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아홉 사람은 모두 나간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는 방향을 뒤집는다. 침략군의 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한 지 며칠 만에, 무기를 든 채로 조선에 귀순한 일본 장수의 이야기다.
1592년 4월,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선봉장 사야가는 스물두 살이었다. 그는 부산에 내려 조선 땅을 밟자마자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했다. 훗날 그가 밝힌 이유는 이렇다. 예의의 나라라고 들어온 조선을 보니 정말 그러했고, 이런 나라를 치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이 말을 얼마나 믿을지는 독자의 몫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부하 수백 명과 함께 넘어왔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가져온 것이 조선을 살렸다. 조총이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초기에 조총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는데, 사야가는 조총을 만드는 법과 화약 다루는 법, 사격술을 조선군에 가르쳤다. 그리고 옛 동료들을 상대로 싸웠다. 울산과 경주 일대의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선조는 그에게 성과 이름을 내렸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 하여 김해 김씨, 충성스럽고 착하다 하여 충선. 그렇게 사야가는 김충선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조선의 장수로 살았다. 북방 국경에서 여진족을 막았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진압에 나섰으며, 병자호란 때는 예순여섯의 나이로 다시 말에 올랐다. 세 번의 전쟁을 치른 뒤 그는 대구 달성의 우록동에 들어가 마을을 열고, 향약을 만들어 백성을 가르치다 일흔둘에 세상을 떠났다. 시집과 문집이 남아 있고, 후손들은 지금도 우록동에 산다.
흥미로운 것은 두 나라의 기억이 정반대였다는 점이다. 조선은 그를 의로운 귀순자로 기렸다. 반면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여겼다. 무사가 적에게 투항했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고, 조선 쪽 기록이 지어낸 인물이라는 주장까지 있었다. 20세기 후반에야 일본 학계도 그의 실존을 인정했고, 지금은 그를 다룬 일본 소설과 답사객이 우록동을 찾는다. 본명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다. 사야가는 조선식으로 적은 이름일 뿐, 그가 일본에서 누구였는지는 여전히 빈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을 왜 경계를 넘은 사람들 안에 넣는가. 방향이 반대라서다. 앞의 아홉 사람은 태어난 나라에서 길이 없어 밖으로 갔는데, 이 사람은 스스로 길을 끊고 들어왔다. 그리고 앞의 사람들이 끝내 얻지 못한 것 — 새 나라에서 내부인으로 늙어 죽는 것 — 을 얻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당에서 신라에서 원에서 그 많은 인재가 얻지 못한 것을, 왜 적장 출신 한 사람에게는 내줄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아마 김충선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절박함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