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는 골품제가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 오를 수 있는 관직의 끝이 정해지는 제도다. 그런데 서남해의 섬에서 태어난 이 사람에게는 따질 골품조차 없었다. 활을 잘 쏜다고 궁복이라 불리던 청년 — 성씨도 기록에 없는 이 사람이 신라 안에서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넜다. 당의 서주 무령군에 들어간 궁복은 군중소장까지 올랐다. 이 무령군이 바로 산둥의 이정기 왕국을 무너뜨린 부대다. 장보고라는 이름도 당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활 궁(弓) 자를 성처럼 쓰던 사람이 당식 이름을 갖게 된 것 — 개명부터가 경계 넘기의 흔적이다.
당에서 그가 본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해적들이 신라 사람들을 잡아다 당의 노비 시장에 파는 광경이었다. 같은 처지로 팔려 온 동포들을 본 그는 귀국해 흥덕왕 앞에 서서 제안한다. 저에게 만 명을 주시면 바다를 깨끗이 하겠습니다. 왕은 승낙했고, 828년 완도에 청해진이 세워졌다.
청해진은 해군 기지에서 출발해 무역 제국이 됐다. 장보고의 배는 당의 산둥에서 신라를 거쳐 일본 규슈까지 다녔고, 당 곳곳의 신라인 마을들이 그의 물류망이 됐다. 산둥 적산에 그가 세운 법화원이라는 절은 그 네트워크의 거점이었다. 마침 그 절에 머물렀던 일본 승려 엔닌이 일기를 남긴 덕에, 우리는 이 시대 동아시아 바다의 풍경을 꽤 자세히 안다. 엔닌은 귀국 뱃길까지 장보고 선단의 신세를 졌고, 감사 편지에서 그를 깊이 존경하는 어조로 부른다. 신라 조정이 주지 않은 국제적 지위를, 바다가 준 것이다.
무역왕은 이윽고 중앙 정치의 문을 두드렸다.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도망쳐 오자, 장보고는 군사를 내어 그를 왕으로 만들었다. 신무왕이다. 왕을 만든 공으로 장보고는 감의군사라는, 신라 관제에 없던 벼슬을 받는다. 제도 밖의 사람에게 제도 밖의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선을 하나 더 넘으려 했다. 자기 딸을 왕비로 들이는 것. 이번에는 벽이 움직이지 않았다. 섬사람의 딸을 어찌 왕실에 들이느냐 — 진골 귀족들의 반대 논리는 정확히 골품제의 논리였다. 바다에서는 신분이 없었지만, 서라벌에서는 여전히 신분이 전부였다.
조정은 혼담을 거절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거절당한 실력자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섰다. 염장이라는 자가 거짓 투항으로 청해진에 들어가 술자리에서 장보고를 베었다. 몇 년 뒤 청해진은 아예 혁파됐고, 주민들은 내륙으로 강제 이주됐다. 동아시아 바다의 심장이 뛰기를 멈춘 것이다.
그 뒤의 침묵이 길었다. 삼국사기는 그를 열전에 실으면서도 반신반적의 인물로 애매하게 다뤘고, 천 년 넘게 그는 잊힌 이름이었다. 장보고가 해상왕으로 다시 불리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실력으로 바다를 얻은 사람을, 신분의 나라는 죽였고, 기록의 나라는 오래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