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유당관북유람일기 루트
해돋이를 보러 가겠다고 졸라 얻어낸 길 — 함흥의 누각에서 동명 바닷가까지, 한글로 적은 유람
타임라인 (8개 지점)
- 남편의 부임지로 — 한양에서 함흥까지 (1772 · 한양 → 함경도 함흥)
그때 나라는: 지방관이 부임할 때 가족이 따라가는 일이 흔했다. 함흥은 함경도의 큰 고을이고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 이름난 유적이 많았다. 이 사람은: 남편이 함흥판관으로 부임하게 되어 따라갔다. 마흔여섯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글들을 썼다. 이 시리즈에서 여성이 쓴 기록은 3편 병자일기 다음으로 두 번째다.
- 낙민루와 만세교 — 첫 구경 (1772 · 함흥 낙민루)
그때 나라는: 함흥의 낙민루와 만세교는 관북의 이름난 경치였다. 오가는 관리들이 시를 남기던 자리다. 이 사람은: 그 누각과 다리를 구경한 이야기가 「낙민루」다. 남자들이 한문으로 시를 남기던 자리에서 그는 한글로 본 것을 적었다.
- 북산루 — 청사초롱 수십 쌍을 앞세우고 돌아오다 (1772 · 함흥 북산루)
그때 나라는: 고을의 누각에서 벌어지는 잔치에는 관에 딸린 기생들이 풍악을 맡았다. 이 시리즈 1편 부북일기의 변방 군영에서도 같은 풍경을 보았다. 이 사람은: 북산의 누각에 올라 기생들의 풍악을 들으며 종일 놀았고, 날이 어두워 돌아올 때 청사초롱 수십 쌍을 들리고 풍악을 울리며 내려왔다. 그 기분을 적어 놓았다. 양반가 부인이 밤에 등불 행렬을 앞세우고 돌아오며 신이 났다고 쓴 것이다.
- 동명에 가겠다고 남편을 조르다 (1772 · 함흥 관아)
그때 나라는: 여성이 먼 곳을 구경하러 나서려면 집안 남성의 허락이 필요했다. 여행은 대개 주어지는 것이었지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동명의 해돋이와 달맞이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보러 가겠다고 남편을 졸라 허락을 받았다. 4부의 다른 세 사람은 사절단을 따라갔거나 시험 보러 가다 떠내려갔다. 목적이 따로 있는 길이었다. 이 여행은 구경 자체가 목적이다. 여행을 스스로 기획하고 밀어붙인 것이다.
- 동명 바닷가로 — 귀경대에 오르다 (1772 · 함흥 동쪽 동명 바닷가)
그때 나라는: 동해의 해돋이는 예부터 이름난 구경거리였다. 다만 새벽에 그것을 보러 나가는 일은 아무나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귀경대에 올라 달이 뜨는 것과 해가 뜨는 것을 보았다. 이 대목이 「동명일기」다. 이 책에서 가장 길고 유명한 글이고 교과서에 실린 것도 이것이다.
- 구름이 끼어 못 볼까 애를 태우다 (1772 · 귀경대)
그때 나라는: 해돋이는 날씨가 정한다. 아무리 멀리 가도 구름이 끼면 못 본다. 이 사람은: 밤중에 나가 추위에 떨며 기다리다가 구름이 끼어 못 볼까 애를 태우고, 사람들이 오늘은 글렀다고 하는데도 버티는 대목이 있다. 해돋이를 보러 새벽에 나가 본 사람이면 다 아는 그 마음이 250년 전 글에 그대로 있다.
- 해가 올라오는 몇 분을 우리말로 적다 (1772 · 귀경대 앞바다)
그때 나라는: 한문으로 쓰면 해돋이는 대개 정해진 문구로 적혔다. 이 사람은: 그는 본 그대로를 우리말로 적었다. 붉은 기운이 어디서부터 번지는지, 물빛이 어떻게 바뀌는지, 해가 쟁반 같기도 하고 수레바퀴 같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훌쩍 솟는지. 자연을 묘사하는 표현이 섬세하고 어휘가 참신하다는 평이 여기서 나온다. 벽돌과 수레는 한문으로도 적히지만, 해가 올라오는 그 몇 분은 우리말이라야 이렇게 남는다.
- 이름을 찾는 데 오래 걸린 글 (1947 · 한양)
그때 나라는: 조선 여성의 글은 당호나 본관으로만 전하는 일이 많았다. 이 사람은: 이 기록이 처음 활자로 나온 것은 광복 직후다. 그때는 의유당이 연안 김씨라고 소개됐다. 그런데 글에 적힌 연대와 그 남편의 부임 연대가 어긋나고, 부임 무렵 연안 김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래서 지금은 신대손의 부인 의령 남씨로 고증됐다. 자료에 따라 김씨로도 남씨로도 적혀 있는 이유다. 글은 250년을 건너왔는데 쓴 사람의 이름은 당호와 본관으로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