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항 — 포로가 된 선비, 일본 유학의 스승이 되다

1597 9월 · 영광 내산서원 · 일본 후시미

1597년 가을, 정유재란이 전라도를 덮쳤다. 영광의 젊은 관리 강항은 가족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피했다. 배는 일본 수군에게 붙잡혔고, 그 자리에서 어린 자식들이 물에 던져져 죽었다. 강항은 살아남은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서른한 살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람은 적게 잡아도 수만 명이다. 도공, 인쇄공, 농민, 여인, 아이 — 대부분은 이름 없이 팔리거나 죽었다. 강항이 남다른 것은 살아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붓을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코쿠의 오즈를 거쳐 교토 근처 후시미로 옮겨졌다. 거기서 한 승려를 만난다. 후지와라 세이카. 성리학에 목말라 있던 이 승려는 조선 선비의 학식을 알아봤고, 두 사람은 밤낮으로 학문을 논했다. 강항은 사서오경을 손으로 베껴 주고, 조선의 과거 제도와 예법과 학문의 체계를 설명했다. 세이카는 이 만남 뒤 승복을 벗고 유학자가 됐고, 그의 학문은 제자 하야시 라잔을 거쳐 에도 막부의 관학이 된다. 일본 성리학의 시작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인 포로 한 사람이 있는 셈이다.

동시에 강항은 첩자 노릇도 했다. 일본의 지형과 병력과 정세를 몰래 적어 조선으로 보내려 했고, 두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다 잡혔다. 그가 남긴 기록에는 일본 각 지방 영주의 세력과 성의 위치까지 정리돼 있는데, 사실상 적국에서 쓴 정보 보고서다. 세이카를 비롯한 일본 지인들의 도움으로 1600년, 그는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붙잡힌 지 만 3년 만이었다.

돌아온 뒤가 이 시리즈의 문법이다. 그는 조정에 일본의 사정을 보고했고 작은 벼슬을 받았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포로였던 사람에 대한 눈초리도 있었을 것이고, 본인이 벼슬에 뜻이 없기도 했다. 그는 영광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쉰둘에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이 그의 기록을 엮어 간양록이라 이름 붙였다. 양을 치며 절개를 지킨 한나라 소무의 고사에서 따온 제목이다.

간양록은 조선에서 오래 읽혔지만, 그가 일본 학문에 남긴 자취는 일본 쪽 기록이 더 자세하다. 세이카 문하에서 강항의 이름은 스승의 스승으로 전해졌고, 그를 기리는 현창비가 오즈에 서 있다. 조선의 하급 관리가 바다 건너에서 한 나라 학문의 뿌리가 되고, 정작 조선에서는 시골 선비로 생을 마친 것 — 최치원과 정확히 겹쳐 놓을 수 있는 인생이다. 다른 점이라면 강항은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었다는 것뿐이다.

출처

관련 콘텐츠

이 글은 경계를 넘은 사람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조선 지도에서 관련 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