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겨울, 전쟁에서 물러나는 사쓰마의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남원 일대의 도공들을 배에 실었다. 여든 명 남짓. 그들이 내린 곳은 규슈 남쪽 끝 가고시마의 바닷가였다. 그중 심당길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왜 도공이었을까. 당시 일본에서는 차 문화가 절정이었고, 찻그릇 하나가 성 한 채 값에 거래되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은 그 그릇을 제대로 만들 기술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천대받던 장인의 손이, 바다 건너에서는 영주가 군대를 동원해 확보해야 할 자산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끌려온 도공들은 미야마라는 산골에 모여 살게 됐다. 사쓰마는 그들을 특별하게 다뤘다. 마을을 통째로 조선인 촌으로 두고, 조선말과 조선 옷과 조선 이름을 유지하게 했으며, 무사에 준하는 신분을 주었다. 호의가 아니라 관리였다. 기술이 흩어지지 않게 가두어 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단군을 모시는 사당 옥산궁을 세우고 명절마다 조선의 노래를 불렀다.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고향을 통째로 지어 놓고 산 셈이다.
그 마을에서 심씨 집안은 대를 이어 흙을 빚었다. 이름을 떨친 것은 12대 심수관이다. 그는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 사람 키만 한 대형 화병을 출품해 유럽을 놀라게 했고, 이후 사쓰마 도자기는 서양에서 사쓰마야키라는 이름 그 자체로 통하게 됐다. 이때부터 가문의 당주는 대대로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다. 14대 심수관은 한국 명예총영사를 지냈고, 지금은 15대가 가마를 지키고 있다. 1598년부터 세면 4백 년이 넘는다.
이 가문이 이 시리즈에 들어오는 이유는 성공해서가 아니다. 이름 때문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인 마을에 일본식 성을 강요했고, 대부분의 도공 집안이 이름을 바꿨다. 심씨는 바꾸지 않았다. 4백 년을 남의 나라에서 살면서 한 글자도 바꾸지 않은 성은, 이 시리즈의 다른 인물들이 끝내 갖지 못한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새 나라의 내부인이 되는 대신, 경계 위에 집을 짓고 거기서 살기로 한 것이다.
다만 낭만으로만 읽으면 안 되는 대목이 있다. 그 4백 년의 출발은 납치였고, 마을의 유지는 영주의 관리였으며, 조선은 끌려간 이들을 데려오려는 노력을 사실상 하지 않았다. 통신사가 오갈 때 돌아온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그나마 돌아온 이들은 조선에서 다시 천민 도공으로 살아야 했다. 미야마의 도공들이 돌아가지 않은 것은 향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돌아갈 자리가 없어서였다.
지금 미야마에 가면 옥산궁이 있고, 심수관 가마가 있고, 마을 어귀에 조선말 지명이 남아 있다. 4백 년 전 남원에서 끌려온 여든 명이 세운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