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일기 루트

1891~1911

왕실 그릇을 납품하던 사람이 적은 20년 — 나라가 넘어가는 일을 아래에서 본 기록

타임라인 (10개 지점)

  1. 정월 초하루에 붓을 들다 (1891 1월 1일 · 경기 광주 분원리)

    그때 나라는: 분원은 왕실 그릇을 굽던 관요가 있던 마을이다. 나라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관요는 이미 민간에 넘겨져 공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그 그릇을 궁궐과 서울 상인들에게 납품하고 대금을 받아 오던 공인 지규식이 정월 초하루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양반이 아닌 사람의 기록이다. 중인 혹은 신분을 올리려 애쓰던 평민이었고, 한시를 잘 지었다. 이날부터 20년 7개월을 거의 매일 적는다.

  2. 분원과 서울을 오가다 — 납품하고 수금하고 감시하고 (1891 · 분원리 → 한성)

    그때 나라는: 그릇은 배와 수레로 한강을 따라 서울로 갔다. 궁에 올리는 진상과 시중에 파는 물건이 같은 가마에서 나왔다. 이 사람은: 그의 하루는 이런 일로 채워진다. 그릇을 궁궐과 서울 각지 상인에게 납품하고 대금을 받아 오기, 몰래 만들어 유통되는 그릇을 막고 감시하기, 분원과 관청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기, 공인들의 권리를 지키기. 그리고 그것을 다 적었다. 그래서 이 일기에는 앞의 어떤 일기에도 없는 것이 있다 — 그릇의 종류와 값이다.

  3. 동학과 전쟁이 지나가다 (1894 · 한성 · 경기)

    그때 나라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으며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갑오개혁으로 제도가 통째로 바뀌었다. 이 사람은: 그는 정치를 평하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소식이 마을과 시장에 어떻게 닿았고 값과 거래와 사람들의 왕래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적었다. 나라가 흔들리는 일을 위에서 본 기록은 많다. 아래에서 본 기록은 드물다.

  4. 공소에서 회사로 — 조직이 계속 바뀐다 (1897 · 분원리)

    그때 나라는: 대한제국이 선포됐다. 왕실에 물건을 올리던 옛 제도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그가 일하던 공소가 민영화되고 회사로 바뀌고 다시 이름이 바뀐다. 그는 자금을 모으고 가마와 창고를 빌려 경영에 참여했다. 진상 제도가 흔들리며 경영이 나빠지는 과정이 일기에 소상히 적혀 있다. 나라의 제도가 무너지는 것이 한 마을의 가마와 장부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가 보인다.

  5. 일본 자기와 싸우다 (1899 · 한성 시전)

    그때 나라는: 개항 이후 일본에서 들어온 자기가 값싸게 시장을 파고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기점 물건도 늘었다. 이 사람은: 그는 그것들이 서울과 경기 시장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애썼고 그 과정을 적었다. 개항이 무슨 뜻이었는지를 관세나 조약이 아니라 그릇 값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6. 명창을 불러 춘향가를 듣다 (1900 · 분원리 공소)

    그때 나라는: 판소리 명창들이 지방을 돌며 불려 다녔고, 떠돌이 연희패와 굿패가 마을을 찾아왔다. 이 사람은: 공소에서 잔치를 열어 당대의 이름난 명창을 불러 춘향가를 들은 대목이 있다. 연희패와 굿패가 다녀간 이야기, 마을의 제사와 신앙, 집안의 혼례와 상례도 적혀 있다. 판소리와 민속 연구자들이 이 일기를 읽는 이유다.

  7. 외교권을 빼앗긴 해 (1905 · 한성)

    그때 나라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다. 통감부가 들어서고 행정과 재정이 차례로 넘어간다. 이 사람은: 그의 일기에서 이 시기는 거래가 더 어려워지는 시기로 나타난다. 조직은 다시 바뀌고 자금은 마르고 값은 흔들린다. 그가 적은 것은 국권이 아니라 장부인데, 그 장부에 국권이 비친다.

  8. 사재를 들여 학교를 세우다 (1906 · 분원리)

    그때 나라는: 나라가 기울자 곳곳에서 사람들이 학교를 세웠다. 배워야 산다는 생각이 그 시기의 공기였다. 이 사람은: 1906년 그는 자기 재산을 들여 마을에 보통학교를 세웠다. 벼슬 한 자리 얻지 못한 상인이 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사람들이 마지막에 무엇을 붙들었는지를 여러 번 보았다 — 손자, 서원의 위패, 조상의 신주. 이 사람은 학교였다.

  9. 나라가 넘어가고, 이듬해 붓을 놓다 (1910 8월 29일 · 한성)

    그때 나라는: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회사령과 토지조사사업이 잇따르고 무단통치가 시작된다. 이 사람은: 그는 이듬해 윤유월까지 적고 붓을 놓았다. 20년 7개월, 아홉 책이다. 말년에는 천도교로 개종해 손병희를 만나고 교리를 배운 기록을 남겼다. 한 사람의 20년에 그릇 값과 판소리와 학교와 종교가 함께 있다.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시기가 실제로는 이런 모습이었다.

  10. 백 년 뒤에 번역되다 (2005 · 서울)

    그때 나라는: 조선 일기 가운데 번역되지 않은 것이 아직 훨씬 많다. 한문이고 분량이 많아서다. 이 사람은: 이 일기는 규장각에 있었지만 오래 읽히지 않았다. 서울의 시사편찬 기관이 번역을 의뢰해 여덟 권으로 완역됐고 지금은 전자책으로 볼 수 있다. 「일기로 읽는 조선」 열여덟 권 가운데 마지막 자리에 이 기록을 놓은 이유는 하나다 — 앞의 열일곱 권이 거의 다 양반의 눈이었고, 이 한 권이 그 아래에서 본 조선의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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