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 봉오동의 장군, 극장 수위로 늙다

1937 ·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1940년대 초,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고려극장에는 밤마다 문을 지키는 노인이 있었다. 일흔이 넘은 그 수위가 이십 년 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독립군 사령관이라는 것을, 극장 손님 대부분은 몰랐다.

홍범도는 평양의 머슴 집 아들이었다. 열다섯에 군대에 들어갔다 뛰쳐나왔고, 절에 있다가, 종이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결국 함경도 산속의 포수가 됐다. 이 시리즈에서 출발점이 가장 낮은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총 다루는 솜씨가 그를 역사로 끌어냈다. 일제가 포수들의 총을 거둬 가자 그는 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고, 함경도 산악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아내는 붙잡혀 고문 끝에 죽었고 아들은 전사했다. 그는 국경을 넘어 연해주와 만주로 갔다.

1920년, 그 이름이 절정에 오른다. 봉오동에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골짜기로 끌어들여 크게 이겼고, 넉 달 뒤 청산리에서 김좌진 부대와 함께 다시 이겼다. 독립군이 정규 일본군을 정면으로 꺾은 최초의 승리였다. 쉰둘의 옛 포수가 그 승리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 다음 해가 그의 인생을 갈랐다. 일본군의 대규모 보복을 피해 독립군은 러시아 땅 자유시로 이동했는데, 거기서 독립군 부대들끼리의 주도권 다툼에 러시아 붉은 군대가 개입하면서 수백 명이 죽는 참극이 벌어졌다. 홍범도는 이 사태에서 붉은 군대 쪽에 섰다. 그의 이 선택은 지금까지도 평가가 갈린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뒤로 그는 소련 안에서 살았고 독립군 사령관으로 다시 전장에 서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 시민이 되어 집단농장에서 일했다. 그리고 1937년, 김경천이 잡혀간 이듬해에 연해주의 모든 한인과 함께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보내졌다. 강제 이주다. 그가 내린 곳이 크즐오르다였다. 예순아홉의 장군에게 주어진 일자리가 고려극장의 수위였다. 그는 그 일을 하며 늙었고, 1943년 해방을 두 해 앞두고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봉오동에서 크즐오르다까지, 그가 넘은 국경을 세어 보면 나라가 몇 번 바뀐 것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그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2021년, 죽은 지 78년 만이다. 그리고 두 해 뒤, 그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옮기는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소련에 협력한 이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이 시리즈는 그 논쟁의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적어 둔다. 그는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어느 나라 사람으로 기억될지를 두고 다투어지는 사람이다. 경계를 넘은 사람들은 죽어서도 경계에 서 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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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계를 넘은 사람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