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 신묘년조 — 돌은 그대로였고, 읽는 방식이 무기였다

1889 · 도쿄·지안

주장

1883년 일본 육군 포병 중위 사코 가게노부가 광개토대왕비의 쌍구가묵본을 일본으로 반출했고, 육군 참모본부가 비공개로 해독 작업을 벌인 끝에 1889년 《회여록》 5집을 통해 그 내용이 공개됐다. 이때 확정된 독법이 신묘년조 서른두 자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로 읽는 것이었다. 일본 학계는 이를 일본서기 신공황후 기사와 결합해 4세기 후반 야마토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입증하는 최고의 물증으로 삼았고, 임나일본부설과 정한론의 근거가 되었다. 5세기 고구려가 세운 비석이, 20세기 일본의 한국 강점을 정당화하는 문서로 인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반박

세 가지를 나눠 보아야 한다. 첫째, 문장 자체가 단일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묘년조는 서른두 자 가운데 넉 자가 판독되지 않고, 주어와 목적어가 확정되지 않아 정반대의 뜻으로도 읽힌다 — 정인보는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았고, 김석형은 분국설로 나아갔으며, 최근에는 백제가 왜와 연결해 신라를 노렸다는 재구성(최연식, 2020)과 이 문장이 특정 사건 기록이 아니라 정벌의 명분을 세우려 구성된 서술이라는 정리(여호규, 2024)가 나왔다. 무엇보다 이 비는 고구려가 아버지의 훈적을 새긴 현창비이고, 문제의 문장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영락 6년 백제 정벌의 명분을 세우는 자리에 놓여 있다. 둘째, 물증이 뒷받침하지 않는다. 200년의 지배가 사실이라면 남았어야 할 유적·유물 체계가 가야 지역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구가 존재했다고 볼 수 없다는 데 양국 학자가 합의했다. 셋째 — 그리고 이 대목은 정확히 말해야 한다. 1972년 이진희가 제기한 석회도포설, 곧 참모본부가 글자를 변조하고 석회로 은폐했다는 주장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연구를 폭발적으로 촉발했지만, 오늘의 학계에서 입증된 것으로 정리되지는 않았다. 1984년 왕건군의 현지 실측과 이후의 원석탁본 비교 연구를 거치며, 비면의 석회는 참모본부의 공작이라기보다 1902년 무렵부터 탁본을 선명하게 뜨려 한 현지 업자들의 손길로 보는 견해가 우세해졌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렇게 정리된다 — 왜곡은 돌에 있지 않았다. 돌은 대체로 그대로였고, 왜곡은 그 돌을 읽는 방식과 그 독법을 국가의 팽창 논리에 동원한 데 있었다. 위조를 밝히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진짜 사료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읽혔는지를 밝히는 일이며, 이 비석의 진짜 사건은 그 어려운 쪽이었다. 같은 이유에서, 이에 맞선다며 사료적 근거 없이 고대사를 부풀리는 방식도 똑같이 틀렸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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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왜곡에 맞서다 시리즈의 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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