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가와 단심가 — 두 수의 시조가 갈라놓은 것

1392 · 개경 선죽교

1392년 봄, 개경.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자기 집으로 불러 술자리를 열었다.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이성계 세력은 그를 회유하거나 제거해야 했다.

술이 오가는 중에 이방원이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런들 엇더ᄒᆞ며 져런들 엇더ᄒᆞ리 / 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얽어진들 긔 엇더ᄒᆞ리 / 우리도 이ᄀᆞ치 얽어져 백 년(百年)ᄭᆞ지 누리리라

「하여가(何如歌)」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냐, 만수산 칡덩굴이 서로 얽히듯 우리도 그렇게 얽혀 백 년을 누리자는 뜻이다. 명분 따지지 말고 함께 가자는 회유다.

정몽주가 답했다.

이 몸이 주거 주거 일백 번(一百番) 고쳐 주거 / 백골(白骨)이 진토(塵土)ᄃᆡ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 님 향(向)ᄒᆞᆫ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ᄉᆡᆯ 줄이 이시랴

「단심가(丹心歌)」다. 이 몸이 죽고 죽어 백 번을 다시 죽어 백골이 흙이 되고 넋이 있든 없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리 있겠느냐.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들에게 살해됐다. 그해 7월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두 수의 대비】 이 두 작품이 오래 기억되는 것은 형식이 같기 때문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3장 6구로, 정반대의 답을 한다.

「하여가」의 핵심 이미지는 얽힌 칡덩굴이다. 서로 다른 줄기가 뒤엉켜 함께 자라는 모습 — 타협과 공존의 비유다. 명분보다 실리, 원칙보다 관계를 말한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첫 구절부터 옳고 그름의 문제를 지워버린다.

「단심가」는 정반대로 간다. 죽음을 네 번 반복한다(주거 주거 / 일백 번 고쳐 주거 / 백골이 진토되어 / 넋이라도 있고 없고). 육체가 사라지고 존재조차 불확실해지는 데까지 밀어붙인 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 하나를 종장에 놓는다. 없어질 수 있는 것을 모두 나열한 다음 없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구조다.

시조의 3장 형식이 이런 대결에 적합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초장과 중장에서 상황을 쌓고 종장에서 뒤집거나 결론짓는 구조는, 짧은 시간에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자리에 알맞다.

【그런데 정말 그날 지어졌나】 이 극적인 장면에는 사료상의 문제가 있다.

두 작품 모두 사건 당시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문헌에 실려 전한다. 「단심가」는 『청구영언』 등 조선 후기 가집에 수록됐고, 두 노래가 주고받은 것이라는 서사는 『해동악부』·『포은집』 등을 통해 정착했다.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조차 그가 죽은 뒤 후손과 사림이 편찬한 것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일화의 사실성에 신중한 편이다. 노래 자체가 후대에 지어졌을 가능성, 실제 있었던 대화가 후대에 시조 형식으로 정리됐을 가능성, 사림 세력이 정몽주를 절의의 상징으로 세우는 과정에서 서사가 다듬어졌을 가능성이 함께 제기된다.

실제로 정몽주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조선 초에는 역적에 가까웠으나, 태종대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세종대 『삼강행실도』에 충신으로 실리며, 중종대 사림이 집권하면서 문묘에 배향된다. 왕조를 부정한 인물을 그 왕조가 충절의 표상으로 삼는 역설이 벌어진 것이다. 「단심가」는 그 과정의 산물일 수 있다.

【그때 조선은】 1392년의 개경은 왕조가 갈리는 자리였다. 위화도 회군(1388) 이후 이성계 세력은 실권을 잡았고, 과전법(1391)으로 경제 기반까지 재편했다. 남은 것은 명분뿐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함께 왜구 토벌에 나섰던 동지이자, 조선 건국 세력 상당수의 스승이었다. 그가 고려를 지키려 한 것은 무능해서가 아니라 개혁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고려 체제 안에서의 개혁을 주장했고, 정도전 등은 새 왕조를 원했다.

선죽교에 남았다는 핏자국 이야기는 후대의 전승이다. 다만 그 다리에서 한 사람이 죽고 한 나라가 끝났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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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전기 문학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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