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 두 나라 모두에서 이방인이었던 천재

894 · 가야산 해인사

앞의 여섯 사람이 칼과 발과 배로 경계를 넘었다면, 마지막 사람은 붓으로 넘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이야기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쓸쓸하다.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하고 돌아왔는데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골품제에서 6두품은 아무리 뛰어나도 오를 수 있는 관등에 천장이 있는 신분이다. 아버지는 열두 살 아들을 당으로 가는 배에 태우며 말했다. 십 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열두 살에게 할 말인가 싶지만, 이 말에는 6두품 아버지의 계산이 들어 있다. 신라 안에서는 아들의 재능이 천장에 부딪히지만, 당의 과거 시험에는 신분란이 없었던 것이다.

아들은 6년 만에 해냈다. 열여덟에 외국인 대상 과거인 빈공과에 급제한 것이다. 그리고 스물다섯에 인생의 순간이 온다. 황소의 난 — 제국을 뒤흔든 대반란의 토벌 사령부에서 문서를 맡던 최치원이 반란군 수괴에게 보내는 격문을 썼는데, 그 글이 제국 전체에 회자됐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까지 이미 너를 베기로 의논하였다 — 황소가 이 대목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생겨날 정도였다. 붓 한 자루가 신라라는 변방 출신 청년을 제국의 유명인으로 만든 것이다.

스물여덟, 그는 금의환향을 택했다. 당에서의 이력을 모은 문집 계원필경을 왕에게 바쳤고 — 이 책은 지금까지 전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이다 — 왕의 곁에서 문서를 짓는 요직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성공담이다.

문제는 그가 돌아온 신라가 기울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방에서는 세금이 걷히지 않았고, 도적이 일어났으며, 몇 해 뒤에는 견훤과 궁예가 각자의 나라를 세우게 된다. 894년,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 십여 조 — 지금 당장 해야 할 개혁안을 올렸다. 여왕은 그를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인 아찬으로 올려 화답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벽이었다. 개혁안을 올린 공으로 받은 상이, 그의 신분이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계단이었던 것이다. 개혁안 자체는 진골 귀족들의 벽에 막혀 시행되지 못했다.

제국의 시험에는 신분란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당에서 온전한 내부인이었던 것도 아니다. 빈공과 출신 외국인이 오를 수 있는 자리에도 한계는 뚜렷했다. 당에서는 외국인이라 곁가지였고, 신라에서는 6두품이라 곁가지였다. 두 나라에서 모두 손님이었던 사람 — 그의 글 어디선가 배어나는 물러남의 정서는 아마 그 이중의 소외에서 왔을 것이다.

마흔 무렵, 그는 관직을 버리고 떠돌기 시작했다. 경주의 남산, 합천의 가야산, 부산의 해운대 — 해운(海雲)은 그의 호다. 그가 다녀간 자리마다 이름이 남았다. 마지막은 가야산 해인사였다.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이 없고, 그래서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전설이 그 빈칸을 채웠다.

훗날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를 우리나라 유학의 시조로 모셨다. 살아서는 쓰이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문묘에 모셔진 것이다. 경계를 넘은 사람들의 마지막 공통점이 여기 있다 — 그들의 자리는 늘 뒤늦게, 그들이 없는 곳에 마련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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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경계를 넘은 사람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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