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읽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말
주장
빨치산에 대한 왜곡은 한 방향이 아니라 양쪽에서 온다. 한쪽에서는 "빨치산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을 적화하려 한 공산 폭도이며, 토벌은 불가피한 국가 방위였다"고 말한다. 다른 쪽에서는 "빨치산은 부당한 권력에 맞선 순수한 저항자였고 민족의 순교자였다"고 말한다. 두 진술 모두 사료보다 결론이 앞서 있다. 그리고 두 진술 사이에서, 이 주제를 사실대로 다루려는 시도 자체가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봉인된다 — 읽기도 전에.
반박
먼저 분명히 해둔다. 이 글은 공산주의를 옹호하지 않고, 빨치산이 옳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무엇이 사료로 확인되고 무엇이 확인되지 않는지만 적는다. 근거는 대부분 『빨치산 자료집』(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노획문서 영인본 일곱 권이다. 빨치산이 직접 쓴 문건(1·2권)과 토벌 측인 한국경찰이 미군에 매일 올린 보고서(3~5권)가 한 상자에 들어 있어, 양쪽 기록을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다.
오해 ① "빨치산은 좌익 지식인과 사상가들이었다." 경남 인민유격대가 스스로 작성한 「성분별 통계표」(1951년 3월 현재)는 다르게 말한다. 총원 1,258명 중 출신성분이 빈농인 사람이 1,054명, 83.8%였다. 학생은 6명, 사무원 13명, 부농 1명. 여성은 38명이었다. 산에 있던 사람들의 압도적 다수는 사상가가 아니라 가난한 농민이었다. 이 사실은 어느 쪽 서사에도 편하지 않다 — 그들을 이념의 화신으로 보는 쪽에도, 순수한 혁명가로 그리는 쪽에도.
오해 ② "전부 북에서 내려온 자들이었다." 절반만 맞다. 남도부가 이끈 동해남부전구 부대처럼 1950년 6월 38선을 넘어 남파된 정규 유격대가 실재한다. 그러나 규모로 보면 다수는 9·28 수복 이후 퇴로가 끊겨 산으로 들어간 인민군 낙오병과 지방 좌익, 그리고 처형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북과 무관한 자생적 항쟁이었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 1951년 1월 2일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002호가 자료집 1권에 그대로 실려 있다. 다만 명령이 내려온 것과 그 명령이 산에서 작동한 것은 다른 문제다. 안병렬이 1951년 10월 이승엽에게 쓴 편지는 그 부대가 남파 이후 한 번도 중앙당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적었다. 보고도 지령도 보급도 없었다. 지령을 받는 조직이라기보다, 지령이 끊긴 채 방치된 조직에 가까웠다.
오해 ③ "빨치산은 무고한 피해자였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한국경찰 일일보고서에서 빨치산이 마을 사람을 끌고 간 기록(kidnap)만 423건이 확인된다. 쌀과 소와 옷을 가져간 기록은 수백 건이고, 경찰관과 우익 인사, 그 가족을 살해한 기록도 있다. 산은 산 아래에서 먹었고, 협조하지 않는 마을에 폭력을 썼다. 이것을 빼고 쓰면 이 글은 역사가 아니라 변호가 된다.
오해 ④ "그래서 토벌은 불가피했다." 문제는 토벌이 산이 아니라 마을을 겨눴다는 데 있다. 1951년 2월, 제11사단 9연대 3대대는 산청·함양에서 705명, 거창 신원면에서 719명을 사살했다. 같은 부대가 두 달 전 함평에서 500여 명을 죽였고, 1949년 12월에는 문경 석달마을에서 86명을 죽였다 — 전쟁이 나기 반년 전이다. 희생자 다수가 노인과 아이였다. 같은 달 산에서 죽은 빨치산은 경남유격대 자체 집계로 전사 48명·부상 114명이었다. 산에서 죽은 193명과 산 아래에서 죽은 1,400여 명 — 두 숫자를 나란히 놓으면 "토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가 보인다. 이 사건들은 정부 진상조사와 특별법으로 이미 국가 폭력임이 확인됐고, 논쟁 대상이 아니다.
오해 ⑤ "빨치산은 빨갱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어원부터 틀렸다. 빨치산은 러시아어 партизан을 옮긴 말이고 그 뿌리는 프랑스어 partisan, 정규군이 아니면서 한쪽 편에 서서 싸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념도 지역도 담겨 있지 않다. 유고슬라비아는 파르티잔이 국가를 세웠고, 유럽에서 이 이름은 지금도 대체로 명예다. "빨갱이"는 오히려 색 이름 "빨강"에서 파생된 말로 보는 편이 한국어 규칙에 맞는다(노랑→노랭이, 파랑→파랭이). 어원이 다른 두 말이 소리가 닮아 서로를 끌어당겼고, 그 우연한 결합이 "산에서 싸우는 빨갱이"라는 오독을 낳았다.
그 증거가 1951년에 남아 있다. 그해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고려인들이 홍범도의 무덤에 철비를 세우며 한글로 이렇게 새겼다 — "저명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 묘". 봉오동과 청산리의 그 홍범도다. 같은 해 겨울 지리산에서는 같은 단어가 사람을 죽여도 되는 이유였다. 1951년의 한국어에서 "빨찌산"은 최고의 존칭이자 최악의 낙인이었고, 어느 쪽이 진짜 뜻인지를 정한 것은 사전이 아니라 국경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들. 이 주제에는 사실 확인만으로 정리되지 않는 뒤틀림이 여럿 있다. 북한이 "항일빨치산"을 건국 신화로 삼는 순간, 남한에서 같은 단어는 금기가 됐다 — 단어의 운명은 그것을 누가 먼저 소유했느냐로 갈렸다. 홍범도 본인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작성한 조사표 직업란에 "의병 28년"이라 적었다. 빨치산은 그가 자신을 부른 이름이 아니라 남이 그를 부른 이름이었고, 그가 죽은 뒤 묘비에 새겨졌다. 안병렬은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하고 해방 후 토지개혁안을 입안하던 서른 살의 학자였다 — 총을 들 이유가 가장 적어 보이는 사람이 총을 들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는 산에서 자수하러 내려온 젊은이 십여 명을 치안대가 임의로 총살한 기록이 있는데, 그 가해자의 동기 역시 좌익에게 가족을 잃은 복수심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서가 오늘 우리 손에 있는 이유는, 그것이 노획됐기 때문이다. 산에서 쓴 글이 산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경로가 토벌이었다.
왜 이 글이 필요한가. 김득중의 연구가 보여주듯 "빨갱이"는 여순사건 이후 정치적 입장을 가리키는 말에서 "설득할 수도 재판할 수도 없고 제거해야 하는 인간 범주"로 바뀌었다. 이 말의 기능은 상대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읽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제를 사료로 다루려는 시도에는 지금도 같은 말이 돌아온다 — 읽기 전에. 그 반응 자체가 이 글이 다루는 현상의 실물이라는 점에서, 이 항목은 역사왜곡 시리즈에 속한다.
남는 질문. 1951년 2월 거창의 그 겨울에 당신이 마을 앞에 세워진 사람이었다면, 혹은 그 대열을 향해 총을 겨눈 병사였다면, 혹은 자수하러 산을 내려오던 열아홉 살이었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이 질문에는 답이 없고, 답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다만 그 질문을 지운 채로는 이 시대를 이해할 수 없다. 역사를 사실대로 적는 일이 어느 편을 드는 일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사실을 적는 것 자체가 해야 할 일이다.
출처
- [단행본] 빨치산 자료집 전 7권(비매품) — 미국 NARA 노획문서 영인본
- [기록보존소] 경상남도 인민유격대 사업보고서 중 「성분별 통계표」(1951.3 현재) — 총원 1,258명, 출신성분 빈농 1,054명
- [기록보존소] 한국경찰대 일일보고서 1951 — 항목 2,834건 추출표(납치 423건 포함)
- [기록보존소] 안병렬, 「리승엽 선생님 앞」(1951.10.25) — 중앙당과 연락이 끊긴 부대의 보고
- [단행본] 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 [정부·공공기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보고서 — 거창·산청함양·함평 사건, 국민보도연맹 사건
- [언론보도] "사라졌던 홍범도 장군 묘비, 40여년 만에 찾았다" — 1951년 크즐오르다 철비 문안
이 글은 역사왜곡에 맞서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