는 스물여섯에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수찬과 사간원 정언을 지낸 관리였다. 임금 곁에서 글을 다루고 바른말을 하는 자리, 그런 선비가 권력에는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처음 정해진 유배지는 제주였다. 그런데 제주가 그의 고향 해남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유배지가 다시 바뀐다. 새 유배지는 함경도 종성, 두만강 바로 아래 조선의 북쪽 끝이었다. 남쪽 끝 바다 대신 북쪽 끝 국경으로, 조선 땅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보낸 것이다. 이 시리즈의 1편에서 박계숙과 박취문 부자가 근무하러 갔던 그 회령 바로 옆이다. 누구는 나라의 명으로 한 해를 근무하러 갔고 누구는 죄인으로 18년을 살았다. 같은 땅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쓰였다.

【유배지에서 붓을 잡다】 서른다섯에 갇혀 쉰다섯까지. 보통 사람이라면 무너졌을 세월인데 그는 책을 붙잡았다. 경전에 우리말 토를 다는 작업에 매달려 조선 사람이 어려운 경전을 좀 더 쉽게 읽게 했고, 아이들을 위한 한자 교재도 새로 엮었다. 국경 마을의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조정이 지워 버린 사람이 변방에서는 스승이 된 것이다.

그가 붓을 놓지 않은 데에는 집안의 내력도 한몫했다. 유희춘의 외할아버지가 표해록을 쓴 최부다.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해 중국 대륙을 종단하고 살아 돌아온 뒤 그 여정을 날짜별로 낱낱이 적은 사람이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기록의 외손자였던 셈이다. 그런데 기록하는 피와 함께 화를 입는 운명도 물려받았다. 최부는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었고, 유희춘의 아버지는 벼슬길을 포기한 채 고향에 숨어 살았다. 붓을 든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 지켜본 집안, 그런데도 그 집 아들이 다시 붓을 잡았다.

【남쪽에 남은 아내】 그가 19년을 버티는 동안 남쪽 집안은 어떻게 됐을까. 여기서 또 다른 주인공이 나온다. 아내 송덕봉이다. 훗날 사람들이 조선의 여성 문장가를 꼽을 때 허난설헌과 나란히 올리는 사람이다.

남편이 국경으로 끌려간 순간부터 집안의 모든 짐이 그에게 떨어졌다. 친정에서 물려받은 논밭과 노비를 직접 경영하며 살림을 꾸렸다. 이 시절에는 딸도 아들과 재산을 고르게 나눠 받았다. 앞 편 병자일기에서 본 균분상속이다. 송덕봉은 그 몫으로 집안을 지켰다.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키우고 유배지의 남편에게 물자를 대는 일까지 전부 아내의 몫이었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은 북쪽 끝에 묶여 장례에 올 수도 없었고, 그 삼년상을 며느리가 홀로 치렀다.

상을 마친 뒤 그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단을 내린다. 남편이 있는 함경도 종성으로 직접 가겠다는 것이었다. 전라도에서 두만강변까지 이천 리가 넘는 길을 마흔 넘은 여인이 몸소 넘어갔다. 길에는 하늘을 문지른다는 이름의 험한 고개 마천령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 고개에 올라 시 한 수를 지었다. 여인의 몸으로 북쪽 국경의 고개에 서서 시를 읊는 장면, 조선 문학사에 남은 자리다. 그렇게 부부는 국경 마을에서 한동안 함께 지냈다. 귀양살이가 잠시 두 사람의 살림이 된 것이다.

【하늘이 바뀌고, 첫 장을 펼치다】 1565년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그 권세를 등에 업던 세력도 함께 무너졌다. 유희춘의 유배지가 함경도에서 충청도 은진으로 옮겨진다. 국경에서 내륙으로, 풀려날 조짐이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어린 왕은 지난 시절 화를 입은 선비들을 다시 불렀고, 유희춘도 그 명단에 있었다. 19년 만이었고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얼마나 급히 불렀는지 고향 해남에 들르지도 못하고 곧장 한양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1일, 그는 새 공책의 첫 장을 펼친다. 미암일기의 첫날이다. 미암은 그의 호인데, 집 뒤에 초승달이나 미인의 눈썹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눈썹 미에 바위 암을 썼다고 한다. 이날부터 그는 죽기 직전까지 하루하루를 적어 내려간다.

왜 하필 이때 시작했을까. 일기는 이유를 말해 주지 않는다. 다만 짐작은 간다. 19년을 빼앗긴 사람에게 남은 하루는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월급 명세서와 선물 경제】 한양에 올라온 그는 곧 관직을 회복해 홍문관 요직을 거치며 경연에서 임금을 직접 가르쳤다. 경연은 임금이 신하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자리니 왕의 선생이 된 셈이다. 19년 만에 유배인에서 임금의 스승으로.

그런데 이 일기가 특별한 이유는 큰일을 적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라의 일 바로 옆에 살림의 자잘한 것이 나란히 있기 때문이다. 녹봉을 받은 날에는 종들이 광창에서 쌀과 콩과 명주와 삼베를 받아 온 수량이 적혀 있고, 그 뒤에 중국에서 사신이 온다고 쌀 한 섬을 감했다는 말이 붙는다. 나라 손님 접대 비용을 관리들의 월급에서 뗀 것이다. 400년 전 월급 명세서가 이렇게 생생하다. 심지어 고위 관료였던 그가 녹봉만으로는 먹고 살기에 부족하다고 푸념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관리들은 무엇으로 살았을까. 일기가 답을 보여 준다. 선물이다. 생선과 젓갈, 쌀과 옷감, 종이와 붓이 지방 수령과 제자, 친척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그는 누가 무엇을 보내왔는지 보낸 사람과 물목을 하나하나 적었다. 오늘 눈으로 보면 뇌물이 아니냐 싶지만 당시 사정은 조금 달랐다. 부족한 녹봉을 물건과 인정의 교환이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이를 선물 경제라 부른다. 한 사람의 가계부가 조선 관료 사회의 경제 지도가 된 셈이다.

인간적인 고백도 숨기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장기에 빠져 글 읽기를 게을리했다고 적었다. 경연에서 임금을 가르치는 대학자가 장기 두느라 공부를 빼먹고 그걸 또 반성문으로 남긴 것이다. 임금이 내린 술에 선비들이 취해 비틀거렸다는 경연장 뒷이야기도 있고, 목욕재계하려고 냉수로 몸을 씻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벼슬아치의 하루가 통째로 들어 있다.

부부의 건강도 그의 관심사였다. 자신이나 아내가 아프면 언제부터 어디가 아팠고 무엇을 먹었는지 일일이 적었다. 덕분에 이 일기는 400년 전의 진료와 생활을 복원하는 의학사 자료가 됐다. 꿈 기록은 더 흥미롭다. 그는 가족이 꾼 꿈까지 받아 적고 길몽인지 흉몽인지 풀이를 달았다. 벼슬 소식이 있으려나, 집안에 우환이 있으려나. 경연에서 유학을 강의하는 대학자가 꿈으로 하루의 길흉을 살핀 것이다. 앞 편들에서도 오희문과 조애중이 꿈을 적었다. 조선 사람에게 꿈은 그냥 잠꼬대가 아니었다.

【허준이 처음 나오는 문헌】 이 시시콜콜한 일기 속에서 훗날 조선 의학사를 바꿀 이름 하나가 튀어나온다. 허준이다. 일기에 등장할 무렵 그는 아직 궁궐에 들어가지 못한 젊은 의원이었는데, 유희춘이 그 재주를 알아보고 내의원에 추천했다. 내의원은 임금을 진료하는 궁중 의료 기관이다. 이 추천이 허준이 궁중 의료의 길로 들어서는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됐다. 훗날 동의보감을 남길 사람의 무명 시절이 이 일기의 편지 한 장에 남은 것이다. 이 일기는 허준이 처음 언급되는 문헌으로 꼽힌다. 등장하는 인물이 1800명 가까이 되니, 김인후와 기대승, 송순, 이황, 정철 같은 이름도 함께 나온다.

【아내에게 진 편지를 자기 손으로 남긴 남편】 1569년 부부는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그해 겨울 그가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면서 남편만 다시 한양으로 올라간다. 서울에서 혼자 지내던 그가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요즘 말로 옮기면 이런 내용이다. 내가 서울에서 넉 달을 지내며 음악도 여색도 가까이 하지 않았소. 한마디로 자기 자랑이었다. 조선 양반 남성에게 첩과 기생이 흔했던 시절이니 내세울 만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송덕봉의 답장이 통렬했다. 몇 달 삼간 것이 그리 자랑할 일입니까. 나는 당신이 유배 가 있던 19년 동안 홀로 집안을 지켰고 시어머님 삼년상도 혼자 치렀습니다. 당신의 넉 달과 나의 19년,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반박할 말이 있을 리 없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유희춘은 이 편지를 감추지 않았다. 아내의 글을 소중히 간직했고 송덕봉이 남긴 시문까지 직접 베껴 보존했다. 자기가 진 싸움의 기록을 자기 손으로 남긴 남편, 흔치 않은 일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부부이자 글벗이었다. 시를 지어 주고받고 서로의 글을 평했으며, 아내가 유배지의 남편을 시로 타이르는 대목도 남아 있다.

【죽기 전날까지】 1575년 그는 이조참판 자리에서 물러나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글쓰기에 매달렸다. 경전을 풀고 책을 엮고 변함없이 하루에 일기를 적었다. 1577년 봄 선조가 그를 다시 불렀고, 예순다섯의 그는 마지막으로 한양에 올라갔다가 병을 얻는다. 몸이 무너져 가는 와중에도 일기는 계속됐고, 어느 날 마침내 붓이 멈춘다. 마지막 일기의 날짜는 1577년 5월 13일,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이틀 전이다. 10년 동안 하루하루를 기록한 사람이 붓을 놓자마자 생의 끝이 찾아온 것이다. 쓴다는 것과 산다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같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라가 이 일기를 찾아오다】 그렇게 미암일기는 1567년 10월 1일에 시작해 1577년에 끝났다. 원래 열네 책이었고 지금 남은 것은 열한 책, 그중 열 책이 일기이고 한 책은 유희춘과 송덕봉의 시문을 모은 부록이다. 조선시대 개인이 남긴 일기 가운데 가장 방대한 기록으로 꼽힌다.

주인이 떠난 뒤 일기는 담양의 자손들 집에 간직됐다. 이대로였다면 한 집안의 보물로 조용히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15년 뒤 나라 전체가 뒤집힌다. 임진왜란이다. 왜군이 스무 날 만에 한양을 점령했고 궁궐이 불타며 나라의 기록도 함께 사라졌다. 사관들이 목숨처럼 지키던 사초와 승정원일기까지 재가 된 것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조정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선조 시대 앞부분의 역사를 쓸 재료가 나라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전국에서 개인의 일기와 야사를 걷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몇 안 되는 기록 가운데 미암일기가 있었다. 죽은 지 20년 가까이 된 시골 노인의 일기가 국가 기록으로 들어간 순간이다. 뒤에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임진왜란 이전을 채울 기초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조정은 사대부가 남긴 개인 일기를 사료로 쓰기로 했다. 미암일기는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석담일기)와 함께 선조실록의 기본 사료가 됐다. 특히 선조가 즉위한 뒤 첫 10년, 실록의 그 부분을 채운 뼈대가 이 일기였다. 유희춘이 하루하루를 적은 기간과 정확히 겹치는 10년이다.

사관도 아닌 사람의 사사로운 일기가 국가 공식 역사서의 원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기록유산이다. 그 한 귀퉁이를 담양 시골집에서 건너온 개인 일기가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19년 동안 나라가 지워 버렸던 사람이 결국 나라의 잃어버린 기억을 구했다.

【뒷이야기】 남은 열한 책 가운데 한 책은 일기가 아니다. 유희춘과 송덕봉 부부의 시문을 모아 베껴 놓은 것이다. 남편의 일기 묶음 속에 아내의 시집이 나란히 꽂혀 400년을 함께 건너온 것이다. 자기가 아내에게 진 편지도, 아내가 지은 시도 감추지 않고 남긴 그 붓이 한쪽으로는 선조실록의 빈칸을 채웠고 다른 한쪽으로는 조선 여성 문장가의 목소리를 살려냈다.

미암일기와 미암집 목판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됐고 지금도 담양의 후손들이 보존하고 있다. 유희춘은 역사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뜻으로 일기를 쓴 게 아니다. 그날 받은 쌀과 만난 사람, 아내에게 혼난 일, 장기 때문에 공부를 거른 일을 잊지 않으려 적었을 뿐이다. 그런데 왕의 명령으로 남긴 국가 기록은 불탔고, 한 사람이 자기 마음으로 쓴 일기는 살아남았다. 나라는 그의 19년을 지웠지만 그는 돌아온 뒤의 하루를 쉽게 지우지 않았다. 그렇게 되찾아 적은 10년이 조선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아 주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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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기로 읽는 조선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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