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가와 단심가 — 왕조 교체기의 시조
1392년 봄 개경에서 이방원이 정몽주를 불러 술자리를 열고 시조를 주고받았다고 전한다. 이방원의 「하여가」는 \"이런들 엇더ᄒᆞ며 져런들 엇더ᄒᆞ리 / 만수산 드렁츩이 얽어진들 긔 엇더ᄒᆞ리 / 우리도 이ᄀᆞ치 얽어져 백 년ᄭᆞ지 누리리라\"로, 얽힌 칡덩굴을 들어 명분 대신 공존을 말한다. 정몽주의 「단심가」는 \"이 몸이 주거 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 백골이 진토ᄃᆡ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 님 향ᄒᆞᆫ 일편단심이야 가ᄉᆡᆯ 줄이 이시랴\"로 답한다. 죽음을 네 겹으로 반복해 사라질 수 있는 것을 모두 나열한 뒤 사라지지 않는 것 하나를 종장에 놓는 구조다. 얼마 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살해됐고 그해 7월 이성계가 즉위했다. 다만 이 일화에는 사료상의 문제가 있다 — 두 작품 모두 사건 당시 기록이 아니라 『청구영언』 등 조선 후기 가집과 『포은집』·『해동악부』 등 후대 문헌에 실려 전한다. 노래 자체가 후대작일 가능성, 실제 대화가 후대에 시조로 정리됐을 가능성, 사림이 정몽주를 절의의 상징으로 세우는 과정에서 서사가 다듬어졌을 가능성이 함께 제기된다. 실제로 정몽주 평가는 크게 변했다 — 조선 초에는 역적에 가까웠으나 태종대에 영의정 추증, 세종대 『삼강행실도』 충신 수록, 중종대 사림 집권 후 문묘 배향으로 이어졌다. 왕조를 부정한 인물을 그 왕조가 충절의 표상으로 삼는 역설이다.
관련 인물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조
- 청구영언
- 포은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