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일기 — 성 안의 47일, 누가 썼는지 모르는 한글 기록

1636 12월 14일 · 경기 광주 남한산성

앞 편에서 우리는 성 밖을 걸었다. 예순셋 안주인이 눈을 녹여 마시며 무인도에서 정월을 보내던 그 4년이다. 이번 편은 그 겨울의 나머지 절반, 성 안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남은 것이 하나 모자란다. 누가 썼는지를 모른다.

이름은 산성일기. 한글 필사본 한 책이고,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임금이 청군에게 항복하기까지 오십여 일을 날짜별로 적었다. 앞뒤로 배경과 뒷일도 붙어 있다. 청 태조 누르하치가 명에서 장군 칭호를 받던 무렵부터 시작해, 정묘호란과 청의 건국을 지나 성이 포위되고 항복하고, 세자 일행이 심양으로 떠나고 임금이 환궁하고, 끝에는 삼전도에 청 황제의 송덕비가 서는 일까지 담았다. 전쟁 47일의 기록인데 실은 반세기의 기록인 셈이다.

【누가 썼을까】 작자와 저작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다.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궁중에서 나왔다는 쪽이다. 남아 있는 사본 가운데 낙선재본과 국립중앙도서관본이 한글 궁체로 정갈하게 쓰여 있어, 현종이나 숙종 무렵 궁중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다. 이 때문에 궁녀가 썼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다른 하나는 사대부가 남긴 것이라는 쪽이다. 간결한 문체와 어투, 그리고 무엇보다 내용이 그렇다. 성 안에서 오간 외교 문서의 문구, 신하들이 주고받은 말, 항복 절차를 정하는 협상의 세부가 들어 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여기서 이 기록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산성일기에 적힌 일들을 나만갑의 병자록이나 남한일기 같은 한문 기록과 맞춰 보면 거의 일치한다. 특히 병자록과는 1636년 12월 12일부터 1637년 2월 8일까지 내용이 상당히 비슷해서, 산성일기가 병자록을 우리말로 옮긴 것일 수 있다는 견해까지 나와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한 사람의 일기일 수도 있고, 한문으로 적힌 남의 일기를 누군가 한글로 옮겨 여성과 아이들도 읽을 수 있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놀랍다. 전자라면 성 안 요직에 있던 사람의 체험기이고, 후자라면 나라의 치욕을 한글로 옮겨 널리 읽히게 한 누군가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시리즈는 여기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이 점만 적어 둔다. 지금까지 읽은 세 권은 모두 쓴 사람이 분명했다. 부북일기의 박계숙과 박취문, 쇄미록의 오희문, 병자일기의 조애중. 산성일기는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이 기록은 다르게 읽힌다. 개인의 하루가 아니라 그 겨울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의 공통된 기억처럼 읽히는 것이다.

【성 안의 47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미 조선 지도의 병자호란 루트에 있다. 12월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성을 지나쳐 달려 열흘 만에 한양 근교에 닿았고, 강화도 길이 끊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산성일기는 그 안의 시간을 하루씩 적는다.

성 안에는 임금과 신하와 군사 만여 명이 있었고 식량은 넉넉잡아 한 달치 남짓이었다. 한겨울 산성의 추위에 성벽을 지키다 얼어붙는 군사가 속출했다. 임금을 구하러 온 각 도의 근왕병은 산성에 닿기도 전에 차례로 무너졌다. 남은 것은 버티는 일과, 버티는 일을 언제까지 할지 정하는 논쟁이었다.

그 논쟁이 이 기록의 중심이다.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일단 살아야 훗날을 도모한다는 주화파. 김상헌과 최명길의 이름이 여기서 나온다. 산성일기에는 그 말들이 오간 순서, 누가 무엇을 청했고 임금이 어떻게 답했는지가 날짜와 함께 적혀 있다. 성 안에서 자결을 시도한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청은 강화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척화를 주장한 신하들을 넘기라고 했고, 결국 그 명단을 두고 신하들끼리 몇 사람까지 보낼 것인지를 다투었다. 여러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두 사람을 보내는 것이 낫다는 말이 오갔다. 사람을 골라 적진으로 보내는 일이 산술처럼 논의된 것이다. 성 밖의 조애중이 심양으로 붙인 편지를 기다리던 그 겨울에, 성 안에서는 사람이 조건으로 주고받히고 있었다.

식량이 바닥나고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닿자 결론이 났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산성일기는 그 뒤도 적는다. 청군의 철군, 세자와 봉림대군 일행이 심양으로 떠나는 일, 임금의 환궁, 사신이 공물을 바친 일, 그리고 삼전도에 송덕비가 서는 일까지. 항복으로 끝나지 않고 그 뒤에 이어진 것들을 끝까지 따라간 것이다. 치욕의 장면에서 붓을 놓지 않은 기록이다.

【세 겹으로 보는 한 겨울】 이제 1636년 겨울을 세 겹으로 볼 수 있다. 실록과 승정원일기가 나라의 기록으로 남긴 층, 산성일기와 병자록이 성 안에서 남긴 층, 그리고 병자일기가 성 밖 피란길에서 남긴 층. 같은 47일인데 층마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나라의 기록은 무엇이 결정됐는지를 알려주고, 성 안의 기록은 그 결정이 어떤 말다툼과 굶주림을 거쳐 나왔는지를 알려주고, 성 밖의 기록은 그 결정이 한 집안의 밥그릇과 편지로 어떻게 내려왔는지를 알려준다.

산성일기가 한글이라는 점도 여기서 다시 읽힌다. 병자일기가 한글인 것은 쓴 사람이 여성이라 한문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산성일기가 한글인 것은 읽는 사람을 넓히려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한쪽은 쓰기 위한 한글이었고 다른 한쪽은 읽히기 위한 한글이었던 셈이다. 조선에서 한글은 대체로 이 두 자리에 있었다.

【뒷이야기】 산성일기는 낙선재본, 국립중앙도서관본, 구왕궁본 세 가지 사본이 전한다. 사본마다 크기와 글씨체가 다르다. 짝이 되는 한문 기록 병자록은 나만갑이 남긴 것으로, 그는 척화론자였던 만큼 시종일관 척화파를 옹호하고 주화파에는 인색하다. 같은 성 안에 있던 사람의 기록도 어느 편에 섰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산성일기를 읽을 때 이 점을 함께 알아야 하는 이유다.

문학 쪽에서는 이 글을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한 편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발단에서 전개와 위기를 거쳐 마지막에 이르는 흐름이 짜여 있고 문장이 능하다는 것이다. 누가 썼는지 모르는 기록이 400년 뒤에 문학으로도 읽히고 사료로도 읽힌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이 남긴 것 치고는 적지 않은 자리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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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기로 읽는 조선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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